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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6.04 별 헤는 밤. 10. (完)
  2. 2016.06.03 별 헤는 밤. 09.
  3. 2016.06.01 별 헤는 밤. 08.
  4. 2016.05.31 별 헤는 밤. 07.
  5. 2016.05.29 별 헤는 밤. 06.
  6. 2016.05.29 별 헤는 밤. 05.
  7. 2016.05.28 별 헤는 밤. 04.
  8. 2016.05.28 별 헤는 밤. 03.
  9. 2016.05.28 별 헤는 밤. 02.
  10. 2016.05.27 별 헤는 밤. 01.
2016. 6. 4. 01:21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5TWU6


[BGM - Idolm@ster / Hareiro : Miura Azusa]


별 헤는 밤. 10.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윤동주, <별 헤는 밤> 中-


=======================================================


"벌써 일 년 정도 됐구나. 이제는 꿈에도 네가 나오질 않아. 그렇다고 해서 널 잊은 건 아니니까…."


눈을 뜨고 가만히 무덤을 바라보던 아츠시는 멋쩍은 웃음을 짓고 작은 꽃을 가만히 무덤에 올려두었다. 어쩐지 마리아의 머리카락 색을 닮아서 자기도 모르게 사버린 몇 송이의 라일락을 놓고 일어나자 시선이 느껴졌다. 여태껏 상념에 젖어있어서 몰랐던 모양이다. 줄곧 아츠시를 쳐다보고 있었던 건지, 그 사람은 아츠시가 쭈볏거리며 일어나자 옆으로 다가와 그 작은 무덤에 하얀 꽃을 놓았다. 그리고는 그 앞에서 가만히 합장을 하고 한참을 말없이 무덤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모른척하고 그 자리를 뜨기가 뻘쭘해져 아츠시는 저도 모르게 그 옆에 서 있었다.


"…고마워요."

"네?"


따로 듣는 사람은 없었으니 역시 나에게 얘기 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무슨 뜻일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츠시는 곧 어렴풋이나마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시선을 마주친 그 사람은 쿠니키다씨가 보여줬던 조금은 성장한 것 같은 마리아와 매우 닮은 얼굴에 그녀보다는 짧고 차분한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츠시를 보며 상냥하게 웃었다. 새삼스럽게 심장이 뛰었다. 잠시 시계를 바라보던 그녀는 빙긋이 웃고는 아츠시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나카지마 아츠시 씨?"

"네, 네?"

"잠깐 시간 좀 내줄래요?"

"네? 하지만, 곧 돌아가봐야…하는데요."

"괜찮으니까."


그녀는 아츠시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자리를 옮겼다. 얼떨결에 끌려가면서도 아츠시는 이거 정말로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만 한가득이었다. 안 그래도 아침부터 일처리를 제대로 못해서 혼났는데, 이대로 가면 농땡이를 피우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럼에도 용기있게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못한 아츠시가 도달한 곳은 요코하마가 한 눈에 보이는 전망대의 식당이었다. 그러고보니 점심때가 훌쩍 지나있었지. 새삼스럽게 흘러간 시간을 깨닫자 배가 민망할 정도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볍게 웃고는 뭐든 좋으니 먹고 싶은 걸 시키라고 했다. 아츠시가 머뭇거리자 그녀는 사양하지 말라고 하며 자신도 메뉴판을 보기 시작했다.


"코스는 조금 부담스러우려나. 단품도 괜찮으니까 시켜요, 아츠시 씨."

"저, 저, 그, 그게요…. 죄송하지만 오늘 처음 본 분한테…. 그, 마음대로 시키라고 하셔도 말이죠…."

"아, 내 정신 좀 봐. 아직 소개를 안했죠?"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가볍게 손뼉을 친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웃음을 머금은 채 자기소개를 했다. 그녀의 이름은 루스 릴케. 그리고 굉장히 놀랍게도 마리아의 딸이었다. 아츠시는 딸이라는 말에 놀라서 기함을 토하고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따져보면 굉장히 많은 부분이 닮았지만, 설마 딸이 있었을 줄이야? 아츠시의 기억 속에 있는 마리아는 작은 소녀, 그리고 사진에서만 보던 20대 초반의 여성이었기에 그는 한동안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정말로 감사하는 의미에서 내는 거니까, 걱정 말고 시키세요."

"…그,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사양않고…."

"네, 얼마든지요."


수 분의 고민 끝에 주문을 하고서야 아츠시는 가만히 앞에 따라진 잔에 놓인 물을 마셨다. 사실 아직도 조금 진정되지 않는다. 딸이라니, 딸이라니? 심지어 그 딸이 자기보다 나이가 있어보였다. 그러면 마리아는 도대체 몇 살이란 말인가? 그리고 자기는 그렇다면 마리아에게 어떤 실례를 한 걸까,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갔다. 아츠시의 표정을 보던 루스는 작게 웃고는 손을 내저었다.


"어머니는 그런 걸 신경쓰실 분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마세요."

"…에, 어, 어떻게 그걸?"

"…아츠시씨, 지금 생각하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나있거든요."


그 정도로 동요했단 말인가. 혼자 속으로 중얼거린 아츠시는 다시 심호흡을 하고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찬 물이 목을 넘어 내려가자 조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사이에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고, 루스는 천천히 먹으면서 얘기를 하자며 그에게 음식을 들기를 권했다. 아츠시는 멋쩍게 웃으며 숟가락으로 음식을 떠서 입에 넣었다. 따뜻한 밥알이 입안에 퍼지는 게 기분 좋았다. 어쩐지 저도 모르게 표정이 풀어져 한참을 우물거리는데, 그 모습을 보던 루스가 멈췄던 얘기를 시작했다.


"마지막에 아츠시씨를 만나서 행복했겠네요."

"…마리아, 아니 어머니께서 말인가요?"

"그냥 마리아라고 해도 괜찮아요."

"…네에."


