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9. 22. 21:22
또,

사라졌다.


다시 그 사람이 없는 아침이 밝았다.


당신은,

왜.


상처자국이 욱신거린다. 붕대에 배어나온 피가 직전의 고통을 알려준다. 쾌감, 애정, 그런 것과는 단연코 거리가 멀었다. 아쿠타가와는 고통에 눈을 떴고 다시 고통에 눈을 감는다. 그 사람이 남긴 상처가 훈장이라도 되는 양, 덤덤한 눈빛엔 조금의 온순함이 깃들어있다. 더 이상 놀라지도 않는다. 그 사람은 어차피 떠날 생각이었겠지. 나는, 나로써는 그를 잡을 수 없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어설프게 닫힌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미간을 찌푸리며 이불을 끌어올리자, 여태껏 가만히 있던 그림자가 손을 뻗어 커튼을 닫는다. 아쿠타가와는 그를 바라보다 그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지만 부르지 않았다. [이제, 정신이 든 모양이지?] 익숙한 목소리가 물었다. 아쿠타가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네.]라고 답했다.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

총상은 쉽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재생하는 데에 제법 시간이 걸린다. 총알은 살을 찢고, 잔열은 그 자리를 태운다. 피는 그저 그 과정에서 보이는 어떤 흔적 같은 것이다. 그의 총은 요령 좋게 깊은 상처를 남기지는 않았지만, 아쿠타가와의 마음에 쐐기를 박기에는 충분한 총상이었다. 2년 만에 만난 놈이 하는 짓이라곤 자기의 흔적을 남기고 사라지는 것 뿐이었다. 츄야는 그 놈을 곱씹어 욕하면서도 그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순수하게 힘으로 붙으면 이기지 못할 상대는 아니다. 그놈이 쓰는 이능력은 상당히 불편한 것이었지만, 이능력을 내려놓고 힘으로만 승부해도 지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진 않는다. 그놈은 죽을만큼 짜증나고 미운 놈이지만, 그 놈이 사라져서 생기는 손실이 더 크기 때문이다. 츄야는, 적어도 득실을 따질 줄 아는 사람이다.

*

모든 일에 후회는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삶의 이유가 되어버린 것도, 아니, 정정하자. 여태껏 무시해왔던 올가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엄청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외면했다. 그 자리에 계속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나에게 목을 매는 것은 상관 없지만 목을 매는 쪽이 되고 싶지는 않다. 깊이 가라앉은 설탕이 식어버린 커피에 잘 섞이지 않아 앙금처럼 남아있다. 그저 그런, 딱히 내키지 않는 커피를 어쩔 수 없이 마시는 아침은 어쩐지 공허했다.

=========

어... 뭐라고 해야하지 네 그냥 모기님 회지 최고 모기님 이즈 뭔들. 예 정말 그냥 장문의 감상문을 남겨봤자 계속 똑같은 말만 반복할 걸 아니까 그냥 제가 느낀 걸 애프터라고 날조해서 멋대로 써봤습니다. 진짜 계략짜는 다자이가 너무 섹시했고요 네 제가 무슨 말을 더 할까요. 츄야가 화내는 모습조차 멋지고 아쿠는 왜이렇게 청순가련한지. 아 진짜 그냥 전 지금 너무 좋아서 헬렐레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요 존잘님 최고 사랑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거 모기님 회지 후기 맞습니다.
아, 맞아. '재가 되어버린다'는 표현 너무 좋았어요 마음에 퍽 와닿았다. 아쿠타가와가 그 잿더미 속에서 부질없는 흔적을 찾아 한참을 헤맸을 것 같거든. 잘 읽었습니다.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6. 26. 07:17

너는 바깥에.

나는 안에.

그게 우리의 [거리]라면

더이상 좁아지지 않아도 괜찮으니

눈 앞에서 사라지지 마라.

더는 나를 힘들게 하지 마라.

이 마음을 어디까지 도려내어야

너를 외면할 수 있을까.

참으로 아프다, 그러니.

눈 앞에 있거라.

다가오지 않아도 좋다.

멀어지지만 말아다오.

아파하지 마라

슬퍼하지 마라.

네 아픔과 슬픔이 밤하늘에 흘러가기를

내가 기도하마.


사랑하는 아이야.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4. 10. 14:40

특촬 뱀파이어 합작 – 가면라이더 위자드 / 코요미


*검은 장미의 소녀


그 집은 아마 작은 2층 집이었다. 소녀는 자신이 처음 그 곳에 도착했던 때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누군가에게 항상 온기를 받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누군가도 언제부턴가 볼 수 없게 되었다. 차가운 어둠 속에 소녀는 가만히 앉아있었다. 햇빛조차 닿지 않는 어두운 집 안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하루, 이틀, 얼마를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눈앞에서 빛이 사라지는 걸 보며 소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달콤한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움찔, 소녀의 코끝이 향기에 반응했다. 온 몸의 감각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눈을 떴을 땐 입가에 따뜻한 액체가 닿아있었다. 저도 모르게 혀를 내밀어 액체를 핥았다. 새로운 생명을 받은 기분이었다. 아, 아아. 어쩜 이렇게도 달콤한가. 입가에 조금씩 떨어지는 감미로운 생명수를 소녀는 갈구했다. 생명수를 받은 소녀의 눈은 그 물의 색처럼 붉었다.


