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오버

[문호스트레이독스] 한 여름날의―.

스위스무민 2016. 7. 5. 23:48

문호스트레이독스 x 노라가미 크로스오버 합작

한 여름날의.


다자란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라가미 쪽은 가장 최근 모습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 날은 무척 더운 여름이었다. 아마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즈음이라고 생각한다. 다자이는 그 날의 생각만 떠올리면 괜히 다 나은 상처가 욱신거렸다.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펴며 다자이는 자신의 목을 만지면서 사무실의 상석에 앉아있는 그, 에도가와 란포를 번갈아 보았다. 그 날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일들만 일어나는 날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능력을 쓰는 자신도 상식선을 벗어나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날은 유독 이상한 날이었다.

 

덥네, 더워.”

그러게요. 란포씨, 물이라도 드실래요?”

, 그럴까? 어디 자판기라도 있어?”

, 이 마을 자판기는 없는 모양인데요?”

, 너무 안쪽인가 보네.”

 

두 사람은 한 시골 마을에 내려와 있었다. 마침 다른 사원들이 전부 바쁜 덕분에 란포를 혼자 보낼 수는 없어 그나마 한가했던 다자이가 동행하게 된 것이다. 그건 일을 전부 해결하고 올라가기 직전이었다. 우물이나 겨우 있을 정도의 마을이었기에 두 사람은 하릴없이 우물물로 갈증을 해결하려고 했다. 펌프도 없는 오래된 재래식 우물이었다. 열악한 환경에 한숨을 내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던 란포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다. 다자이는 눈을 홉뜬 채 우물물과 눈씨름을 하는 그를 가만히 불러보았다.

 

란포씨?”

?”

란포씨, 괜찮아요?”

.”

란포씨 맞아요?”

맞아. 그런데다자이?¿”

?”

좋은 냄새가 나네?”

란포?”

너도¿같이 가자. 이리 오. ㅇㅕㄱㅣ는 혼자¿ㄱㅏ기 무서우.”

 

그렇게 말하며 란포는 다자이의 목을 졸랐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당황한 다자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풀기 위해 란포의 손을 잡았다. 사실 란포는 힘이 센 편이 아니라 평소 같으면 힘으로 충분히 풀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자신의 목을 조르는 란포의 힘은 평상시에 느꼈던 그의 힘과는 달랐다. 집념이라고 해야 할까, 응어리진 곳에서 진하게 어둠이 타고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상태가 범상치 않았다. 심지어 손은 풀기도 힘들어서 이대로 가다간 정말 죽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자이는 속으로 미안하다고 말하며 그대로 발을 들어 란포의 배를 걷어찼다. 그 충격으로 떨어져나가면서도 란포는 그의 목에 감긴 붕대를 쥐어뜯었다.

 

후두둑, 피와 함께 붕대가 너덜너덜하게 떨어진 걸 본 다자이는 섬뜩한 느낌에 그저 허탈하게 웃었다. 이건 너무하잖아? 자신의 이능력은 물리적으로 접촉해 오는 공격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기에 그는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나 필사적으로 고민했다. 그 때, 머리 위에서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자이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란포를 피하면서 시선을 그 위로 돌렸다. 거기엔 짙은 남색 머리카락에 묘한 스카프를 두르고, 머리카락 색과 비슷한 남색의 져지를 입은 벽안(碧眼)의 남자와 밖으로 뻗은 짧은 금발의 머리카락을 가진 앳된 소년이 있었다. 그 둘은 자신을, 아니 정확히는 그 너머에 있는 란포를 보고 있었다.

 

완전히 들러붙어버렸네.”

어쩔 수 없지, 베자.”
인간까지?”

그 정도는 조절할 수 있잖아?”

그야, 그렇지만.”

 

벤다고? 잠깐, 누구를? 설마 란포씨를? 다자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란포는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생각에 잠기는 바람에 미처 피할 수 없게 된 다자이의 앞을 막아선 것은 아까 소년과 얘기를 나누던 남자였다. 그는 란포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며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짧게 셋키(雪器)’라고 말했을 뿐인데 옆에 있던 소년이 칼로 모습을 바꿔 그의 손에 쥐어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22년 평생을 살아오며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생이라고 생각했건만,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세상에는 여전히 놀라운 일이 많았다. 남자는 셋키라는 이름의 칼을 손에 쥔 채 란포를 마주봤다. 란포는 구부정하게 자세를 잡은 채 그 남자를 노려보다 씨익 웃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는 평소에 듣던 것과 전혀 다른 목소리가 나왔다.