가만히 접시를 내려다보던 루스는 조금 오래된 이야기를 꺼냈다. 마리아는 그녀가 철이 들 무렵 조부모님에게 그녀를 맡기고 훌쩍 사라졌다고 했다.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고, 루스는 혼자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지내는 날이 많았다고 했다. 조부모님으로도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너무 커서 한때는 그녀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녀의 이능력을 알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녀의 이능력, 그리고 그 패널티를 듣고서야 루스는 자신에게서 숨어버린 바보같은 어머니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고 했다. 그 끝에 접한 것은 동쪽 끝에 있는 이 나라의 항구도시, 요코하마에서 어둠의 세력들의 항쟁에 말려들어 죽은 불운한 소녀의 소식이었다.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모습을 감춘 날은 아버지의 장례식이 일주일 지났을 때였죠."

"…어, 하지만 마리아의 이능력은…."

"그래요.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죠. 하지만 그것도 제한이 있어요."

"설마…."

"아츠시 씨가 생각하는 설마예요."


루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마리아의 이능력은 한 사람을 여러 번 살릴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이미 한번 살렸던 자신의 연인이 죽자 실의에 빠져 점점 소중한 것들을 멀리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렇게 사람도 적은 시골 동네에서 가끔 찾아 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받은 돈을 양육비로 부쳤다고 했다. 그런 돈으로 키워진 기분은 썩 유쾌하진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의 목숨이 빚으로 다가오는 기분이었단다. 거기까지 말하던 루스는 말을 멈추고 머리를 긁적였다.


"아아, 이런 얘기를 하려고 온 게 아닌데."

"…그러면…."

"말했잖아요? 감사의 인사라고."

"…네에."

"어머니의 마지막 연락처를 쫓아오니 다자이라는 분이 전화를 받으시더군요. 그래서 물어봤더니 그 때의 일을 전부 말해줬습니다."

"…다자이씨가…."

"네. 그래서 당신에게 감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그런…. 저는 지키지 못했는 걸요."

"자책하지 말아요."


분함에 주먹을 꼭 쥔 아츠시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쳐 부드럽게 쓸며 루스는 웃었다. 아츠시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표정을 본 루스는 가만히 다른 손을 들어 그의 볼을 토닥였다. 최고의 은인이 이런 표정을 하고 있으면 아마 천국에서도 한심하게 쳐다보느라 편히 쉬지도 못할 거라는 말을 듣고서야 아츠시는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자신이 최고의 은인이라니, 대체 무슨 영문인지 그는 알 길이 없었다. 루스는 아츠시의 손에 겹쳐둔 손을 들어 가만히 그의 볼을 주욱 늘렸다 놓았다. 기습적인 행동에 그가 당황하며 빨개진 볼을 감싸자 그녀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애인을 구하지 못한 슬픔에서 구해줬잖아요, 당신이."

"……."

"어머니는 다자이씨에게 남긴 메시지에서 '살고싶어졌다'고 했습니다."

"…아."

"그 생각을 하게 만든 건, 아츠시 씨, 당신이에요."

"…제가…."

"그러니까, 이제 그만 울어도 괜찮아요. 정말로 고마워요."


어쩐지 퍽 와닿은 루스의 말에 아츠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루스가 괜히 핀잔을 주자 급히 닦아내긴 했지만 어쩐지 눈물은 금방 멈추지 않았다. 내내 삐걱거리던 시간이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내일부터는 조금 후련한 기분으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울고 웃으며 하는 조금 떠들썩한 식사를 하는 그 너머엔 맑게 갠 요코하마의 하늘이 도시를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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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6. 3. 01:31

별 헤는 밤. 09.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윤동주, <별 헤는 밤> 中-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세간은 마리아의 사망소식으로 떠들썩했다. 뉴스에서는 마리아를 어둠의 세력 간의 항쟁에 말려든 불운한 소녀로 포장을 했다. 누군가가 손을 썼는지 탐정사에까지 인터뷰가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죽인 암살자를 검거한 것이 민간 탐정사라는 것 정도는 이미 기사에 나갔다. 그 며칠 사이에 마리아를 죽인 암살자는 감옥 안에서 자살을 했다고 했다. 결국 그들은 누가 마리아를 죽이도록 사주했는지도 알아내지 못했다. 아츠시는 비통한 마음으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래도 좋은 마음으로 보내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일찍 나왔네."

"…다자이씨."

"잠은 좀 잤어? 눈 밑이 어둡네."

"…잘은…."


아츠시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마리아가 쓰러지는 모습이 계속 눈 앞에 다시 펼쳐져서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면 어느새 눈을 아주 안 붙인 건 아닌 상태가 되어있었다. 입맛도 없어져 한동안 음식은 가까이 하지도 못했다. 이대로 가다간 쓰러진다고 들었지만 딱히 뭔가를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자이는 그런 아츠시를 보다가 가만히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츠시는 그저 땅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멀쩡한 모습으로 보내줘야지."

"…알고 있어요."

"그럼 조금이라도 웃어보지 그래?"


그렇게 말하며 다자이는 손가락으로 아츠시의 입꼬리를 가만히 올렸다. 그제야 아츠시는 조금 힘을 내어 배시시 웃었다. 조금 보기 나아진 얼굴을 가만히 보던 다자이는 어깨를 토닥여주고 함께 걸었다. 다자이의 옆에서 가만히 걸으면서 아츠시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 까지 조금씩 움직이는 자기의 발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시내의 한 화장터였다. 애초에 연고가 없는 사람이었던데다 시체를 본국으로 돌려보낼 이유는 없었기에 시에서는 그녀의 시체를 화장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나마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명분으로 그녀의 유해를 받아가게 된 것이 그들이었다.


그녀가 잠든 커다란 상자는 뜨거운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다자이는 내심 아츠시의 상태가 걱정되어 그를 흘끗 쳐다보았지만 아츠시는 의외로 평온한 표정으로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전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나마 마음은 좀 가라앉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한참이 지나고 그녀는 조그만 단지에 담겨 나왔다. 참, 덧없는 인생이구나. 다자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츠시를 가만히 보았다. 아츠시는 단지를 끌어안고 만지작거리다가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하겠다는 말은 않고 움직이는 그를 다자이는 그저 뒤에서 가만히 따라갈 뿐이었다.


