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무민 2016. 12. 12. 17:39
" ㅡ잠깐. 이게 뭐야?"
"네? 어떤 거요?"
"사랑 고백이라니. 처음 듣는다고!"

다음 화의 대본을 받아든 란포는 부들거리며 책상을 내리쳤다. 딱히 강도가 높은 건 아니었지만 곁에 있지 않은 상대에게 지나간 사랑을 고백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처음에 받은 시나리오에도, 인물의 설명이나 개요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기획 단계에서 있지도 않았던 내용에 란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대본을 들고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에게 향했다. 다자이는 대본을 훑어보면서 작게 콧소리를 냈다. 흐응. 이 부분인가. 다자이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시나리오 작가의 의도인지, 시청자의 요청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있어서 나쁘지는 않지만 그 흐름에서 굳이 나와야 할 필요는 없는 내용이었다. 상당히 악의가 섞이긴 했지만 장난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대사였다. 하지만 그 대사는 란포가 불쾌함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란포가 맡은 캐릭터는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기보단 눌러담고 냉정한 말과 행동만을 보여주는, 그가 가장 이입하기 쉬운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협의는 실패했는지 신경질적으로 들어와 소파에 늘어진 란포는 대본을 테이블 위에 던지고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젖혔다.

"실패하신 모양이네요?"
"알면 묻지 마."
"선배한텐 좀 어렵겠네요, 이 표현은."
"…건방지게."
"하지만 누굴 사랑해 본 적 없으시잖아요?"
"시끄러워. 네가 뭘 안다고."
"사람이 다가오는 것도 싫어하시면서."
"…귀찮거든."
"어라, 저도요?"
"네가 제일 귀찮아."

서운하네요. 그렇게 말하며 다자이는 슬프게 웃었다. 란포는 그런 그를 가만히 보다가 슬쩍 눈썹을 내리고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설마, 따라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란포가 그의 얼굴을 덥썩 잡았다. 연구를 하기 시작하면 이렇다니까, 이 선배는. 나보다도 연기에 대한 연구가 먼저라 이건가. 못내 쌓인 불만에 작게 한숨을 쉬자, 작은 손이 좀 더 단단히 얼굴을 잡고 말한다. 움직이지 마. 표정도 풀지 마. 그렇게 말한 손은 얼굴을 더듬으며 근육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런 란포를 보던 다자이는 손을 꼭 잡아 내리면서 말했다.

"선배. 이런 건 흉내낸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넌 경험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네."
"저요? 매일 선배한테 차이고 있잖아요?"
"웃겨, 진짜."
"그러지 말고. 연애 안 해볼래요?"
"미쳤냐? 듣는 귀가 몇이고 보는 눈이 몇인데."
"선배만 조용하면 아무도 모를텐데. 남들 눈엔 평소랑 똑같이 보일 거라고요?"
"…개수작부리지 마라?"

점점 가까워지는 다자이의 얼굴을 밀어낸 란포는 리딩때까지 접근 금지라며 대본을 들고 나가버렸다. 다자이는 굳게 닫힌 대기실 문을 보다가 늘어지면서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대사를 살펴보고 있었다. 하지만 페이지는 란포가 해야할 대사가 있는 곳에서 멈춘 그대로였다. 모처럼 파고들 기회였는데. 아쉬운 숨을 뱉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은 다자이는 한참을 앉아있다가 외투를 챙겨들고 대기실을 나섰다.

한편, 대기실을 나온 란포는 그대로 차를 몰아 후쿠자와의 집으로 향했다. 후쿠자와는 란포가 연기를 배우던 때부터 신세지던 사람이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다. 그가 좋아하는 술을 사들고 현관문의 벨을 누르자, 오토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린다. 여전히 대선배라고 불리는 사람이 사는 것 치고는 작은 집이지만 그의 성품에는 걸맞는 집이라고 생각하며 란포는 안으로 들어갔다. 후쿠자와는 별 말 없이 그를 맞아주었다. 란포는 오랜만에 친가에 돌아간 것 같은 기분으로 그와 술을 나누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말이야. 그런 얘기를 들어버렸거든."
"다자이라고 했던가? 제법 핵심을 짚었군. 그리고 너는, 그대로 화가 나서 뛰쳐나왔다는 거냐?"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뭐지? 경험을 쌓기에는 직접 사귀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선배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보편적인 이야기를 한 것 뿐이다. 뭐, 하나 조언을 하자면 굳이 사랑했던 대상이 연인일 필요는 없다."
"…!!"

그런가, 그렇구나. 연애만이 사랑의 형태는 아니지. 후쿠자와의 말 뒤에 숨은 뜻을 눈치 챈 란포는 그제야 깨달은 듯 벽에 뒤통수를 가볍게 여러 번 들이받았다. 그제야 지금까지 마신 술이 조금 깨는 기분이 들었다. 와, 내가 바보였네. 그렇게 말한 란포는 혼자서 무어라고 계속 중얼거리다 잠들어버렸다. 후쿠자와는 그런 란포를 보며 피식 웃고는 이불을 가져와 그에게 덮어주고는 홀로 조용히 술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