“오랜만에 깨어난 기분은 어때?”

“…누구…?”

“널 깨운 사람. 아니, 사람은 아닌가?”


너의 마법사라고 해두자. 그렇게 말하며 그는 손을 거뒀다. 소녀가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시는 사이, 마법사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동시에 집의 곳곳에 은은한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빛이 들어오면서 어렴풋한 그림자는 점점 뚜렷이 눈에 들어왔다. 마법사는 제 손에 조금 남아있는 핏방울을 가볍게 핥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내 피는 맛이 없네.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이내 웃음을 띠우고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가실까요?”

“어디로…?”

“배가 고프진 않아?”


마법사의 말에 소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배가 고프진 않았다. 그저 목이 마를 뿐이었다. 달콤한 물을 또 한 번 마시고 싶어 소녀는 자신을 쓰다듬는 마법사의 손을 입에 가져갔다. 날카로운 이가 마법사의 손에 닿았다. 마법사는 소녀를 바라보다 피식 웃고는 손을 떼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닿을 듯 닿지 않은 물에 소녀는 날카롭게 울었다. 마법사는 그런 소녀를 데리고 어디론가 걸어갈 뿐이었다. 잠들기 전에는 그렇게 넓지 않았던 것 같은데. 소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마법사를 따라갔다.


“자, 다 왔다.”

“여기는…?”

“아가씨한테 주는 선물이야. 구하느라 꽤 힘들었다고?”

“…선물….”

“다시 태어난 기념 선물.”

그렇게 말하며 마법사는 문을 열었다. 문의 너머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풍겨왔다. 소녀는 거침없이 발을 옮겼다. 문의 너머에 펼쳐진 것은, 새빨간 천국이며 지옥이었다. 꼴깍, 소녀는 마른 침을 삼켰다. 마법사도 그녀의 갈증을 이해한다는 듯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소녀를 안내했다. 소녀는 천국에 발을 들여놓은 듯, 정신을 놓고 생명을 탐했다. 마법사는 그런 그녀를 팔짱을 낀 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소녀의 식사가 끝날 때 까지 움직이지 않던 그는 소녀가 조용히 고개를 들자 그녀에게 다가가 손수건으로 입을 닦아주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왜….”


왜 나를 이렇게 챙겨? 소녀는 자신을 데리고 걸어가는 마법사를 보며 물었다. 마법사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약속을 지키러 왔다고. 약속? 무슨 약속 이었더라…. 소녀는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듣고 보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같다. 눈을 감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보면 어렴풋이 기억나는 온기가 있었다. 그 온기가 이 사람의 것일까? 소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는 느낌을 안은 채 그를 따라갔다.

마법사는 달빛이 살포시 내려앉은 방으로 소녀를 인도했다. 소녀는 그가 안내하는 대로 방에 들어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소녀의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은 마법사는 오래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와 다시 함께 하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렸노라고, 그는 운을 띄웠다. 만들어진 소중한 것을 혼자 두고 늙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란 참 덧없는 것이다. 마법사는 인간의 삶을 이어나가는 것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미 인간이 아닌 것을 품고 있었지만 성질을 바꿔야 했기에 더욱 괴로웠다고 말했다. 그래서 소녀를 떠나야만 했다는 말에 소녀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역시 그때의 그 느낌은 마법사였던 걸까.


“지금은 성공한 거야?”


소녀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떠오르는 질문을 던졌다. 마법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네 앞에 있는 거야. 이제부터는 인간과는 다른 시간을 걷고 다른 길을 갈 거지만 내가 네 옆에 있으니 너는 절대 혼자가 아니야. 그 말에 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퍽 안심이 됐다. 잠들기 전부터 그 말을 기다렸던 것만 같다. 소녀는 마법사를 보며 웃었고, 마법사는 소녀를 마주보며 웃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건 꽤나 행복한 기분이었다.

소녀가 몸의 변화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건 며칠이 지나서였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유독 힘들다고 느껴졌지만, 그 날은 웬일인지 일찍 눈을 떴다. 그리고 커튼을 여는 순간 소녀의 움직임은 멈췄다. 마법사가 미리 상황을 살피러 오지 않았다면 소녀의 다른 생명은 끊겼을지도 모른다. 마법사는 급하게 소녀를 빛에서 떨어트리고 그녀의 팔을 감쌌다. 아직도 빛에 닿은 곳이 아팠다. 마법사는 커튼을 다시 치고는 소녀를 끌어안은 채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 정말 놀랐잖아.”

