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26. 03:40
문호스트레이독스
다자란
비의 노래와 우울한 축음기

진단메이커 : "나를 아직도 사랑하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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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흐리다. 금방이라도 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습한 날씨였다. 숨을 들이쉬면 폐부로 스며드는 비릿한 냄새가 무거운 공기를 더 무겁게 만들어 몸을 감싸왔다. 란포는 책상에 늘어진 채 모자를 끌어내려 얼굴을 덮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을 하면 질 것만 같았다. 이 모든 것은, 그래, 그 다자이 때문이다. 에도가와 란포는 자신을 뒤흔들어놓는 그가 싫었다. 자신을 파악하려고 하는 그 눈이 싫었다. 그래서 눈을 감았고, 그래서 그를 외면했다. 사랑을 노래하는 그 입을 가끔 틀어막고 싶었다. 그 말을 듣고 넘어가는 귀를 찌르고 싶었다. 달콤한 사탕발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런 사내다. 모를 리가 없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아주 잘, 질릴 정도로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그의 등을 남몰래 쫓고 있었던 걸까. 시선이, 신경이 그의 말 하나, 행동 하나에 반응하고 있었다. 정말 지독하게 바보같은 본능이었다. 다자이 오사무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를 사람이 아니다.

"…하아."

우울한 기분을 뱉는다. 기도를 통해 나온 숨은 성대를 긁으며 지친 숨소리를 냈다. 모자를 고쳐쓰고 고개를 젖혀 점점 무거워지는 구름을 보던 란포는 하늘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고 거리로 나섰다. 어디로 갈 지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걸음이 닿는 대로 가 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돌아오는 길은, 하다못해 누군가에게 묻기라도 하면 될테다. 아니면 전화라도 한다면 분명히 누군가는 데리러 나오겠지. 자신은 탐정사에 있어 그런 존재였다. 아마도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아마도, 라는 전제가 붙은 것은 약 한 사람의 마음을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5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파악할 수 있는 란포도, 그 사람만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몰랐다. 커다란 사탕을 까서 껍질을 적당히 버리고는 입 안 가득 물었다. 혀 끝을 통해 퍼지는 단맛이 천천히 혀를 마비시켰다. 다자이 오사무는 그런 존재였다.

툭, 투둑, 결국 구름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물을 떨어트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비를 피하느라 난리였지만, 란포는 그저 모자를 눌러쓴 채 걸음을 멈출 뿐이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늘은 쉽니다.'라는 팻말이 걸린 가게의 조그마한 녹색 차양 앞에 선 란포는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빗줄기는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차양에 떨어지는 빗물이 리듬이 되어 귓가를 때린다. 아득해지는 시선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덮어씌워진다. 란포씨, 란포씨. 제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르던 목소리가 들렸다. 지독히도 그리우면 환청이 들린다더니 그런 모양이다. 찌르르, 떨려오는 코 끝이 시큰해졌다. 나는 왜 아직도 이 지독한 꿈에서 깨지 못하고 있을까. 나도 너처럼 죽음을 바란다면 네가 날 데리러 올 것이라는 이 부질없는 환상에서 깰 수 있을까? 란포는 흐려지는 시야를 고개를 들어 가만히 숨기고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무엇을 바라는 걸까, 먼저 경계선에 선 것은 자신이었다. 언제든 벗어나기 쉽게 발을 걸칠 요량이었다. 줄타기같은 것은 특기가 아니지만, 다자이가 상대라면 얘기가 달랐다. 내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내기는 자신과의 내기인지, 그와의 내기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있었다. 선을 넘어가서 떨어지면 진다. 그렇게 천천히 발을 담근 곳이 끝이 없는 늪이 될 줄은 몰랐다. 사랑해요. 그 부질없는 속삭임은 조금씩 심장을 물들여갔고, 마침내 그 말이 없으면 살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된 순간부터 더 이상 달콤한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불렀다. 몇 번이고 혀 끝에서 맴돌던 말을 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자이는 조금씩 란포에게서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것은 확실하게, 그리고 아플 정도로 뚜렷하게 란포의 심장에 새겨졌다.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한다.