가장 먼저 항구에 도착한 아츠시는 단지에서 뼛가루를 한 움큼 집었다. 생각보다 부드럽게 손에 감기는 것이 기분이 참 묘했다. 못다한 작별인사라도 하듯 한참을 손에 쥐고 있던 아츠시는 그대로 손을 들어 바닷가에 그녀의 가루를 뿌렸다. 때마침 불어온 강한 바람에 그 가루들은 멀리 날아가버렸다. 남은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츠시는 그제야 털썩 주저앉아 한 마디를 꺼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어요."

"뭘 말야?"

"남은 재요. 방에 두고 싶지만…."

"그건 안 되네. 죽은 자는 미련없이 보내줘야 편하게 떠날 수 있거든."

"…역시 그렇겠죠? 하지만 화장터에 자리를 마련할 돈은 없는걸요."


이제 고작 18살인 소년에게 돈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탐정사에서 나오는 월급도 그렇게 넉넉하진 않았고, 생활비를 감안한다고 하면 그 혼자 자리를 마련할 수는 없었다. 제법 현실적인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을 들은 다자이는 가만히 웃었다. 아츠시가 그의 웃음소리에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고 볼을 부풀렸다. 다자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따라오라고 말하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아츠시는 급히 일어나서 그의 뒤를 따라갔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이름 없는 묘비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저, 다자이씨…. 여기는?"

"공동묘지라네. 땅 주인은 요코하마 시이고, 누군지도 알 수 없는 희생자들이 모인 곳이지."

"…그 말은…."

"뭐, 딱히 합법인 건 아니지만 불법도 아니라는 얘기네. 그 단지의 크기 정도라면야."


그 말을 들은 아츠시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다자이는 피식 웃고는 혼자 봐두었던 땅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아츠시는 쪼그려 앉아 가만히 땅을 파내기 시작했다. 단단한 땅에 단지가 들어갈 정도의 작은 공간을 파내어 그 안에 단지를 묻고 위에 흙을 덮어주었다. 그러고 나니 묘지가 허한 느낌이 들어 주변에서 부러진 나뭇가지를 주워다 십자가를 만들었다. 썩 훌륭한 솜씨는 아니었지만 끙끙대며 만든 나무 십자가를 가만히 꽂아주고 나니 볼만한 묘지가 하나 생겼다. 아츠시는 십자가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무덤을 가만히 쳐다보며 말했다.


"가끔 놀러올게. 거기서는 편히 쉬어,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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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6. 1. 00:48

별 헤는 밤. 08.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윤동주, <별 헤는 밤> 中-


==================================================


아츠시는 제 품에서 싸늘하게 식어버린 마리아를 구급차에 올라서도 놓지 않았다. 보호자 명목으로 구급차에 함께 오른 것은 요사노 선생이었으므로 다자이는 자연스럽게 뒤처리를 하게 되었다. 할 일 이라곤 쿠니키다가 잡아온 암살자를 처리하는 것 정도였지만 어쩐지 썩 내키지 않아 그의 처리는 쿠니키다에게 맡겼다. 그리고 엉망이 된 바닥을 살펴보던 다자이의 눈에 띈 것은 여기저기 기운 자국이 있는 토끼 인형이었다. 원래부터 그렇게 나온건지 딱히 더러워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독특한 취미네, 그렇게 생각하며 다자이는 무심하게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한참을 만지작거리다 인형의 솜 안에 스위치가 있음을 깨달은 다자이는 가만히 그걸 눌러보았다.


딸깍,


 ─치익.


 [아, 아…잘 들리나…?]


인형에서 노이즈와 함께 들리는 건 마리아의 목소리였다. 수신인은 그걸 듣고 있는 사람, 다자이 오사무. 아마도 헤어질 때 주려고 했던 것일까. 다자이는 가만히 노이즈 너머의 작은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녀는 아마도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미안해, 약속은 못 지킬 것 같아. 그렇게 시작한 작은 목소리는 그렇게 오래 가진 않았다. 몇 번을 멈췄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작게 떨렸다.


[무섭지는 않아, 하지만…. 너무 늦게 만난 것 같아.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처음으로 더 이상 살 수 없는 게 후회되고 있어. 그래도, 지금이라도 만나서 다행이야. 고마워.]


미안해, 고마워. 그 모든 감정을 단 몇 분의 짧은 시간에 실어보낸 마리아의 메시지가 괜히 다자이의 귀에 꽂혔다. 참 얄궂은 일이었다. 그녀는 그저 만약의 경우를 위해 사귀어 둘 필요가 있는 사람이었을 뿐인데. 그녀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이상은 마음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런 상대에게 감사를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왠지 울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그녀의 또 다른 유품을 챙기고서야 다자이는 아츠시가 도착한 병원으로 갔다.


아츠시는 요사노 선생이 설득해 겨우 마리아를 품에서 놓았다고 했다. 호랑이는 피에 젖어있었다. 말라붙은 피를 닦을 생각도 못하고, 옷에 엉겨붙은 피를 가만히 내려보며 있는 모습이 꼭 버려진 강아지 같았다. 자신의 목숨에 가치를 두지 않은 사람과, 만나는 목숨마다 가치를 두는 사람. 서로 상반된 가치를 가진 이들의 만남이 가져온 상실감이란 그런 것이었다. 다자이는 고개를 숙이고 움직이지 않는 아츠시에게 걸어가 가만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제야 아츠시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그 잠깐 사이에 몇 년은 늙은 것 같은 얼굴에 새어나올 것 같은 웃음을 예의상 가만히 눌러둔 채 다자이는 그에게 그녀의 또 다른 유품을 전했다.


"…이건?"

"마리아의 마지막 선물이야."

"……."