“…하지만…왜…?”

“말했잖아. 인간과 다른 시간을 걷고 다른 길을 갈 거라고.”

“그게 이런 거라고는 하지 않았잖아.”

“우선 치료부터 하자.”

그렇게 말한 마법사는 칼을 들어 제 손목을 그었다. 마법사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소녀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지만 그에게서 나는 달콤한 향기는 참을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솟아난 날카로운 송곳니에 놀랄 틈도 없이 그녀는 그의 손목에서 흐르는 피를 소중하게 마셨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햇빛에 닿았던 상처가 사라졌다. 소녀의 눈에서는 원인 모를 눈물이 가만히 흘렀다.


“정말로 달라졌구나, 나….”

“응,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까지도 그랬듯이 내가 앞으로도 네 옆에 있을 거니까. 약속이잖아? 코요미. 마법사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다정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코요미, 그게 내 이름? 새삼스럽게 귀에 들어온 단어에 소녀는 단어를 따라 읊으며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마법사는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내 이름은 기억해?”

“…….”


소녀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마치 잠겼던 문이 열린 것처럼 소녀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기억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 기억 속에서 소녀는 마법사를 찾았다. 어째서 잊고 있었을까, 당신의 이름을. 소녀는 마법사를 쳐다보다가 웃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루토. 마법사는 커다란 손으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날, 버려진 저택에는 검은 장미가 만개했다.

'조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상문입니다만.  (0) 2016.09.22
사랑하는 아이야  (0) 2016.06.26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0) 2015.11.02
착한 소녀는 무너져내렸다.  (0) 2015.11.02
절망하는 소년은 울고있었다.  (0) 2015.10.28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5. 11. 2. 16:37
열차전대 토큐쟈 - 히카리 팬텀화 썰


-----------------

소년은 어두운 골목을 걷고 있었다.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평소에 그렇게 겁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왠지 서늘한 느낌에 소년은 조용히 마른 침을 삼키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빛이라곤 저 너머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정도라, 소년은 하릴없이 그것을 목표삼아 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어디지….'

빛을 향해 가면서도 틈틈이 주변을 살피는 소년이었지만, 조금의 빛도 없는 곳에서 사물의 형체를 알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사물이란 게 있긴 한 건지도 모르겠다. 손을 짚은 곳에는 분명히 벽이 있는 느낌이지만 그 벽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자신은 올바른 곳을 향해 걷고 있는 건지 소년은 알 수 없었다. 시간의 흐름조차 알 수 없는 공간을 지나 빛에 다다른 소년이 본 것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이었다.

"라이토? …미오?"

소년의 목소리에 돌아본 그들은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선뜻 그 손을 잡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 갑자기 어른이 되어버린 거야? 그렇게 묻고 싶었다. 분명히 얼마 전까지는 같이 웃으면서 지냈었는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면 자기를 두고 갈 리가 없는데. 그리고 다른 애들은 어디에 있는걸까. 소년은 자기에게 내밀어진 손을 보며 머리를 굴렸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 때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궁금하지? 왜 이렇게 변했는지.]
"누구야!?"
[나? 너를 절망으로 인도할 사람이지. 아, 사람은 아닌가?]

소년이 돌아본 곳에는 인간도 아닌, 그렇다고 섀도우 괴인의 모습도 아닌 존재가 서 있었다. 그 존재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뒷걸음질 치는 소년을 잡은 것은 그의 친구들이었다. 소년은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성인 둘의 힘을 아이가 이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팔을 이리저리 틀어보는 소년의 앞에 괴인이 다가왔다.

[친구들을 잘 봐.]
"…뭐?"
[네게는 보일텐데.]
"…!!"

그제서야 소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친구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깊은 어둠이었다. 섀도우라인이 만들던 것과는 닮으면서도 다른 어둠. 소년은 긴장한 채 머릿속으로 상황을 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틈을 괴인은 놓치지 않았다.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를 내며 소년에게 바짝 다가온 괴인은 손가락으로 소년의 이마를 꾹 누른 채 말했다.

[네가 상상하는 일들은 전혀 일어나지 않아.]
"…그건 해보지 않고 모르는 거잖아!"
[아니, 알 수 있거든.]
"어떻게 장담하는데?"

그야, 네 친구들은 이미 죽었으니까. 한 번 어둠에 빠지면 돌아올 수 없어. 괴인의 말에 답이라도 하듯 라이토와 미오의 모습이 스르륵 바뀌었다. 더 이상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는 그들의 모습에 소년은 무릎을 꿇었다. 머릿속에 있던 모든 가능성이 사라져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조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하는 아이야  (0) 2016.06.26
특촬 뱀파이어 합작 *검은 장미의 소녀  (0) 2016.04.10
착한 소녀는 무너져내렸다.  (0) 2015.11.02
절망하는 소년은 울고있었다.  (0) 2015.10.28
[쿠로스가] 이름  (0) 2015.09.01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5. 11. 2. 01:36

열차전대 토큐쟈 - 미오 팬텀화 썰

 

 

--------------------------------------------

 

마을이 불타고 있었다. 어떻게 되찾은 마을인데. 눈 앞에 불타고 있는 마을을 보던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비명소리가 세상을 가득 채웠다. 용서할 수 없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소녀는 열차를 들었다. 토큐 체인지! 짧은 외침과 함께 변신기를 움직였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토큐 체인지! 토큐 체인지!"