가시가 된 결론은 몸을 파고들었다. 다자이가 란포를 부르는 목소리는 날카롭게 그의 고막을 찢었고, 머리를 마구 찔러댔다. 좋아해서 부르는 것인지, 의무감에 애정을 표현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따라 거리를 조금씩 벌렸다. 다시 빠져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다자이는 그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조금 거리를 두고 마음을 굳히면 그게 우습다는 듯 다시 거리를 좁혀왔다.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거부하면 천연덕스럽게 옆에 붙어 다시 달콤한 말을 해주었다. 하지만 란포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다자이의 말은 란포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저 란포는 오래된 축음기처럼 예전에 들었던 미사여구들을, 애정표현들을 머릿속에서 재생하며 다자이의 말에 덮어씌웠다. 다시 한 번 조용히 그가 했던 말들을 빗소리에 섞어 복기해봤지만, 온기는 전해지지 않았다. 실패했다.

하늘이 마음과도 같아 란포는 비를 피하기를 그만두고 한 걸음, 차양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한꺼풀 너머로 들리던 빗소리는 점점 더 세게 몸을 때려왔다. 이제 그만두고 싶어. 이런 것. 그렇게 생각하는 란포의 눈가에선 빗물이 흘렀다. 마음 속이 점점 비어가는 것을 느꼈다. 빗소리만이 그 빈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이 비마저 그치면 완전히 비어버리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기 전에 이 마음을 묶을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돌렸지만 레코드판이 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빗물에 고장난 축음기는 아무 기능도 하지 못한 채 마침내 재생마저 멈추고 말았다. 이대로 영원히 고장난다면 좋을텐데. 누군가가 들으면 경악할 말을 홀로 중얼거리며 란포는 빗속에 몸을 맡겼다. 그러나 조금 뒤, 더 이상 자신을 때리는 비가 느껴지지 않아 란포는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얼굴이, 그리고 무서운 얼굴이 애처로운 미소를 품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란포씨."
"…?"
"이런 데서 뭐하고 계세요. 감기 걸려요."
"…왜 여기에 네가 있어?"
"하하, 여과없이 말씀하시네요."

하지만. 하지만, 너는 더 이상, 나를 신경쓰지 않을거잖아. 조각난 단어들은 말이 되지 못한 채 눈물이 되어 흘러넘쳤다. 다자이는 제 얼굴을 보고 울기 시작하는 란포를 가만히 품에 안았다. 푹 젖어버린 옷이 물기를 옮기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남의 생각을 금세 알 수 있다는 건 꽤 얄궂은 일이었다. 사소한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구애는 어느샌가 그를 진심으로 만들어버렸다. 란포만이 아니었다. 스스로도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심을 조금씩 버렸다. 그의 버릇을 관찰하는 횟수를 줄였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더 돌렸다. 이 이상 소중해져서 그를 잃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하지만 그 행동이 이런 결과를 불러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소중했기에 했던 행동이 오히려 그를 몰아붙였다. 한참을 말없이 울기만 하던 란포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조용히 다자이의 품에서 떨어졌다. 단단하게 잡으려는 팔을 떨어트린 란포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발개진 코끝과 눈가를 쓸어주고 싶었다. 저도 모르게 다가간 손을 뿌리치며 다시 빗속으로 한 걸음 물러선 란포는 다자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우산을 든 채, 다자이는 란포와 시선을 마주했다. 흐릿해진 눈동자 너머로 다자이를 빤히 보던 란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를 아직도 사랑하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어."

거센 빗줄기 속에서, 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지만 다자이는 그의 말을 들었다. 네, 그럼요. 길지 않은 대답을 한 다자이는 가만히 팔을 벌렸다. 란포가 좀처럼 다가오지 못하자, 다자이는 제가 움직여 란포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정말로 이런 비를 계속 맞으면 그냥 감기로는 안 끝나요. 그러니까 돌아가죠. 다정한 말을 담은 눈동자를 본 란포는 이내 시선을 땅으로 향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닳아서 패인 길가에 생긴 물웅덩이에 두 사람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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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