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호스트레이독스/가벼운 썰

달콤함의 저변에, 씁쓸함을 섞으며. 3 (완)

스위스무민 2016. 9. 15. 21:27
[문호스트레이독스]
개인세계관 크로스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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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RRR…]
[여보세요.]

짧은 신호가 끝나자 전화기 너머에선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쿠니키다는 그에게 휴식을 방해해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최근에 급상승한 마약상의 리스트를 찾아봐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일말의 희망이었다. 신흥 세력이라면 기록이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이 좋다면 이미 감시망에 올랐을 수도 있다. 정말로 마약상이 잡아갔다면 그가 어디까지 무사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짙은 한숨소리가 들리더니 두어 시간만 기다리라고 말했다. 쿠니키다는 거듭 부탁한다며 전화를 끊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게 이렇게까지 애타는 것일 줄은 몰랐다. 이런 상황에 도움이 되는 이능력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그를 애타게 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조금 뒤에 걸려온 전화는 쿠니키다를 반색하게 만들었다. 조용한 사무실에 울리는 진동소리에 퍼뜩 쿠니키다는 생각을 멈추고 전화를 받았다.

[아, 나야.]
"그래, 말해라."
[음, 조금 전에 부탁한 건 말인데?]
"뭔가 알아냈나?"
[…관계자가 직접 찾아왔어. 말하는 건 잘 모르겠지만, 아주 허위는 아닌 것 같아서.]
"…지금 그쪽으로 가겠다."

관계자라니, 어떤 관계자인 걸까? 예전에 그 조직에 있던 사람? 아니면, 그 밀매상을 쫓는 자? 누구든 상관없었다. 그들을 잡을 단서를 제공해 준다면 그것으로 감사했고, 만에 하나 협력을 얻는다면 든든한 원군이 될 것이다. 쿠니키다는 탐정사의 사람들을 몇 데리고 거리로 나섰다. 그 시간, 그들이 애타게 찾고 있는 이는 오랜 친구와의 회포를 풀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이제 세상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였다. 친구란 게 이렇게 편한 존재였던가? 무언가 할 것이 더 있는 것 같았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가끔 손으로 느껴지는 감촉만이 살아있다는 감각을 일깨워줄 뿐이었다. 그대로 그와 몇날 며칠을 얘기를 하며 지샜다. 사실 많은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자신의 말을 들어줄 뿐이었다. 떠드는 것은 언제나 혼자였다. 하지만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다 사쿠가 눈 앞에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다자이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오다 사쿠는 그런 그를 보며 같이 웃어줄 뿐이었다. 평생 연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행복이라는 것이 이런 감정인걸까, 다자이는 흐릿해지는 감각 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보이는군, 다자이."
"오랜만에 자네를 만나서―말이지."

다자이는 문득 머릿속을 스쳐가는 의문에 잠시 말을 멈추었다. 오다 사쿠는 그를 가만히 쳐다볼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오랜만? 왜 오랜만이지? 얼마 정도의 오랜만이지? 간부가 된 이후로 나는, 나는―. 다자이는 혼자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머리를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 같다.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들이 뒤섞여 지독한 두통과 함께 밀려온다. 다자이는 끊임없이 생각의 파도에 떠밀리면서 천천히 뒤섞인 조각을 맞춰나갔다. 오다 사쿠는 왜 여기에 있지? 나는 왜 그가 이곳에 있는 것에 의문을 품고 있지? 지금 나는 왜 이런 차림을 하고 있지? 여기는 어디일까? 눈을 감고 홀로 생각에 잠겼던 다자이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벽에 세게 들이받았다. 피가 조금 흐른 것도 같지만 이 정도 아픔은 익숙했다. 오히려 그제야 정신이 똑바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그런가, 그랬었군. 다자이는 낮게 웃으며 품에 늘 지니고 다니던 권총을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안전장치를 풀어낸 그는 오다 사쿠를 향해 총을 겨눴다. 오다 사쿠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그래?"
"―아니, 틀려."

자네가 보여야 할 반응은 그게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다자이는 서글프게 웃었다. 오다 사쿠는 이런 것으로 당황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재미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표정을 보여줄리가 없었다. 이제야 머릿속에서 흩어진 퍼즐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렇군, 내가 당했던 거였어. 다자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그의 오랜 친구에게 작별을 고했다. 손가락을 움직여 방아쇠를 걸고, 당겼다. 타앙, 탕. 두 발은 전부 오다 사쿠를 뚫고 나갔지만 그에게서는 피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을 뿐이다. 오다 사쿠를 뚫고 나가버린 총구를 가만히 손으로 잡으며 다자이는 메마른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훑었다. 씁쓸한 가루가 혀에 붙어 입안에 말려 들어왔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타액과 섞어 바닥에 뱉어낸 다자이는 화상을 입은 손으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주변에는 깨어나지 못하는 이들로 가득했다.