 

당황한 소녀는 몇 번이고 변신을 거듭 시도했지만 여전히 바뀌는 것은 없었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거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녀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림자를 눈치챈 소녀는 도망가려고 했지만, 어린아이의 몸으로는 멀리 가지 못한 채 잡혔다. 서서히 드러난 그림자의 모습은 소녀가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라이토!? 어째서?"

"...."

"라이토, 나야, 미오야! 라이토?"

 

그러나 라이토는 대답없이 그녀의 목을 서서히 졸랐다. 숨이 막혀왔다. 라이토에게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리던 소녀의 몸에서도 힘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라이토, 대체 왜. 이젠 나도 못 알아보는 거야? 그런 그녀의 뒤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도 그만 절망해라.]

 

절망? 절망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작스러운 말에 뒤를 돌아본 소녀는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너무나도 무서운 괴인의 모습에 당황한 그녀는 있는 힘을 내서 라이토의 손을 깨물었다. 그 통증에 손 힘이 빠진 틈을 타 도망친 그녀는 다시 한 번 변신을 시도했다. 토큐 체인지! 힘찬 구호와 함께 열차를 밀어넣고 변신기를 작동해보았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어째서, 변신할 수 없게 된 거야?"

[그건 말이지.]

"...!? 어느 틈에?"

 

놀란 소녀를 무시한 채 괴인은 자기가 할 말을 계속 했다.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기만 하는 착한 아이여서야,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었겠지. 감각은 남아있어도 상상력은 현실에 부딪치면 무뎌지는 법이거든. 지금까지는 보였던 게 보이지 않게 되는 거야. 어른이 된다는 건 대개 그런 거거든. 네 소중한 추억마저, 언젠가 넌 잊어버리게 되겠지.

 

달칵,

소녀의 손에서 열차가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노란 열차는 바닥에 굴러 깨지는 소녀의 마음처럼 상처를 입었지만, 소녀의 눈에 보인 것은 어둠에 싸인 친구와 그 친구의 어둠을 걷어줄 수도 없는 힘없는 자신이었다. 왜 나는 이다지도 무력한걸까...? 그렇게 무릎꿇는 소녀를 괴인은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조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특촬 뱀파이어 합작 *검은 장미의 소녀  (0) 2016.04.10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0) 2015.11.02
절망하는 소년은 울고있었다.  (0) 2015.10.28
[쿠로스가] 이름  (0) 2015.09.01
[오이스가] 만남  (0) 2015.08.13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5. 10. 28. 15:32
열차전대 토큐쟈 ㅡ 라이토 팬텀화 썰.
사망네타, 흑화네타 있습니다.

-------------

"라이토…! 도망쳐! 얼른!"
"미오!!!"
"너만…이라도…ㅅ."

안 돼, 내가 어떻게 너희를 두고 가? 그렇게 말하는 소년의 눈에 들어온 건 힘없이 쓰러져가는 친구들이었다. 처음 보는 괴인이었다. 토큐쟈로 변신해서 싸웠지만 공격이 전혀 듣지 않았다. 모든 공격을 튕겨낸 괴인은 라이토의 목을 조른 채 이죽거렸다.

[빨리 절망해라, 게이트. 난 질질 끄는 게 싫거든. 그러니까 소중한 걸 알려줄래?]

그렇게 말하던 괴인은 곧 귀찮아졌다면서 뭐라도 부수면 되겠지, 라고 중얼거리면서 라이토의 체인저를 잡아뜯어 땅에 던지곤 발로 밟아 부쉈다. 변신이 풀린 라이토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본 괴인은 즐겁게 웃더니 '공포에 질려 절망해라. 그대로 죽어도 뭐 크게 상관은 없지만.'이라며 라이토에게 손을 뻗었다. 가장 먼저 그걸 막은 건 히카리였다. 히카리의 공격에 라이토를 놓친 괴인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둘렀고, 히카리는 그 공격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귀찮게. 너부터 죽여주마.]
"안돼!!"

라이토가 괴인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달려들었지만 그는 가볍게 라이토를 쳐내며 어깨를 으쓱이곤 히카리에게 걸음을 옮겼다. 강한 충격에 일어날 수 없는 그를 짓밟은 괴인은 그대로 손을 움직여 그의 몸을 찔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히카리가.

..사라졌다.