다자이의 말에 아츠시는 가만히 그녀의 유품을 받아들었다. 촉감이 부드러운 게 꽤 기분 좋은 인형이었다. 아츠시는 멍하니 인형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다자이는 인형의 가슴에 달린 장식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가벼운 노이즈가 들리고 나온 건, 속삭이는 듯한 노래소리였다. 「쉿, 작은 아가야, 아무 말 말거라. 엄마가 너에게 지빠귀를 사줄게…♪.」 그 노래를 들은 아츠시의 눈에서는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아빠도 너를 사랑하고, 나도 사랑한단다…♪]


마리아의 노래가 끝나고 아츠시는 그 인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옛날 꿈을 꾸기도 한다는 말에, 자장가를 불러주겠다고 하기에 괜찮다고 사양했었는데. 그녀는 그 말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자이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고, 아츠시는 그저 가만히 그 노래의 끝에 아주 짧게 담겨 있는 감사의 말을 들을 때 까지 반복해서 재생을 할 뿐이었다. 그녀는 아츠시에게도 같은 말을 남겼다. 「고마워.」라는 짧은 인사를 들은 아츠시는 입술을 꾹 물고 잇새로 작게 미안하다는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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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5. 31. 00:06

별 헤는 밤. 07.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윤동주, <별 헤는 밤> 中-


=============================================


택시에서 내려서 전망대까지 올라간 그들은 어렵지 않게 아츠시와 마리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그 사이 쇼핑이라도 한 건지 손에 무언가 잔뜩 들고 있었다. 쿠니키다와 다자이는 전망대로 올라가는 그들을 조금 뒤에 인파에 섞여 따라 올라갔다. 그 때는 누군가가 자신들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 날의 최대의 불찰이라면 이것이었다. 전망대에 도착한 마리아는 가만히 석양이 지는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 둘, 그대로 도시에 많은 빛이 들어올 때 까지 마리아는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마리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그녀는 가만히 도시의 풍경을 전부 눈에 담으려던 것 처럼 도시를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높은 곳은 참 좋네."

"그래?"

"응,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한 게 기분이 좋아."


그건 아마도 살고 싶다는 증거겠지. 그렇게 말하며 마리아는 가만히 아츠시의 옆으로 다가와 손을 꼭 잡았다. 자기 손보다 작은 손이 온기를 지닌 채 손을 잡아주는 것은 꽤 기분이 좋아 아츠시는 가만히 웃었다. 마리아는 그런 아츠시를 바라보다가 마주 웃었다. 처음으로 마음의 짐이 덜어진 듯한 편한 웃음이었다. 점심을 먹은 지는 시간도 제법 지난 데다 여기저기 돌아다녔더니 슬슬 배가 고파진 아츠시가 그녀에게 저녁을 먹자고 말하려던 차였다. 갑자기 표정이 변한 마리아가 아츠시의 손목을 잡아 끈 것은. 아무리 체격 차가 있다지만 기습적인 움직임에 대응하지 못한 아츠시는 그대로 엎어졌다.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사람들은 갑작스런 소동에 그들을 쳐다보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소음기를 부착했던 것 같다. 마리아의 작은 몸이 흔들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츠시는 그녀를 끌어안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조금만 더 뻗으면 품에 안아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충격에 힘이 풀려 아츠시는 그저 비통한 표정으로 눈 앞에서 바닥으로 쓰러지는 소녀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는 사람들 틈으로 몸을 숨겨버린 저격수를 찾아나선 건 쿠니키다였다. 눈 앞에서 의뢰대상이 죽을 줄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쿠니키다는 저격수를 쫓는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 아츠시는 망연히 눈 앞에 붉은 피를 내뿜으며 쓰러진 마리아를 보고 있었다.


"…어, 째서…?"

"아츠시군."

"아니, 이건…이건 말이…안 되잖아요."


경찰을 부르며 일부러 아츠시의 어깨를 꾹 잡고 있던 다자이는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이대로 가다간 여기서 폭주할 것 같았다. 그의 이능력은 구에서 재해로 지정된 맹수였기에 그가 지금 여기서 폭주해서는 곤란했다. 아까의 소동으로 사람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어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하던 다자이는 품에서 권총을 꺼내 허공으로 총을 쏘았다. 갑작스런 총성에 이어 자신들에게 겨누어진 총구를 보던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아츠시는 그런 소동의 틈에서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질문만을 반복했다.


"…왜, 총이…왜….?"

"…아츠시군, 정신차리게."

"…마리, 아…. 이제, 겨우… 이제 겨우 웃었다고요?"

"진정해, 지금 여기서 폭주해서는 안 되네."

"…진정? 진정…해요? 어떻게? …다자이씨는 아무렇지 않아요?"


떨리는 목소리로 아츠시는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어떻게 그렇게 침착할 수 있어요? 죽었다고요, 사람이. 눈 앞에서. 정말로 죽어야 할 사람도 아니었고, 조금만 있으면 무거운 짐에서 해방 될 사람이었어요. 알고 있었잖아요? 누구보다도 잘. 당신이 우리 중에서는 가장 오랫동안 마리아랑 알고 지냈잖아. 아니야? 그런데, 진정하라고요? 왜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왜 당신은 화내지 않아요? 슬퍼하지 않아요? 왜? 난 지금 이렇게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데!!!! 가슴 아픈 절규와 함께 아츠시의 모습에는 호랑이가 깃들기 시작했다. 다자이는 급하게 자신의 이능력을 사용했지만 감정의 폭주로 인한 변화 때문이었는지 발동만이 조금 늦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이대로는…위험한데."


혼자 만이었다면 아츠시를 제압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다자이는 아츠시의 상태를 보면서 곁눈질로 마리아를 쳐다보았다. 상당히 중상이긴 했지만 아직 숨은 붙어있었다. 최대한 빨리 옮기면 어떻게든 살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요사노에게도 동시에 와주기를 요청했기 때문에 가능성은 제로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츠시는 이미 그녀가 눈 앞에서 쓰러진 것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게다가 감정이 흔들리는 덕분에 자신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폭주를 시작하려는 아츠시를 진정시킬 대책을 강구하는데 먼저 손을 뻗은 건 마리아였다. 작은 팔이 자신을 감싸는 느낌에 아츠시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온기에 하염없이 울기만 하던 눈에 조금씩 초점이 돌아왔다.