 

[냄새.]

이렇게 빨리 아야카시가 되는 인간은 처음인걸.”

[어떡할 거야?]

이 정도면 아무리 네가 조절해도 인간을 베지 않기는 힘들어.”

 

벽안의 남자는 혼자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대충 이야기로 미루어보아 이대로 두면 정말로 란포씨를 베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다자이는 심각하게 중얼거리는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았다. 남자는 그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며 다자이를 빤히 보았다. 남자의 새파란 눈에는 당혹감이 서려있었다. 다자이는 그런 그를 보다가 사람 좋게 웃으면서 손을 놓고는 말을 걸었다.

 

미안하네. 자네들이 사람을 벤다고 하기에 신경이 쓰여서 그만.”

꼭 텐진같은 말투구만. 그보다 날 만지다니. 히요리 이후로 오랜만인데?”

[지금 감탄할 때가 아니야!]

아차, 그렇지. 빙의체.”

그게 말이지? 저 빙의체는 내 일행이거든. 그래서 모쪼록 다치지 않게 해주면 좋겠는데.”

일행?”

그렇다네.”

 

다자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곤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그들에게 달려드는 란포를 가볍게 피하고 그의 뒷목을 붕대가 감긴 칼의 손잡이로 강하게 내리쳤다. 축 늘어진 란포의 몸을 들쳐 업은 사내는 다자이에게 따라오라고 고갯짓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 짧은 사이에 기절한 란포가 눈앞에서 납치 비슷한 것을 당하는 모양새를 보면서도 다자이는 그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붉은 도리이가 세워진 신사였다. 신사에 도착해서 도리이 옆에 란포를 대충 눕혀둔 남자는 신사를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잊고 있었다는 듯, 조금 뒤에서야 말을 꺼냈다.

 

돌아와, 유키네.”

. 진짜 여름이라 더 심하네. 야토, 손 땀 정말 최악이야. 어떻게 할 수 없어?”

너 이 녀석, 주인한테!!”

네가 땀이 많은 건 사실이잖아!”

 

다자이는 란포의 옆에 앉아서 그의 상태를 살피다가 다시 한 번 남자를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묘하게 익숙한 듯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저 남자, 목소리가 란포씨랑 닮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데 제 몸을 킁킁거리며 투덜거리던 소년이 다자이의 옆에 다가왔다. 정확히는 지금 그의 옆에 있는 란포의 상태를 보는 게 목적이었는지, 그는 시선을 시종일관 란포에게 맞추고 있다가 조금 뒤에 다자이를 보았다.

 

저 인간이 일행이라고 했지? 그래도 지금은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거야.”

자네, 무기로 변하는 이능력을 갖고 있는 건가?”

이능력? 그게 뭔데?”

보통 인간은 쓸 수 없는, 평범하지 않은 능력이지.”

, . 그런 거라면 일단 아니야. 난 인간이 아니거든.”

인간이아니다?”

 

다자이는 소년의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인간이 아니라면 어째서 내 눈에는 이다지도 선명하게 보인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자 어쩐지 실체를 확인해 보고 싶어진 다자이는 가만히 손을 뻗어 소년의 볼을 잡았다. 소년의 볼은 제법 말랑말랑했다. 충분히 만질 수 있는데 인간이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소년은 그의 행동에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을 멈춘 다자이는 소년의 표정을 보고서야 손을 놓아주었다. 다자이에게 잡혀 빨개진 볼을 문지르며 소년은 투덜거렸다.

 

갑자기 무슨 짓이야?”

아니, 인간이 아니라는데 어떻게 보이는 지 궁금해서 말이야?”

그건 나도 궁금하거든? 보통은 우리를 잘 인식하지 못하니까.”

인식? 그런 문제인가?”

 

다자이의 말을 들은 소년은 머리를 긁적이다 주변에서 적당한 나뭇가지를 주워와 바닥에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을 했다. 보통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차안, 사람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살고 있는 곳을 피안이라고 한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들은 피안에 살고 있어서 보통은 눈에 띄지 않는단다. 그럼 나는 지금 보이지 않아야 할 것이 보이는 상태란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다자이는 한숨을 쉬고 아직 깨지 않는 란포를 흘끗 보았다.

