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dex Magia : 생명을 얻다
[문호스트레이독스]
마법사 AU
Codex Magia
그 1, 생명을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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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배 안에서 태어났다. 사막을 가르는 배에서 태어나 수많은 대륙을 거치면서 자라왔다. 정해진 국가도, 고향도 없는 이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다른 나라의 사람들은 그들을 집시(Gypsy)라고 불렀다. 호칭은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배가 고향이자 그들의 나라였다. 그들은 나라마다 돌아다니며 화려한 공연을 보여주고 그 돈으로 의식주를 해결했다. 아직 능력이 없던 어린아이는, 언제나 허드렛일 신세였다.
"좀 더 빨리 가져오지 못하겠니!"
"죄, 죄송합니다…."
"정말이지, 그렇게 굼떠서 나중에 공연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
사실 소년에게 공연에 나가지 못한다는 건 협박이 되지 않았다. 그는 차라리 무대 뒤에서 일을 하는 게 더 좋았다. 땡볕 아래서 춤을 주는 사람들도 모르겠고, 신나는 음악은 가끔 바늘이 되어 귀를 찌르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춤을 추고 나서 다같이 일을 하는 이유도 모르겠다. 자신에게는 다들 한다는 이유로 힘든 일들만 도맡아 시키면서 조금이라도 잘못했다가는 어김없이 채찍이 쏟아졌다. 신발은 신지 않는 것이 편했다. 매를 맞고 물과 모래에 쓸려 부풀어버린 발은 고운 신발에는 맞지 않았다.
"…하아."
화물칸 뒤의 아주 작은 공간만이 소년이 숨어서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물론 이것도 그들이 갓 공연을 끝내고, 그가 허드렛일을 전부 다 끝냈을 때에만 허락되는 아주 잠깐의 휴식이었다. 사람들은 공연을 하는 것에 비해 너무 터무니 없이 적은 돈을 준다. 그래서 밥은 언제나 옥수수가루로 만든 죽이었고, 고기는 공연을 하는 사람들이나 먹을 수 있었다. 세상은 너무도 불공평했다. 공연을 하기 싫지만, 고기를 위해서는 공연을 해야했다. 쓸모가 없으면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배 위는 너무도 불공평한 세상이었다. 소년은 배를 벗어나고 싶었다.
덜컹.
사막을 지나가기 시작한지 사흘 째 되던 날이었다. 그 날도 소년은 조용히 화물칸에서 쉬고 있었다. 갑판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은 화물칸의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악마다, 악마가 다가온다! 사람들은 그렇게 외치며 돛을 접고 물건을 급하게 챙겨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소년은 눈치를 보다가 가만히 화물칸의 문을 닫고는 짐 사이로 숨었다. 모래폭풍이었다. 강렬한 모래바람이 배를 때리는 무시무시한 소리에 소년은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빨리 이 모든 시간이 지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와, 아쿠타가와!"
"…! 네, 네!"
"…여기 있었던 거냐."
화물들 사이로 손을 뻗어 자고 있던 그를 두들겨 깨운 건 대장이었다. 모두가 모질게 굴어도 그 사람만은 언제나 친절했다. 이렇게 잠들어 있는 자신을 찾아준 게 그 사람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아쿠타가와는 그의 손을 잡고 걸어나왔다. 배가 엉망이니 함께 청소를 해달라는 말에 아쿠타가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이 곁에 있을 때 만큼은 누구도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래서 아쿠타가와는 대장을 좋아했다.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갑판을 쓸고 닦았다. 그날의 저녁은 고기였다. 누군가는 불평을 했지만, 대장은 힘든 일은 다 같이 이겨내야 한다며 모두에게 똑같이 고기를 나눠주었다. 오랜만에 먹는 옥수수가루 죽이 아닌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배는 다시 힘내서 사막 위를 달렸다.
이번에 지나는 사막은 제법 커다란 녀석인지 꼬박 이틀을 더 가도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로 큰 사막은 처음이라며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다음 도시, 아니 하다못해 오아시스라도 나오지 않으면 이대로 전부 탈수증상은 물론이고 먹을 게 없어 죽어버릴 것이라는 얘기들이 들렸다. 어른들은 곧 심각한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선실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고함소리가 오가고 테이블을 치는 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아이들은 어렴풋이 어른들이 할 일을 알고 있었다.
그건 꽤 자주 있던 일이었다. 당장 돈도 벌 수 없고 식량만 축내는 어린아이를 사막에 버리는 것, 그것이 어른들이 지금 얘기하고 있는 일일 것이다. 몇 번이나 그 장면을 보았고, 몇 번이나 자신은 그걸 피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더러는 어른들이 버리기도 전에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린 아이들도 있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울먹이는 여자아이를 다른 아이들은 모두 위로해주었다. 선실의 문이 열리고 나온 어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각자 맡은 자리로 돌아갔다. 아이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다가 어른들의 호통이 들리고서야 부랴부랴 자기가 할 일을 찾아 나섰다.