"…안…돼."

"말하지 마, 마리아."

"…아츠…시."

"…마리아…."

"…나, 때문에… 자신을…잃으면…안 돼."

"왜, 어째서… 왜?"

"…참아…지금은…."


마리아의 입술은 그 뒤에도 잠깐 움직였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츠시는 천천히 식어가는 그녀를 품에 안고 오열하고 또 오열했다.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요사노가 전망대에 도착했을 때에는 그녀는 이미 세상과의 마지막 인연을 끝낸 참이었다. 아츠시의 품에 안긴 소녀의 맥을 짚은 요사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츠시는 그대로 구급차가 올 때까지 그녀를 놓지 않고 있었다. 목놓아 우는 소년의 절규는 텅 비어버린 전망대를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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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5. 29. 22:58

별 헤는 밤. 06.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윤동주, <별 헤는 밤> 中-


==================================================



"열 두 시간?"

"응. 그 사람이 죽은지 만 이틀이 되는 시간까지."


지금은 오전 10시, 그 때가 되면 한참 밤이 밝을 10시였다. 그 시간이 지나면 정말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일까? 아츠시는 그런 의문을 가지고 가만히 마리아를 쳐다보았다. 마리아는 그런 아츠시를 마주보다가 빙긋이 웃어주었다. 어딘가 아직 어색한 웃음이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마리아는 가볍게 다리를 흔들어 의자에서 내려오곤 아츠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 하루도 잘 부탁해, 아츠시."

"…에, 응. 잘 부탁해."

"그럼, 가자."

"가다니, 어딜?"

"어디든 좋아. 내가 여기 있으면 여기도 시끄러워 질 걸?"


확실히 그랬다. 시간 제한이 다가올 수록 그들은 더 포위망을 좁혀올 게 뻔했다. 마리아는 아츠시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가면서 말했다. 이러나 저러나 목숨이 위험하다면 조금이라도 즐거운 일을 해보고 싶다고. 아츠시는 그 말에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먼저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좋아, 그럼 아는 데 까지는 안내해줄게."

"…고마워."


마리아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아츠시를 따라 걸었다. 그 조금 뒤에서는 다자이와 쿠니키다가 마치 첫 심부름을 나간 어린아이를 쫓는 것 마냥 숨어서 그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오늘도 낮의 항구도시는 시끌벅적했다. 관광객과 장사꾼들이 한데 얽혀서 여러가지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츠시가 가장 먼저 마리아를 데리고 간 곳은 차이나타운이었다. 어차피 사람들이 계속 붙을 거라면 인파가 많은 곳에 숨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았으니까. 그들이 들어간 거리의 입구에 세워진 화려한 기둥에 걸린 간판에 쓰인 금빛의 중화가라는 말이 화려한 거리의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었다.


"고기만두, 먹을래?"

"…응, 좋아."


줄이 길게 늘어서있는 유명한 가게에서 고기만두를 사갖고 나온 그들은 그대로 거리의 끝까지 걸었다. 날이 더웠지만 따뜻한 고기만두를 먹는 것은 그 나름의 각별한 맛이 있었다. 만두를 한 입 가득 베어물고 터질 것 같은 입을 꾹꾹 다물며 입안의 음식물들을 전부 씹어삼켰다. 여기저기서 보여주는 중화가 만의 쇼도 볼만했다. 아츠시는 가끔 신경을 곤두세워 주변을 돌아봤지만 다행히 미행은 붙지 않았다. 물론, 그 뒤에는 그들을 위해 조금 수고해주는 두 사람이 있었지만 아츠시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마리아는 어렴풋이 눈치챈 듯 가끔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대로 모르는 척 하루를 즐기기로 했다.


"아츠시."

"응?"

"…밤의 거리를 보고 싶어."

"음, 그럼 마린 포트에라도 갈까?"

"…좋아."


어느 곳도 관광지였기 때문에 숨기가 좋았다. 마리아는 조금 뒤쪽에서 다자이와 쿠니키다가 쓸데없는 논쟁을 벌이는 사이에 아츠시와 택시에 올랐다. 다자이와 쿠니키다가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깨달은 건 그들이 출발하고 조금 뒤의 일이었다. 기껏 미행해서 도와주고 있었더니만. 쿠니키다는 혀를 차며 다자이를 원망하듯 바라보았고 다자이는 조금 민망한지 헛웃음을 지었다. 감시망을 빠져나갈 줄이야. 하지만 그들이 갈 만한 곳을 짐작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다자이는 금세 그들이 향한 곳을 눈치챘는지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 잔소리를 해대는 쿠니키다를 끌어다 차에 집어넣고는 자신도 올랐다.


"마린포트로 가주시게."

"거기에 가면 있을거란 보장은 있고?"

"높은 확률로."

"어떻게 장담하지?"

"…마리아는 처음 봤을 때부터 높은 곳을 좋아했으니까."


다자이는 가만히 그녀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아마도 4, 5년 정도 전의 이야기다. 그 때의 마리아는 지금보다는 키가 조금 더 컸고, 나이가 조금 더 있는 미인이었다. 마을에 수소문해 그녀를 찾아간 곳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었다. 그 언덕 위에 있는 조각상의 바로 아래에 그녀는 있었다. 조금 쓸쓸한 분위기를 하고 가만히 수평선을 바라보는 모습에 다자이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말했다.


[아름다운 아가씨, 저와 동반자살 해주지 않겠습니까?]

[…?? 싫어요.]


처음 보는 여자에게 그런 요청을 한 자신도 웃겼지만, 마리아는 아주 단호하게 거절을 했다. 그것도 그 나름대로의 충격이었다. 보통은 대답이 없이 웃거나 당황해하기 마련인데 그녀의 대답에서는 아주 약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대신 느껴지는 건 오히려 증오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다자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마리아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았지만 다자이는 용건을 말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씨, 그대에게 의뢰를 하고 싶은데요.]

[…누굴 살리고 싶은데요?]

[…미래에 죽을 누군가.]