라이토는 울었다. 넌 이런데서 쓰러질 애가 아니잖아. 일어나, 제발!!!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지만 히카리에게 라이토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툭.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괴인은 라이토의 표정을 보더니 라이토는 내버려 둔 채로 하나씩, 하나씩 동료들을 잡았다. 토캇치가, 카구라가 쓰러졌다.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라이토를 미오가 억지로 일으켰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무거울 텐데도 이를 악물고 그를 옮기던 미오는 오래 지나지 않아 괴인에게 잡혔다. 마지막 힘을 짜내 라이토를 집어던지다시피 밀어낸 미오도, 결국은 쓰러졌다.

"미오!!!!!"

누구도, 누구에게도 목소리가 닿지 않게 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눈을 감은 채 온갖 상상을 해보았지만 친구들의 웃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뭐가 이매지네이션이야. 소중한 친구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소년은 절망했다.
괴인은 웃었다.

부서져버린 소년은 더이상 울지 않았다.

'조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0) 2015.11.02
착한 소녀는 무너져내렸다.  (0) 2015.11.02
[쿠로스가] 이름  (0) 2015.09.01
[오이스가] 만남  (0) 2015.08.13
[다이스가] 약속  (0) 2015.06.07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5. 9. 1. 20:45
"저...문신을 지우고 싶은데요."

조금 애처로운 표정의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문신을 지우다니, 대단한 용기네요. 그 말에 그는 힘없이 웃었다. 문신을 지우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는 지워보지 않으면 몰랐다. 살을 뚫고 새긴 자국을 지우는 것인데 오죽할까. 헤나같이 시간이 흐르면 지워지는 것도 아닐텐데.

"어디, 일단 어떤 건지 봅시다."

그 말에 그는 말없이 윗옷을 벗었다. 척추를 따라 시선을 내리자 허리께에 도드라진 무언가가 보였다. 문신, 이라기엔…이건.

"저, 손님. 이건 지울 수 없는데요."

본인도 잘 알 텐데. 이게 지워지지도 않을 뿐더러 단순히 지운다고 끝나는 성질의 것이 아니란 것 정도는. 손님의 사정따위는 사실 눈곱만치도 신경쓰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쯤되면 그 내막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운명의 상대의 이름인데도 지우고 싶을 정도로 지독한 기억이 있는걸까?

"알아요. 지워지지 않는 것 정도는…. 그럼, 그러면요. 다른 걸로 덮을 순 없을까요?"
"…잘 될지 장담은 못하는데요."
"괜찮아요. 어떻게든 별로 보고싶지 않으니까."

그는 여린 외모를 하고서도 독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평소엔 화도 잘 안 내던 사람일 것 같은데. 이런 타입이 오히려 독하게 마음 먹으면 더하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적당한 문신을 골라보려고 사진들을 뒤적이는데,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저, 손님."
"네?"
"덮기만 하면 아무거나 상관 없나요?"
"…네."
"그럼 제 이름은 어때요?"
"…네?"
"전 누구의 이름도 갖고 있지 않거든요. 누구한테도 이름이 없고."

반쯤은 농담이었지만, 사실 나도 누군가에게 운명의 상대이고 싶었다. 어차피 정해진 운명을 거부할 거라면 내 이름으로 덮어쓴대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욕심도 조금은 있었다. 꽤 당황한 기색을 보이던 그는 한참을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결심한 듯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당신의 이름을 새겨주세요."

조금, 심장이 잘못된 방향으로 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착한 소녀는 무너져내렸다.  (0) 2015.11.02
절망하는 소년은 울고있었다.  (0) 2015.10.28
[오이스가] 만남  (0) 2015.08.13
[다이스가] 약속  (0) 2015.06.07
[오이스가] 산책  (0) 2015.05.24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5. 8. 13. 12:46
"여긴 어디야, 할아버지?"

아직 어린 소년이 제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커다란 집의 가장 안쪽에 있는 사당이었다. 제법 낡은 태가 나지만 먼지는 없는 것이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삐걱, 소년이 마루에 발을 딛자 나무가 기우는 소리가 났다. 소년의 할아버지는 그 소리에 소년에게 꿀밤을 먹이고는 그를 마루에서 끌어내렸다. 소년은 할아버지의 매서운 손맛에 쥐어박힌 곳을 문지르며 입술을 비죽이 내밀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소년을 보다 한숨을 내쉬고는 제단에 달린 줄을 두 번 잡아당겼다. 경쾌한 소리가 안마당에 울렸다. 옆에서 그걸 본 소년은 당연하게 박수를 두 번 치고 그대로 고개를 숙여 목례를 했다. 잠시 뒤, 경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하하, 참배는 하지 않아도 괜찮단다."

