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무민 2017. 1. 12. 00:23
*문스독 2쿨 21화 쌍흑 이후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날조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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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께 묻겠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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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으…. 그 새끼 진짜."

차가운 흙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며 츄야는 미간을 찌푸렸다. 전신이 저리다.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겁다. '오탁'을 쓴 반동이었다. 오탁은 양날의 검이라, 파괴력이 있는 기술이지만 사용자인 츄야 자신조차도 파괴해버리는 무서운 녀석이다. 츄야는 오탁을 사용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날아가버리는 이성과 함께 찾아오는 기억의 상실이 싫었다. 언젠가 소중한 것도 이 손으로 부숴버릴 것만 같다. 츄야는 가만히 장갑으로 싸맨 손을 내려다 보았다. 유일한 제어장치가 세상에서 제일 죽여버리고 싶은 다자이 놈이라는 것도 싫었다. 이 놈이 없어지면 똑같은 능력자가 없는 이상 이 기술을 쓸 수가 없으니까 함부로 죽일 수도 없다. 그리고 오탁을 쓰고 난 다음의 통증이 싫었다. 부들거리는 몸을 일으켜서는 대충 옷에 묻은 흙을 턴 츄야는 다자이가 잘 개어두고 간 코트를 펼쳐들고 모자를 눌러썼다. 팔랑, 펼쳐든 코트에서 나뭇잎이 한 장 떨어졌다. 작게 구멍이 나 있는 나뭇잎을 석양에 비추자 '바보'라는 글씨가 보인다. 쓸데없이 정성들여서 놀리긴. 그에게 믿는다, 고 말했고 맡겨두라고 답한 다자이는 '바보'라는 쪽지 하나만을 남긴 채 돌아가버렸다. 츄야는 괜히 발치에 놓인 돌부리를 걷어차며 기지로 향했다. 기지에 도착한 츄야는 의자에 걸터앉아선 상대가 받지도 않을 전화를 걸었다. 뭐라도 불만을 토로해야 성질이 풀릴 것 같았기에, 츄야는 음성사서함에 다자이를 향한 다양한 욕설을 녹음하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음성사서함 1통]

다자이는 제 폰에 뜬 알림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음성사서함에 연결해 내용을 듣지도 않고 지웠다. 어차피 듣지 않아도 뻔했다. 다양한 욕과 함께 다음엔 몇 배로 갚아주겠다고, 또 널 반드시 죽여버리겠다는 츄야의 메시지일 것이다. 츄야는 바보다. 믿을 사람을 믿어야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자이는 오랜만에 마시는 위스키 잔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퉁겼다. 자신의 옛 파트너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했다. 조금만 함께 한 것으로도 그의 행동습관, 호흡, 생각 패턴, 동작의 간격을 읽어낼 수 있었다. 다자이에게 그런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다자이는 츄야가 거북했다. 그것은 츄야가 다자이에게 무의식 중에 보내고 있는 신뢰의 말들 때문이었다. 믿음, 파트너, 간부, 보스가 아끼는 녀석. 성격은 마음에 안 들지만 실력은 확실한 녀석. 그런 말들이 전부 형태 없는 사슬이 되어 다자이를 옭아매고 있었다. 마피아를 등지고 나온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신뢰받는 건 질색이다. 다자이는 그래서 츄야가 싫었다.

"다음에도 너는 날 믿어줄건가, 츄야?"

대답할 상대도 보이지 않는 말을 허공에 뱉으며 다자이는 조금씩 묽어져가는 술을 넘겼다. 신뢰, 좋은 말이지. 그만큼 무섭고. 다자이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천천히 바의 테이블에 얼굴을 댔다. 비어있는 스툴이 가볍게 돌아갔다. 다자이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흐려지는 초점을 애써 맞춰보았다. 보이지 않을 것이 보일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삼색고양이일 뿐이었다. 뭐야, 선생인가. 다자이는 남은 술을 마저 비우고는 고개를 젖혀 천장의 노란 조명을 끔벅이는 눈으로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열여덟 소년의 지루한 환청이 들리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