[죽음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굴 살리겠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지. 당신의 의뢰는 받지 않을 거예요. 처음에 그녀가 한 말이었다. 그래서 사실 조금 놀랐다. 그 뒤에도 가끔 연락을 하긴 했지만 오히려 먼저 그 쪽에서 의뢰를 해올 줄이야. 의뢰 내용은 상상하지도 못한 것이었지만, 다자이가 그걸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전화기 너머의 그녀는 담담히 그에게 제안을 해왔다. 그 제안은 다자이라면 꽤 솔깃하게 들을 이야기였다.


[나를 지켜줘. 내일부터 이틀간.]

[…별 일이네, 당신이 의뢰를 하다…]

[됐고, 대답은?]

[좋아. 보수는?]

[…내가 살아남는다면 당신이 원하는 인물을 한 명, 무료로 살려줄게.]

[…파격적이네. 도착 예정 시간은?]

[내일 오전.]

[알겠습니다요~.]


어쩐지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눈치챘지만, 다자이는 도움을 요청하는 그녀의 손길을 거부할 수 없었다. 조건도 조건이지만, 애초에 그녀에게서는 어딘가 자신과 비슷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라고 하면 그녀에겐 조금 실례일까. 다자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택시는 마린포트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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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5. 29. 19:09

별 헤는 밤. 05.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윤동주, <별 헤는 밤> 中-


==========================================


다음날 아침, 아츠시는 어째서인지 노골적으로 다자이를 경계했다. 단지 어제의 일을 오해한 게 아닌 것만 같았다. 아츠시의 행동이 평소하고는 다르다고 생각했는지, 쿠니키다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아츠시는 잠시 멈칫했다가는 조용히 어제의 일을 말했다. 그 소동을 겪고 씻고 나왔더니 두 사람이 그러고 있었다고. 그 말을 들은 쿠니키다의 눈빛은 당혹스러움에서 경멸로 바뀌었다. 변명을 할 틈 조차 없었다.


"아니, 오해야, 쿠니키다군…."

"오해라니, 명백한 상황에서 오해의 여지가 있는지 난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아니래도?"

"아니라는 증거를 가져와라."


쿠니키다의 날이 선 말에 다자이는 가만히 마리아를 쳐다보았다. 마리아는 다자이를 마주보며 눈을 깜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제발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해주세요. 그렇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자 마리아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를 외면해버렸다. 절대 어제 방으로 쫓겨난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지만 이대로 가다간 얘기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침묵이 계속되자 쿠니키다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뭐, 됐다."

"…쿠니키다군?"

"네가 함부로 어린아이를 건드리지 않을 거라는 것 정도는 안다."

"……."


다자이는 내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조금 감동을 받았다. 그래도 자신이 그렇게까지 엉망인 인간으로 비춰지지는 않는구나, 라는 생각을 살짝 했다. 하지만 정작 쿠니키다가 더 캐묻지 않은 것은 시간낭비를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걸 조금 지나서 그는 알게 되었다. 쿠니키다는 노트북의 화면을 조금 들여다보더니 마리아를 쳐다보았다.


"마리아양."

"…응?"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이미 알고 있는 것 아냐?"

"그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는 겁니까?"


마리아는 입을 다물었고, 쿠니키다는 노트북에 사진을 띄워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녀가 갑자기 찾아와 의뢰를 한 다음부터 남몰래 조사했던 결과물이었다. 사진 속에 있는 것은 지금의 마리아가 조금 더 성장했다면 동일인이라고 믿을 만한 얼굴이었다. 머리색도, 머리모양도, 이목구비도 굉장히 닮아있었다. 마리아는 별 감흥 없이 사진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아무런 동요도 없자 쿠니키다는 노트북을 덮고 그녀에게 물었다.


"이건 당신이죠?"

"…그래, 맞아."

"네?!"


사무실에 있던 사람 중에 가장 놀란 건 아츠시였다. 오히려 아츠시의 입장에서는 다들 어째서 놀라지 않는지가 신기할 뿐이었다. 분명히 어린아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저 사진의 여인이 마리아 본인이라는 말에 아츠시의 사고회로는 멈췄다. 사실 그 사진의 여인이 마리아 본인이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다자이나 자신에게 그런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저 일본어가 서툰 외국인이기에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어린애인데. 그게 가능한 일이긴 한가?


"…이 사진은 아무리 봐도 성인으로 보입니다만,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부작용이야."

"부작용…이요?"

"말도 안되는 이능력에 대한 패널티."

"설명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이능력은 명칭 외에는 전부 불명이더군요."

"…알았어."


마리아는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그리고 조금 오래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남다른 능력이 있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능력이 처음으로 발현된 것은 집에서 키우던 개가 죽었을 때였다. 누가 방법을 알려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정신을 차리고 났더니 분명히 죽었던 개가 살아서 깨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고, 있었다고 해도 그런 능력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고 할 것이 뻔했기에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을 방법을 찾으면서 그녀는 조금씩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보았다. 실험을 한 백 번쯤 반복하자 어느 정도 자신의 능력에 대해 감이 왔다고 했다.


"내 이능력,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는 죽은지 이틀 이내의 사체라면 누구든지 살릴 수 있어. 어떻게 죽었든지."

"…그게…가능합니까?"

"지금 당장 보여줄 방법은 없어. 하지만 사실이야. 그건 다자이도 알고있어."

"…그녀의 말이 맞다네. 여러가지로 조사했었으니까 말이지."

"다만 상처까지는 회복을 하지 못하고, 능력 사용으로 인한 패널티도 크니까."

"…패널티?"


쿠니키다의 반문에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생명을 되살리는 데에 필요한 조건은 세가지. 죽은지 이틀 이내의 사체, 그 사람에 대해 가장 강한 기억을 가진 사람, 그리고 마리아 자신의 수명. 정말 지독한 패널티였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수명을 바쳐야만 한다니. 하지만 본인이 가진 생에 대해 큰 미련이 없던 그녀는 가끔 돈을 받고 자신의 수명을 팔았다. 적어도 누군가에겐 자신의 삶이 쓸모있길 바랐다. 그제야 아츠시는 마리아가 다자이를 피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자이씨는 보는 사람이 질릴 정도로 가볍게 자신의 몸을 던지는 사람이었고, 마리아는 자신의 삶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나눠주었지만 다자이는 유일하게 그 생명을 의미없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다자이씨를 피한 이유가…그것 때문이었군요?"

