[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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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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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포의 집무실에서 나온 아츠시는 그대로 벽에 기대어 주저앉아버렸다. 더 이상 서있을 수가 없었다. 어젯밤부터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끔찍한 몰골의 구울과 늘어진 시체, 그리고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느껴야 했던 무시무시한 살기까지. 심지어 돌아오자마자 한 보고를 듣고 다자이도 만만치 않은 살기를 내비쳤다. 아마도 둘이 눈 앞에 대치하고 있었다면 그 살기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갔을 지도 모른다. 쿠니키다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아츠시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가만히 그를 부축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아츠시가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죄송해요, 신부님."
"오늘은 힘든 하루였으니까 그만 가서 쉬어라. 방까지는 데려다주마."
"…감사합니다."
쿠니키다는 그대로 아츠시를 방까지 데려다 주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아츠시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쿠니키다는 그런 아츠시를 흘끗 보고는 푹 쉬라며 방을 나갔다. 아츠시는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옷을 벗어두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무겁게 감겨오는 눈꺼풀을 이길 재간은 없었다. 돌아누워서도 부들부들 떨리는 팔과 다리가 혹독한 하루를 실감하게 했다. 그동안 스스로가 엄청 긴장했었음을 새삼 깨달으며 아츠시는 의식의 끈을 놓았다.
한편, 아츠시를 데려다주고 집무실로 돌아간 쿠니키다는 보고서에 집중하지 못하고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다자이놈이 그렇게 살기를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본 적 없던 살기에 자기도 모르게 다자이를 쳐다봤었다. 다자이가 살의를 띨 만한 존재가 나타났다는 건 여태껏 소소하게 이어져 온 그들과의 전쟁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 것일까?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내일부터는 조금 더 강하게 훈련하는 수밖에 없다.
보고를 할 때에 뿜어져 나온 다자이의 살기도 무시무시했지만, 그 뱀파이어가 아츠시에게 드러낸 살의도 만만치 않았다. 듣기로 뱀파이어들은 자신들과 타종족이 섞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그래서 그렇게 무시무시했겠지. 그나마 뱀파이어들이 활동하기를 꺼리는 시간대라서 아무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한숨을 내쉰 쿠니키다는 전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성물방입니다.]
"나다."
[오, 신부님 아니십니까? 무슨 일이시죠?]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
[…정말입니까?]
"그래. 별로 유쾌하지 않은 소식을 전해 미안하군."
[아닙니다. 좀 더 많은 무기가 필요하겠군요.]
"그렇다. 그리고 각 성물방의 결계도 강화하도록 소식을 전해줘."
[네, 알겠습니다!]
"부디…몸 조심해라."
[신부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래."
[신의 가호가 있기를.]
"신의 가호가 있기를."
전화를 끊은 쿠니키다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가 노트북의 모니터에 스케줄을 띄우고는 일정의 조정에 들어갔다. 누군가가 옆에서 보면 일중독자라고 하겠지만, 불안을 떨칠 수 있는 방법은 일에 몰두하는 것 뿐이었다. 일을 하고 있을 때면 오롯이 신경을 그 곳에만 쏟을 수 있었다. 그 때만큼은 잡생각도 들지 않았다. 머리를 비우고 기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지금은 기도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
"여전히 칙칙한 곳에 살고 있구만, 아쿠타가와 녀석."
주황색 머리의 사내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에 발을 들이며 작게 투덜거렸다. 물론 빛 아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고는 하지만, 달빛조차 비치지 못하게 암막을 쳐놓은 이 곳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네온사인의 화려함을 좋아했고, 샹들리에의 불빛을 사랑했다. 그래서 그런 반짝이고 화려한 사람들 틈에 언제나 섞여 살았다. 하지만 아쿠타가와는 달랐다. 그는 화려한 불빛은 질색했다. 그리고 그에게 인간이란 먹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사내는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의 비명소리가 아우성치는 지하감옥을 지나자, 막 식사를 마친 아쿠타가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형형한 푸른 눈을 마주한 사내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식사를 방해한건가?"
"아뇨, 막 끝낸 참입니다."
"그래, 그런 것 같네."
"…요코하마에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아아, 수확도 있었고."
수확이 있었다는 츄야의 말에 아쿠타가와의 시선이 그에게 꽂힌다. 츄야는 촛불이 가만히 흔들리는 그 방이 익숙한 듯 찬장에서 꺼낸 유리잔에 와인을 따라 한 모금 마시고는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맞은 편에서 자신이 말하길 종용하는 듯한 시선을 한참 받고서야 츄야는 자신이 확인한 것을 말했다. 하프 뱀파이어와, 그들과 함께 행동하는 엑소시스트의 존재. 그리고 고개를 기울인 채 와인잔을 보던 그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뭐, 그 놈의 모습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 녀석들하고 함께 있겠지."
"…그 자리엔 없었던 모양이군요."
"원래 기가 막힐 정도로 도망은 잘 갔으니까."
"눈으로 확인하지 못해 아쉽네요."
"뭐, 어차피 조만간 싫어도 보게 될텐데. 몸 상태는 어때?"
"…움직일 만은 합니다."
그 말에 츄야는 작게 혀를 찼다. 움직일 만 하다니. 다자이가 폭주를 하고 나간 뒤로 백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회복에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였는데도 아쿠타가와가 다자이에게 뺏긴 것은 회복이 더뎠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뱀파이어의 자연치유력과 인간의 피를 섭취하며 얻는 회복력이면 충분히 재생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쿠타가와는 정기적으로 피를 쏟아내며 재생했던 조직들이 괴사하는 괴로움을 반복해서 겪고 있었다. 다자이가 무슨 짓을 한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저 녀석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들을 수 있을까하는 조금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츄야는 남은 잔을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