낯선 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소년은 한참 말이 없었다. 동그랗게 뜬 소년의 눈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 있었다. 집안 사람들과도 사뭇 외모가 달라 본 적 없는 친척이라기에도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회색머리카락은 허리까지 길게 늘어져있었고, 차(茶)색이 감도는 눈가에는 눈물점이 찍혀있었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소년을 보고 있었다.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기분에 멍하니 그를 보던 소년이 정신을 차린 건 강제로 저를 인사시킨 할아버지 덕분이었다. 할아버지는 소년을 우악스럽게 내리눌러 인사시키며 넙죽 그에게 인사를 했다.

"오이카와 가문의 수호신께 인사드립니다."
"그렇게 거추장스런 인사는 필요없대도."
"하지만 오랫동안 이 집안을 지켜준 분께 예의를 지켜야하지 않습니까."
"넌 어릴 때부터 꽉 막혔구나."

소년의 눈 앞에 서있는 그는 손을 내저으며 할아버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자신을 내리누르던 손에서 살짝 빠져나온 소년은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던 신이라는 존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무리 잘 봐줘도 스무살도 안 되어 보이는데, 할아버지가 극존대를 하는 걸 보니 오래 살긴 했나보다 싶었다. 소년의 시선을 느낀 건지, 그가 고개를 돌려 소년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환히 웃는데, 속이 조금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소년은 그를 물끄러미 마주보다 입을 뗐다.

"형아가 신이야?"
"욘석이!"

따콩. 머리가 화끈거릴 정도로 세게 꿀밤을 맞은 소년은 눈물을 글썽이며 다시 입술을 비죽이 내밀었다. 할아버지는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고, 신은 괜찮다고 너무 나무라지 말라며 다가와 소년이 맞은 곳을 가만히 쓰다듬어주었다. 그 손길은, 어머니와도 닮아있었다. 소년이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신은 쪼그리고 앉아 시선을 마주하고는 웃었다.

"이름이 뭐니?"
"..토오루. 오이카와 토오루."
"좋은 이름이구나."

좋은 이름, 그 울림이 기분 좋아 토오루는 배시시 웃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둘을 보다 헛기침을 해서 주위를 환기시키고는 신을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이제 곧 토오루가 일곱 살이 되니 그를 지켜달라고, 그렇게 말하며 할아버지는 신 앞에 엎드려 절했다.

"집안의 유일한 남자아이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일곱 살이라."

신은 가만히 토오루를 쳐다보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대화의 의미를 모르는 토오루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신은 토오루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웃었다.

'조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절망하는 소년은 울고있었다.  (0) 2015.10.28
[쿠로스가] 이름  (0) 2015.09.01
[다이스가] 약속  (0) 2015.06.07
[오이스가] 산책  (0) 2015.05.24
프롤로그.  (0) 2015.05.12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5. 6. 7. 21:30

스가른 전력 60분 주제 [약속]

 

[다이스가] 약속

 

------------------------------------

 

[자, 이번엔 어떤 움직임을 보여줄까요, 스가와라 선수!]

[체구가 다른 선수들에 비해 작은 만큼 항상 날렵하죠?]

[그렇죠. 아, 말씀드리는 순간!! 하이킥이 작렬합니다!!]

[이야, 안다리로 자세를 무너뜨리고 바로 하이킥! 소름돋네요!]

[이번 시즌 챔피언도 스가와라 선수입니다!]

 

와아아- 경기장이 함성으로 가득찼다. 시끄럽게 들려오는 함성소리를 들으며 다이치는 리모콘을 들어 티비를 껐다. 시끄러웠던 함성이 거짓말인 것 처럼 조용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이 울렸다. 징, 지잉. 발신인은 언제나 그렇듯 스가와라 코우시였다. 다이치는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다이치?"

"응."

"…뭐야, 왜 입이 댓발 나와있어."

"안 나와있거든?!"

 

거짓말. 뻔히 다 보이거든요. 그렇게 말한 스가와라는 키득키득 웃었다. 마치 제 얼굴을 보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스가와라가 선수로 데뷔하고, 몇 번인가 좌절하고서 얻어낸 챔피언의 자리를 용케 버티고 있었다. 대학에 올라가면서 배구를 그만 둔 스가와라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종목을 전향했다. 듣자하니 배구를 그만두고 몸이 찌뿌드드해서 하기 시작한 것이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나? 처음엔 스파링은 무리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대던 그도 어느샌가 아마추어 대회엘 나가더니, 프로 제의를 받았단다. 당연히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말렸다. 아마추어 대회에서조차 그는 가끔 부상을 입었는데, 프로로 가면 그게 얼마나 자주 일어날 지는 안 봐도 뻔했다.

 

"…스가."

"응?"

"챔피언 자리 지키느라 고생했어."

"아하하, 다이치가 그렇게 말해주니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인데?"

[스가와라씨, 이거.] [아, 땡큐]

"뭐야, 뭐 받았어?"

"아, 얼음주머니."