 

란포씨는 어째서.”

그 인간, 비어있던 거 아냐?”

비어있어?”

아니면 부정적인 사고에 휩싸여 있던가.”

야토, .”

아야카시는 언제나 차안의 존재를 피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하거든. 거기에 맞는 조건을 갖고 있던 게 아니냐는 거지.”

비어있다, .”

 

야토라는 사내의 말을 다자이는 가만히 따라 중얼거렸다. 뭐 짐작 가는 게 있냐고 사내가 물었지만 그건 알 길이 없었다. 에도가와 란포는 애초에 제멋대로인 면이 강한 사람이었다. 주변에서는 전부 그런 그를 받아들여주었고, 누구도 그가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속내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건 사장님 정도가 아닐까? 야토라고 불린 사내의 말이 맞을 지도 몰랐다. 그는 어딘가 텅 비어있는 존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이대로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자네 말이 맞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어쨌든 저 안에 들어있는 걸 란포씨에게서 떼어놔야 할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 저대로 두면 네 동료는 이쪽의 존재가 되어버릴 테니까.”

피안의 존재? 그건 죽는다는 얘기인가?”

, 인간으로써는 말이지.”

그건 곤란한데. 어떻게든 떼어낼 방법은 없는가?”

아주 없는 건 아닌데. 의뢰비만 주면 얘기해주지.”

의뢰비?”

? 신에게 소원을 빌려면 그 정도는 당연하잖아?”

? 자네가 신인가?”

그렇지.”

어디로 봐도.”

직업 없는 체육복을 입은 사람으로밖에 안 보이지?”

확실히.”

유키네, 너 인마!! 인간, 너도 동조하지 마! 잘 들어, 이 몸은 언젠가 일본 전체에 이름을 떨치는 신이 될 거라고!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야토는 삿대질을 하며 성질을 냈지만 다자이는 그냥 웃고 말았다. , 신이라. 딱히 그런 걸 믿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까 저 유키네라는 소년의 외형이 변한 것을 보고 나면 아주 믿을 수 없는 일도 아닌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의뢰비라. 야토의 말을 떠올리며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다자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있는 거라곤 100엔짜리 동전 하나, 10엔짜리 두 개, 5엔짜리 하나였다. 이걸로 뭐가 되기나 할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야토가 5엔짜리 동전을 하나 집어서 가볍게 튕기고는 웃었다.

 

네 소원은 접수됐다.”

 

당신에게 인연이 있기를. 그렇게 말하고 동전을 들고 다니던 병에-그는 병을 품에서 꺼냈다. 그 체육복 어디에 그만한 병을 넣을 공간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 넣은 야토는 아직 깨지 않은 란포를 보며 말했다. 지금 그의 의식은 아야카시에게 꽤 많이 먹혀있어 위험한 상태인 거라고. 일단은 잠들어있는 의식을 깨워야 한다고 했다. 그걸 무슨 수로 깨우느냐고 물어보니 그는 볼을 긁적이다가 말했다. 이름을 부르라고.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했다. 그 때, 기절해 있던 란포의 몸이 움찔거렸다. 제대로 일어나면 아마 또 한바탕 싸움이 시작 되겠지. 이젠 되든 안 되든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란포는 사방이 어두운 곳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상태를 천천히 고찰하기 시작했다. 그냥 우물물을 길으려던 것뿐인데, 갑자기 오싹한 느낌이 들었고 그대로 정신을 잃은 것 같다. 그 전에 어떤 눈을 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감이 오질 않는다. 우물 안이라기엔 차갑지도 않고 뭔가 몸이 다친 것 같은 느낌도 나지 않았다. 란포는 습관처럼 머리 뒤로 팔을 넘기고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 그리고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보았지만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정답이 보이지 않는다. 란포는 이런 상태를 싫어했지만, 그 이상으로 오랫동안 생각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그는 생각을 멈추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조금씩,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는 기분이 이상하게도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문득 멀리서 날아온 부드러운 향이 코끝을 스친 것 같다.

 

[, , .]

란포씨, 정신 좀 차려 봐요!”