밤이 되어서도 아이들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얼른 자지 않으면 매를 맞는다는 어른들의 협박에 아이들은 질끈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잠들기 전에 다음 날 누가 사라지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아이들은 서로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그렇게 다들 깊은 잠에 빠져 여기저기서 코를 골거나 이를 가는 소리들이 들려올 시간즈음이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운 공기의 느낌에 눈을 떴을 때 아쿠타가와는 갑판에 나와있었다. 비명은 지를 수 없었다. 입에는 이미 재갈이 물려있었고, 복면을 쓴 어른들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뜨지 않았으면 그래도 자는 중에 갔을것을."
"…!?!?!!"
"…미안하다, 아쿠타가와."
모두의 결정이었어. 그 말과 동시에 커다란 곡도가 옆구리를 찔러들어왔다. 아프다, 아프지만 입에 물린 재갈때문에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칼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쏟아지는 피를 보던 아쿠타가와는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그대로 사막에 던져진 소년을 뒤로 하고 배는 유유히 모래를 헤쳐나갔다. 소년의 몸은 차가운 모래에 묻혀가고 있었다. 그런 소년이 다시 빛을 느낀 건 해가 중천에 떴을 때였다. 몸은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지만 정신은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던 소년을 꺼낸 것은 하얀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이었다.
"뭐야, 죽었나?"
"……."
재갈은 어느새 풀려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 사람의 모습도 하얗다는 것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손가락을 있는 힘껏 움직이기 위해 애를 쓰자 가볍게 손이 움직였다. 그 사람은 그걸 눈치챘는지 흠, 흠. 하고 목소리를 고르더니 대답은 하지 않아도 좋다며 일방적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자기는 지나가던 마법사인데 요즘 제자가 필요해서 힘을 좀 나눠주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네가 그 제자가 되지 않겠냐는 이야기였다. 바보같은 소리라고 생각했다. 다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 하는 말이 제자가 되라는 거라니, 세 살짜리 어린애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아쿠타가와의 귀에 그의 다음 말이 꽂혔다.
"내 마법은 꽤 특수한 거라서, 받아들이면 부작용이 생겨 죽어버릴 수도 있지만 운이 좋으면 살 수도 있어. 어때, 운을 시험해보지 않을래?"
더 고민할 것은 없었다. 소년은 아직 죽고싶지 않았고, 그는 삶을 얻을 기회를 준다고 했다. 대답 대신 손을 들어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흐릿한 시야에 다가온 얼굴은 확실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웃은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커다란 옥색의 구슬을 꺼내어 소년의 옆구리에 밀어넣었다. 벌어진 틈새로 들어간 구슬은 모양이 변하더니 그대로 소년의 체내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소년은 곧 속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구름 한 점 없는 사막의 하늘 위로 비명이 울려퍼졌다. 온 몸을 뜨거운 기운이 타고 흘렀다. 그런가 하면 곧 그 기운은 차갑게 식어갔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소년은 오래 지나지 않아 식은땀을 흘리며 기절해버렸다.
소년이 눈을 떴을 때는 나무로 된 단단한 천장이 보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온 몸이 땀에 푹 절어있었다. 씻고싶다. 그 생각과 동시에 그는 벌떡 일어났다. 살았다, 살아있었다. 세상에. 내가 살았다. 소년은 가만히 손을 내려다보다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때마침 문이 열리고, 하얀 로브를 걸친 사람이 고개를 내밀었다. 소년이 깨어난 걸 본 그는 가까이 다가와 그를 죽 훑어봤다.
"흠, 좋아. 이제 괜찮은 것 같네."
"…저, 그런데…누구세요?"
"나? 음, 굳이 말하자면 자네를 살려준 사람? 그리고 마법사로 만든 사람."
"…마법사요?"
"응, 마법사."
"…누가요?"
"자네."
마법사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게 생각하는 소년을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간 마법사는 옷을 걷어 소년의 옆구리를 보여주었다. 거울 안의 자기 모습을 본 소년은 손을 자연스럽게 옆구리에 가져갔다. 칼로 찔렸던 곳이 다시 붙어있었다. 흉터는 남아있었지만 그 자리는 제법 말끔하게 봉합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특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마법사는 그걸 가리키면서 이게 마법사라는 표식이라고 했다.
"…그럼 저도 마법을 쓸 수 있는 건가요?"
"뭐,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네에."
"내가 가르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실력은 확실하거든.."
마법사의 웃음에 소년은 조금 의구심이 들었지만 달리 의지할 곳은 없었기에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등을 두어번 두드리고는 아래층에 음식이 준비되어 있으니 씻고 나오라고 했다.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소년은 욕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이 몸을 녹여주는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