 

그러고보니 아까 경기에서 훅을 제대로 맞았었지. 꽤 묵직한 느낌이었다. 아마 경기장에 있었으면 당장 소리를 지르며 난입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건 스가와라의 실격으로 이어지기에 어떻게든 참았을 것 같지만, 그래도 티비를 통해 보는 것과 직접 보는 건 느낌이 달랐을 것이다. 사실, 리모콘을 집어던지긴 했지만 말이다. 배구와는 미묘하게 시간대나 시즌이 어긋난 덕분에 다이치는 스가와라의 응원을 실시간으로 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항상 간이 철렁철렁 떨어지는 걸 스가와라는 알고 있을지.

 

"맞은 덴 어때?"

"응? 아, 갱차나. 안이 조금 부었지만 자주 이떤 일이고."

"…스가."

"응?"

"마지막 하이킥, 멋졌어."

"…고마워."

"언제 돌아와?"

"음, 이틀 뒤 비행기로 돌아갈거야."

"파티, 준비해둘게."

 

정해진 수순이었다. 스가와라가 챔피언을 따낸 다음부터 줄곧 그랬다. 배구부 OB들이 전부 모여서 실컷 고기와 술을 늘어놓고 축하하면서 꼬박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 그런 약속이었다. 다이치의 말에 스가와라는 웃으면서 응, 이번에도 기대할게. 라고 답했다. 다이치는 스가와라의 대답 뒤에도 한참을 말이 없었다. 스가와라가 전화가 끊기지 않았는지 확인할 요량으로 '다이치?'라고 되묻자 그제서야 그는 무겁게 입을 뗐다.

 

"선수 생활은 언제까지 할 거야?"

"…아마 곧 못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그건 아닌데…음, 확실히 근육을 붙여도 전만큼 힘이 안나오고, 요즘 젊은 선수들은 워낙 강하고 변칙적이어서."

[아, 스가와라씨 또 약한 소리 한다. 챔피언이!][하여튼 링에서 내려오기만 하면 저렇다니까.]

[아하하, 이 정도는 봐주세요. 엄살 부려도 되잖아~.]

 

물론 정말 엄살이기만 한 건 아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다이치는 네가 아프지 않다면 됐어, 일본에서 보자. 라고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스가와라는 응, 며칠 뒤에 봐. 라고 대답하곤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조금 뒤, 스가와라에게서 사진과 함께 라인이 도착했다. 챔피언의 증표를 들고 찍은 사진 밑에는 그의 각오가 적혀있었다.

 

[은퇴는 일본에서 열리는 세계 챔피언 십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나서 할거야.]

[다이치가 지켜봐주는 곳에서, 최고로 멋지게 승리할게. 약속]

[그리고 그 영광은 모두 너에게 줄테니까.]

[항상 아끼고 걱정해줘서 고마워, 다이치.]

 

연이어서 온 라인의 말들에 다이치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격투기를 하더니 생각이 단순해졌다고 할까, 와일드해졌다고 할까. 지금 스가와라의 사고방식은 어느 정도 초반의 카게야마와 닮아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다이치는 그렇게 생각하며 비어버린 안주 접시와 구겨진 맥주 캔을 치웠다.

'조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쿠로스가] 이름  (0) 2015.09.01
[오이스가] 만남  (0) 2015.08.13
[오이스가] 산책  (0) 2015.05.24
프롤로그.  (0) 2015.05.12
Propose  (0) 2015.05.11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5. 5. 24. 21:55

스가른 전력 60분

[오이스가]

 

주제 : 산책

 

-------------------------------

 

오이카와 토오루의 산책 코스는 언제나 똑같다. 오후에 거리로 나서 가까운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잠시 마른 목을 축이며 뜨거운 햇살을 피해 그늘에서 쉬었다가 공원 입구의 꽃집에서 꽃을 한 다발 사갖고 들어간다. 마치 프로그램이라도 입력된 듯, 오이카와는 언제나 같은 시간에 같은 행동을 했다. 아주 드물게 공원이 아니라 조금 멀리 있는 바다에 다녀올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는 깨끗한 모래와 작은 조개껍질들을 병에 한가득 담아왔다. 바닷물도 같이. 그리고 매일 저녁 그는 언덕 위에 세워진 병원으로 향했다.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그 곳에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오늘은 어떤가요?"

 

병원을 들어서면서 오이카와는 조금 부푼 마음을 안고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아직'이라는 말 뿐이었다. 아직, 아직. 얼마나 됐는지 세는 것도 지겨워 이제는 셈을 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언젠가, 그래 언젠가 돌아오겠지. 그런 생각이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도 전향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가 깨어나는 순간을 회사 일에 매여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아직 싱싱한 꽃다발을 들고 병실로 향했다.