 

기절해있던 란포가 일어난 뒤의 상황은 아까보다도 엉망진창이었다. 란포의 얼굴과 몸에는 군데군데 검푸른 멍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아야카시라는 것에 가깝게 되어가는 것 같았다. 어설픈 날개까지 나와 그는 지금 허공에 떠 있는 상태였다. 유키네가 친 결계 너머에서 상태가 악화되는 란포를 보며 다자이는 이를 꽉 물었다. 이름은 지금까지도 몇 번이고 불렀다. 하지만 어째서 통하지 않는 걸까. 도대체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지냈기에 이렇게 애타게 불러도 한 번을 돌아보지 않는 겁니까? 입술을 꾹 다문 채 란포를 쳐다보는 다자이를 보던 야토는 느긋하게 그에게 다가와 물병을 건넸다. 다자이가 이해가 가지 않는 눈으로 그를 보자 야토는 병을 가볍게 흔들고 말했다.

 

이 신사에 있던 정화수야.”

정화수?”

잠깐의 틈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거다.”

…….”

그 틈을 놓치면 정말로 모든 게 끝날지도 모르지. 이번엔 너까지.”

지금은 그 기회가 있다는 것조차 감사할 일이군.”

그렇겠지. 실패하지 마라.”

 

다자이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물병의 뚜껑을 열었다. 유키네가 결계를 거둠과 동시에 아야카시화가 상당히 진행된 란포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가벼운 몸짓으로 란포의 공격을 피한 다자이는 그에게 정화수를 있는 힘껏 뿌렸다. 치이익, 무언가가 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괴로운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아아악!!! 잡음이 섞인 란포의 비명소리가 경내를 울렸다. 다자이는 그 틈을 파고들어 란포의 어깨를 꽉 잡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란포씨, 제 목소리가 들립니까? 들리면, 이제 그만 돌아오세요. 란포씨!!”

…ㅍㅏ…ㅇ ㅗ ㅐ?누구, 어디야?”

에도가와 란포!!”

 

분명히 나중에 이렇게 부른 걸 알면 화를 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따질 시간은 없었다. 애타는 다자이의 외침이 닿았던 걸까? 잠깐이지만 죽어있던 란포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야토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품에 갖고 있던 다른 정화수를 전부 그에게 들이부었다. 울컥, 란포의 입에서는 피가 나왔고 괴로운 소리와 함께 그는 몸부림쳤다. 다자이는 차마 볼 수 없는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한참을 피를 토하던 란포의 움직임이 멎을 때였다. 그의 몸에서 꿈틀거리는 검은 물체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란포의 몸은 가만히 다자이의 품으로 떨어졌다.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 야토는 유키네를 불러들였다.

 

시호를 쥐고 여기에 머물러라. 가명을 지녀 내 종복이 되리니. 이름은 뜻으로, 그릇은 소리로. 내 명으로 신기가 되어라. 와라, 셋키!”

 

야토의 손에 잡힌 유려한 흰 날의 양손 검의 모습에 다자이가 넋을 잃은 사이, 야토는 영창을 하며 깨끗하게 아야카시를 베어버렸다. 허공에서 아야카시가 화려하게 날아가는 모습을 보던 다자이는 그제야 자신의 품에 기절해 있는 란포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깨지는 못했지만 일단 겉으로는 상처가 없어보였다. 다자이는 가만히 그의 등을 두드리며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

 

란포씨, 란포씨.”

. 다자이?”

다행이다. 정신이 드세요?”

으음, 무슨 일 있었어?”

 

란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몸도 뭔가에 얻어맞은 것 마냥 전신이 아프고 묵직했다. 옷은 푹 젖어있었고,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다자이는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란포를 쳐다보았다. 그가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한 번 몸을 움직여 바닥에 주저앉자, 누군가가 머리에 손을 올렸다. 란포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짙은 남색의 머리카락에 밝은 벽안, 그리고 알 수 없는 스카프를 매고 져지를 입고 있는 모습이 퍽 우스꽝스러웠다. 평소 같았으면 아마 그 모습에 폭소했겠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는 란포의 머리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오늘은 신사에서 머무는 게 좋을 것 같네.”

?”

일단 그 전에 정화수로 목욕부터 좀 하고.”

자네는 대체 누군가?”

그건 일단 네가 씻고 나와서 얘기하지. 아직 멎음이 남아있으니까 말이야.”

멎음?”

부정을 탔다고. , 처음에 아야카시한테 어떻게 닿았지?”