"응. 처음부터 느껴졌으니까."

"…못 당하겠다니까, 진짜로."

"네가 너무 드러내놓고 사는거야."

"…음, 그런데…. 지금은 왜 쫓기고 있는 거예요?"


아츠시의 질문에 마리아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새삼스럽게 잊고 있던 것을 떠오르게 했던 질문이었던 걸까, 마리아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평온을 되찾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예전부터 받은 구두(口頭) 의뢰가 하나 있었는데, 막상 그게 내키지 않아서 도망쳐왔다고 말이다. 선금도 받지 않아서 그냥 포기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을 데려가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곤란하던 차에 다자이에게서 연락이 왔다고 했다.


"…네 녀석."

"아니, 곤란에 빠진 여인을 혼자 둘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 그거야…."

"정말 귀신같은 타이밍이어서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믿어보기로 한 거야."

"아아…."

"저런 남자이지만 얘기할 때 느낌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거든."


저런, 이라는 단어에 조금 강조를 한 느낌이었지만 다자이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쿠니키다는 애써 주의를 환기시키고는 계속 신경쓰였던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구두의뢰를 한 사람은 누구였냐고 말이다. 그녀가 도망친 곳까지 금방 찾아내서 사람을 보내고 잡아오려고 할 정도면 보통 사람은 아닐 것 같았다. 마리아는 대답하기 싫은지 고개를 돌리고 침묵해버렸다. 딱히 억지로 캐물을 생각은 없었기에 쿠니키다는 머리를 긁적이곤 질문을 관뒀다. 한참의 침묵 후에 입을 연 그녀는 단 한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이제, 열 두 시간 남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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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5. 28. 23:41

별 헤는 밤. 04.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윤동주, <별 헤는 밤> 中-


=========================================


여름이라고 해도 바닷물은 아직 차가웠다. 고개만을 빼꼼히 내민 채 세 사람은 그들의 발소리가 더이상 들리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숨어있다가 나왔다. 가장 먼저 올라간 사람은 여차할 때 능력이라도 발동할 수 있는 아츠시였다. 다행히 그가 올라갔을 때에는 아무도 없었다. 물에서 하늘만 보던 두 사람에게 괜찮다는 사인을 보낸 아츠시는 그대로 두 사람이 뭍으로 올라오는 걸 도와주었다. 고요한 거리를 보던 마리아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가 드러누웠다.


"이제…움직일 힘도 없어."

"그럼, 내가 업어줄까?"

"…넌 안돼."

"아직도 그 말을 믿는 거야?"


마리아의 말에 입술을 비죽이 내밀던 다자이는 그녀의 완강한 고집을 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아츠시에게 그녀를 업어줄 것을 부탁했다. 사원 숙소까지 가는 길에 마리아는 아츠시의 등에서 잠들어버렸다. 작은 몸이 새근거리는 모양새가 등에 가만히 닿는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어느새 해는 수평선 너머로 지고 있었다. 숙소에 도착한 아츠시는 그녀를 깨워 먼저 씻을 수 있도록 욕실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젖은 옷을 하나하나 벗으며 아츠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정신 없는 하루였네요."

"하하, 마지막이 스릴 넘쳤지?"

"스릴…네, 뭐. 죽을 뻔 했으니까요."


그걸 스릴이라고 말할 수 있겠냐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옷을 빨래통에 넣던 아츠시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다자이에게 물었다. 아까 그녀에게 아직도 믿고 있냐고 한 말은 뭐냐고. 그러자 다자이는 흠, 하고 가벼운 숨소리를 내더니 답해줄까 말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아츠시가 궁금해하는 모양새가 어지간히도 재미있었는지 대답을 뜸들이던 다자이는 볼을 긁적이고 설명을 시작했다.


"아니, 그게 말야? 난 알다시피 반 이능력자잖아?"

"…그렇죠."

"그 능력을 제어할 수 없다고 농담을 했더니 절대 닿지 말라고 하더라고."

"…왜 그러셨어요."

"아니, 그렇게 굳게 믿을 줄 몰랐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문이 열리고 들린 목소리에 아츠시와 다자이는 마리아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조금 품이 큰 옷을 두른 채 머리에 수건을 얹고 나왔다. 더 이상 찜찜함을 견딜 수 없었는지 아츠시는 마리아의 뒤를 이어서 욕실로 들어갔다. 아츠시가 문을 닫고 들어가자 마리아는 다자이를 흘끗 쳐다보고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자이는 그런 마리아를 보다가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보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채 시선을 그녀에게 향했다. 대충 머리를 말리던 그녀는 다자이의 시선에 그제야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왜?"

"아, 그거 말이야. 내 능력…."

"거짓말인 건 알고 있었어."

"…엑, 그럼 어째서 그렇게 피하는 거야?"

"…죽고싶어 하는 사람 곁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


마리아의 말에 다자이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가, 그 문제였나. 마리아의 말에 그는 졌다는 듯 양 손을 들었다. 그녀의 이능력은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녀의 '살리는 것'은 요사노 아키코의 [님이여, 죽지 말지어다]와 닮았지만 달랐다. 다자이는 한 때 그녀를 이용하기 위해 접근했었기에 그녀의 능력정도는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제가 처음에 만났을 때 했던 농담을 믿는 소녀인 줄 알았더니만 정작 그것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니. 다자이의 조금은 넋나간 표정을 보던 마리아는 한숨을 쉬고는 일어나 그를 쓰다듬어주었다.


"너도 특수한 성질의 이능력이니까, 만약 정말 죽어버린다면 내 능력이 통하지 않을까봐 그래."

"…자기를 이용할 생각만 가득한 남자한테 정을 주면 안되는 거 아냐?"