 

[613호/스가와라 코우시님]

 

그의 이름이 붙어있는 병실은 공교롭게도 그의 생일과 같았다. 오이카와는 이것이 매우 불쾌했다. 왜 하필 숫자가 겹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병실에 노크를 했다. 들어갈게, 코우시. 여전히 돌아오는 답이 없는 말을 하며 오이카와는 방문을 열었다. 생명유지장치가 달린 제 연인이 그 자리에 누워있었다. 눈은 뜨지 못한 채로. 교통사고였다고 한다. 빗길에 미끄러져 인도로 돌진하는 차에 치였다. 즉사하지 않은게 다행일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다. 어떻게 수술은 끝났지만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전부 현실이었다. 그래도 그는 언젠가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오이카와는 간이의자에 걸터앉아 링거가 꽂혀있는 스가와라의 손을 잡았다.

 

"거기 있지? 언제쯤 돌아올거야? 있잖아, 스가와라. 오늘도 그 공원에 갔었어. 다른 곳에 들리고 싶긴 했지만 역시 너한테 오는 시간을 일분도 지체하기가 싫더라. 전에 사둔 꽃이 시들어가길래 오늘은 새로운 걸 사왔어. 매일 사오고 있지만 말야, 그래도 역시 너한텐 가장 예쁜 꽃이 활짝 핀 순간을 보여주고 싶거든. 올 여름에는 천문대도 갈거야. 카메라를 새로 한 대 장만했거든."

 

그 다음 말은 차마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밝은 목소리로 말하던 오이카와는 조용히 고개를 들고는 눈을 서너 번 깜박였다. 나 혼자 그 곳에 보낼거야? 정말로? 네가 나보다 더 보고싶어했는데. 조리개를 열어서 카메라가 하늘을 잔뜩 담게 두고, 나랑 너는 그 별들을 보다가 텐트 안에서 쪽잠을 자겠지. 아주 편한 건 아니겠지만 둘이 있으니까 분명히 즐거울텐데. 그 하늘의 별만큼 너를 사랑한다고도 말하고 싶은데. 나한테서 기회를 앗아가지 말아줘. 이 모든 말들을 삼킨 채 그는 눈물 젖은 목소리로 웃음을 지었다.

 

"아, 내 정신 좀 봐. 슬픈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는데. 아무튼 있지, 그러다 토비오를 만났어. 네 얘기를 묻더라고. 그래서 난 그냥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대답해줬어. 그 곳은 즐거워? 거기가 저세상이 아니라는 건 알아, 요즘은 동화책을 읽어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 그러면 네가 있는 세상이 좀 더 아름답지 않을까? 사후세계라던가, 다른 세계를 믿는 건 아니었지만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어. 넌 그저 잠깐 여행을 떠난 거라는 생각 말야."

 

그렇게 말한 오이카와는 잠깐 말을 멈추고 스가와라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어제였나, 사실은 어제가 일년 째였던 것 같다. 의사가 냉정한 목소리로-사실 그도 엄청 고민을 했겠지만- 말했다. 더는 소용이 없으니 몇 달만 더 지켜보다 그래도 깨어나지 않으면 유지장치를 떼자고. 이미 스가와라씨는 뇌사상태니까 가능성이 낮은 일에 너무 매달릴 수만은 없는 일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마음이 괴롭지만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제 손으로 어떻게 연인의 죽음을 감히 정하겠는가. 그저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빨리, 하루 빨리 돌아와달라고. 그래서 오늘은 조금 용기를 내어 말해보기로 했다.

 

"스가와라. 스가. 코우시. 오늘은 말야, 이제 그만 거기서 돌아와주면 안될까? 네가 없는 건 너무 힘들고. 외로워. 나 많이 기다린 것 같은데. 네가 여행을 간지도 일 년이 됐대. 돌아와서 이 기계 말고 나한테 키스해주면 좋겠어. 너를 더 멀리 보내는 거 나 자신 없어. 오이카와씨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정말 돌아와주지 않을거야?"

 

북받치는 감정에 오이카와의 목소리에는 다시 물기가 서렸고, 눈가가 빨개졌다. 눈물이 주체가 되지 않았는지 볼을 타고 흘렀다. 엄지로 눈가를 꾹 눌러 눈물을 닦아내서 옷에 대충 손을 닦아버리고 그는 스가와라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손이 따뜻했다. 마음 같아서는 옆에서 함께 잠들어 있고 싶었지만, 병원의 규칙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이카와는 아쉬운 목소리로 그의 손을 한참을 잡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내일, 또 올게."

 

그러니까 오늘은 안녕. 오이카와는 작은 목소리로 제 연인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아쉬운 손을 떼지 못한 채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나갔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안녕, 이라고 말하고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스가와라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이카와는 움직임을 멈추고 자기가 잘못 본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그의 손가락을 강하게 잡았다. 오이카와의 눈에선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떨리는 손으로 너스콜을 부른 오이카와는 그대로 스가와라의 옆에 다시 앉았다. 손가락은 여전히 놓지 않은 채였다.

'조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이스가] 만남  (0) 2015.08.13
[다이스가] 약속  (0) 2015.06.07
프롤로그.  (0) 2015.05.12
Propose  (0) 2015.05.11
노라가미 au 오이스가??  (0) 2015.04.24
Posted by 스위스무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