 

아야카시? 아까 그 꺼림칙한 걸 말하는 건가? 야토의 말에 란포는 가만히 우물에서의 일을 되짚어봤다. 그 때의 기억이 어쩐지 흐릿하고 몽롱했지만 눈이 마주쳤던 건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눈이 마주친 다음에는 어쨌더라? 왠지 느낌이 나빠서 팔을 빼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도망갈 틈도 없이 달라붙었다. 순식간에 목을 졸렸던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란포가 무의식적으로 목을 만지려고 하자 야토가 그의 손을 잡았다. 야토는 인상을 펴지 않은 채 다른 손으로 란포의 넥타이를 잡아 내렸다. 그리고 셔츠 깃을 잡아서 젖히자 그 자리에는 검푸른 반점이 생겨 있었다. 야토가 건넨 거울로 자신의 목을 본 란포는 제법 놀랐는지 직접 만져서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야토는 손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그걸 건드리면 이번엔 네 손도 똑같이 부정을 탈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신사의 뒤뜰에 정화수가 있어. 그걸 써.”

정화수?”

신사의 땅은 오랫동안 부정한 것을 정화해 온 기도가 깃든 자리지. 효과가 있을 거다. 혼자선 힘들 테니까 저기 미라 같은 인간한테 도와달라고 하던가.”

 

미라 같은 인간. 야토의 다자이에 대한 정의에 란포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다자이는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그의 결론에 대해 딱히 반박할 생각은 없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욕실로 갔다. 제법 시골의 도시였지만 그래도 수도시설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자이의 부름에 욕실로 간 란포는 옷을 하나씩 벗었다.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굉장히 엉망이었다. 목부터 쇄골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멍이 들어있었고, 군데군데에 타박상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란포는 한숨을 내쉬고는 욕실 의자에 걸터앉았다.

 

어쩐지 온 몸이 아프더라니.”

죄송합니다.”

아니, . 어쩔 수 없었겠지.”

.”

자네는 다친 데 없나?”

 

그렇게 말한 란포의 눈에 띈 것은 겨우 피가 멎은 곳에 눌어붙은 다자이의 붕대였다. 그 원인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아야카시에게 씌었을 때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분명히 제일 먼저 달려들었겠지. 미안하게 됐네. 그렇게 말하려는데 갑자기 쏟아진 차가운 정화수에 란포는 몸을 웅크렸다. 대뜸 쏟아지는 물에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 란포였지만 커다랗게 퍼진 멎음이 사라지는 아픔과 차가운 정화수에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몸만 웅크리고 있었다. 쏟아지던 물이 멈추고 제 위에 수건이 덮인 뒤에야 란포는 몸을 덜덜 떨며 다자이를 쳐다보았다.

 

일부러 그랬지?”

? 뭐가요?”

됐어. 자네도 치료해야지.”

 

물기를 닦아내고 벗어두었던 옷을 입으며 란포는 다자이를 쳐다보았다. 다자이는 머쓱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지만 이미 나있는 상처까지 숨길 재주는 없었다. 결국 꼼짝없이 치료를 받게 된 다자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피와 엉겨 붙은 붕대를 떼어내는 것은 제법 아파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소독약을 묻힌 솜으로 상처를 닦아내고 약을 바르고 나자 통증이 신경을 타고 올라왔지만 지금은 그걸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겨우 정리를 끝내고 나왔을 때에 이미 그들은 없었다. 마치 그 자리에는 원래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다자이는 경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그들을 찾아보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그 사이 펼쳐둔 이불에 누워 잠든 란포를 본 다자이는 피식 웃으며 이불을 덮어주곤 그 옆에서 밤을 지새웠었다. 그날의 기억은 그렇게 끝나지만, 다자이는 아직도 그날 만났던 이들이 누굴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그들은 누구였을까?”

? 뭐가?”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란포의 물음에 다자이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가끔 란포에게 그 날의 일을 떠봤지만 란포의 기억에서는 그들을 만났다던가, 아야카시에게 씌었다던가 하는 부분은 빠져있었다. 애초에 기억력이 나쁜 사람이 아닌데 그 부분만큼은 마치 칼로 도려낸 것처럼 빠져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떠올리기에 별로 유쾌한 기억은 아니니-게다가 만약 란포씨가 기억해낸다면 낯간지러운 사과도 받게 될 것만 같고- 다자이는 혼자서 그 날의 기억을 가져가기로 했다. 지금도 붕대 아래에는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