"…마약이라."

자신이 당한 것의 정체를 알아챈 다자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주변을 살피다 발견한 감시카메라에 똑바로 총구를 들이댔다. 그 렌즈의 정중앙에 이죽이는 미소와 함께 세번째 손가락을 당당하게 펴서 날려준 그는 그대로 감시카메라를 향해 총을 쏘았다. 탕, 탕. 첫 발은 감시카메라의 렌즈를 명중했고, 두 번째는 감시카메라가 달려있는 지지대를 맞췄다. 제법 요란한 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그러나 누구도 깨어나지 않았다. 아니, 이미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중독이 되어있었다. 처음 본 사람들을 구할 정도의 의리는 없었기에, 다자이는 그들을 둘러보다 무심하게 문의 손잡이를 총의 개머리로 내려찍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그와 동시에 그를 맞이한 것은 수많은 총구였다.

"어라…."
"생각보다 금방 깨어났네, 멋진 오빠?"
"하하, 약에는 제법 내성이 있어서 말이지?"
"당신의 환상도 제법 좋은 연료가 될 것 같았는데."
"약물로 보여주는 그것 말인가?"
"뭐, 조금만 보여줘도 항상 다시 찾아오거든. 인간이란 참으로 나약하지."
"자네들이 고약한 게 아니고?"
"무슨 서운한 말씀을. 우리는 꿈을 파는 거야. 아름다운 꿈이지. 평생 깨어나지 않아도 되는."
"―미쳤군."

다자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동시다발적으로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벨은 빙긋이 웃으며 다자이에게 총을 내려놓지 않으면 지금 여기서 온 몸에 구멍이 나버릴 것이라고 말했고, 다자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높이 들고 총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 반동으로 발사된 총은 정확히 천장의 스프링클러에 맞았고, 화재경보가 울림과 동시에 강렬한 물줄기가 사방으로 쏟아져 나왔다. 다자이는 물줄기에 그들이 당황한 틈을 타 몸을 빠르게 움직여 가장 가까이 있는 졸개의 급소를 찍어 넘어트리며 그의 총을 탈취해 문을 향해 내달렸다. 약물중독으로 죽는 것은 그가 항상 그리던 결말이 아니었기에, 그는 뒤를 급히 쫓아오는 이들을 쳐다보며 들고 있는 총을 난사했다. 물에 젖어서인지 두어 발 정도만이 제대로 쏘아졌지만, 총알은 사방으로 흩어져 적의 발을 묶었다. 산탄총이라니. 정말 구멍을 낼 생각이었군. 다자이는 낮게 휘파람을 불며 총을 그들을 향해 냅다 던지고는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있는 힘껏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저 덜컥거리는 소리만이 잦아드는 물줄기 사이로 들려왔다.

"출입구가 하나뿐이라면 막는 건 어렵지 않아, 멋진 오빠."
"…꽤 철저하군, 예쁜 아가씨."
"우리도 장사는 해야하니까 말이지."
"아쉽게도 이번엔 철수해야겠는데?"
"오빠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모르는데? 그리고 오빠는 여기에 '없었던 사람'이 되는거야."
"그건 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지만."
"…이지만?"
"아직 죽을 때가 되지는 않은 모양이야."

그렇게 말하고 다자이는 귀를 막고 문에서 한 발짝 떨어지며 웃었다. 그와 동시에 꽉 막혔던 철문의 손잡이가 터져나왔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에서는 다자이를 찾는 쿠니키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자이는 여유롭게 연기가 나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다고 말하고는 걸어나갔다. 다자이가 연기 너머에서 나타난 것과 동시에, 요코하마의 군경과는 다른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들이닥쳐 철문 너머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잔뜩 젖어버린 머리를 털고는 쿠니키다가 건넨 자신의 타이를 받아 다시 매면서 다자이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쿠니키다에게 못 보던 옷차림의, 아마도 군경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 대해 묻자 쿠니키다는 저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들이라고만 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다자이는 흐응, 하고 낮은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이곤 쿠니키다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아직도 입에서는 달콤쌉싸름한 맛이 돌고있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