"지금은 내가 이용하고 있으니까."

"…못 당하겠네."


마리아의 말에 입꼬리를 올려 피식 웃은 다자이는 가만히 그녀에게 기댔다. 생각하고 있던 것까지 전부 꺼내서 돌려받은 느낌에 어쩐지 허탈하고 조금은 편했다. 마리아는 자신에게 기댄 다자이를 물끄러미 보다가 가만히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 묘한 자세는 씻고 나온 아츠시가 놀라서 튀어나와 다자이를 강제로 떼어낼 때 까지 계속되었다. 아츠시의 행동에 벽으로 날아간 다자이는 벽과 부딪친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츠시는 마리아를 위 아래로 살피다가 그녀를 끌어안고 다자이를 노려보았다.


"…다자이씨."

"아야, 응? 너무하잖아, 아츠시군…."

"아무리 여자가 좋아도 그렇지…."

"으응?"

"…여자를 좋아하는 건 이해할 수 있어요, 남자니까, 하지만, 하지만!!!"

"……아차."

"마리아는 아직 어린애라고요!!! 이 변태!!!"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다자이를 보던 아츠시는 그대로 그를 현관 밖으로 내쫓고 문을 닫았다. 그 틈으로 얼핏 보인 마리아의 표정은 매우 즐거워하는 그것이었다. 아아, 제대로 당했네. 머리를 긁적이며 닫힌 문을 보던 다자이는 어깨를 으쓱이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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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5. 28. 21:42

별 헤는 밤. 03.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윤동주, <별 헤는 밤> 中-


================================================


한낮의 부드러운 간식 타임을 끝내고 두 사람이 사이좋게 향한 곳은 랜드마크 타워였다. 아츠시의 월급에 비해 입장료는 결코 싼 편은 아니었지만, 마리아가 수고비라고 하면서 대신 내준 덕에 아츠시의 지갑은 지켜질 수 있었다. 전망대에 도착한 그들은 가만히 눈 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전망대의 망원경 주변엔 사람이 바글바글했지만 마리아는 그런 건 신경쓰지 않은 채 유리벽 앞에 서서 가만히 요코하마를 내려다보았다. 한낮의 항구도시는 밤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살아움직이고 있었다.


"좋은 도시네."

"응, 그렇지?"

"이 도시는 좋아해?"


그런가? 아츠시는 가만히 고개를 갸웃했다. 좋다 싫다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이 곳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여기서 지냈다. 그것 뿐이었다. 마리아의 말에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 아츠시는 가만히 그녀의 옆에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도시는 지나가는 사람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작아보였다. 그렇게 마리아가 자신의 손을 잡아 끌 때 까지, 아츠시는 멍하니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급하게 걸음을 옮기는 마리아에게 이끌리듯 내려가면서 아츠시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미행이 붙었어."

"미행?!!"

"쉿, 목소리가 너무 커."


마리아는 사람들 사이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아츠시와 자신의 몸을 숨기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의 걸음은 아주 빠르지도, 아주 느리지도 않았다. 마리아를 뒤따라가면서 신경을 곤두세우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의 움직임을 쫓아다니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마리아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면서 랜드마크 타워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대로 택시에 오른 그들은 요코하마 시내를 빙글빙글 돌았다. 얼마나 돌고 있었을까, 얌전히 운전을 하던 기사가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리고 그는 마리아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시내 구경은 좋았어?"

"…나쁘지 않았어."

"항상 그런 대답이네."

"사실이니까."

"좋다, 싫다. 좀 더 확실하게 답할 수는 없는 거야?"

"응."

"이런 대답은 확실하면서."


낯선 운전수와 평탄하게 대화를 이어가던 마리아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츠시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자신의 뒤에 감추고 택시기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택시기사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그 이유를 알겠다는 듯 가볍게 손뼉을 치고 제 얼굴을 잡아 뜯었다. 처음엔 이게 무슨 행동인가 싶었지만 그 사이에 드러난 택시기사의 얼굴에 아츠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시 운전대를 잡고 골목을 향해 운전을 하는 사람은 다자이였다.


"다, 다자이씨?"

"응, 아츠시군~. 오늘 하루는 즐거웠어?"

"네? 뭐…. 나름대로…."

"하하, 그건 다행이네."

"그런데 어째서 여기에 계신 거예요?"

"…내가 불렀어."


마리아가 불렀다고? 언제? 아츠시는 내내 휴대폰이라고는 손에 들고 있지도 않았던 마리아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다자이는 피식 웃으며 아침에 이 시간 쯤 어디로 오라고 쪽지가 남겨져있더라고 말하고는 리어뷰 미러를 쳐다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엔 그가 한숨을 쉰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직 미행은 떨어지지 않았다. 마리아는 뒤를 돌아보고는 작게 혀를 찼다. 다자이는 운전을 멈추지 않은 채 그들의 차로는 가기 힘든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들은 차에서 내려 그들을 따라오기 시작했다.


"정말 끈질기네."

"…얼마 전에 죽은 사람이 있어서 그렇겠지."

"…죽어? 설마…네가 한 거야?"


담담한 마리아의 말에 당황한 아츠시가 묻자 마리아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냐는 말에 아츠시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사람은 보는 것 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솔직히 외모만으로 따지면 다자이와 마리아의 관계성이야말로 한없이 제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서 만난걸까? 갑자기 떠오른 의문이었지만 질문을 할 시간은 없었다. 


"이 꽉 깨물어."

"네?"


다자이의 목소리에 당황한 아츠시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총성이 울려퍼졌고 다자이는 그와 동시에 드리프트를 했다. 촤아악, 격한 흔들림과 함께 그들이 도달한 곳은 지금은 쓰지 않는 오래된 창고 근처의 공터였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숙인 그들은 총격이 닿지 않은 쪽의 문을 열고 뛰쳐나가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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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5. 28. 01:01

별 헤는 밤. 02.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윤동주, <별 헤는 밤> 中-


=============================================


호위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걸까? 아츠시는 새삼스럽게 그런 기분이 들었다. 기본적으로 호위란 건 그 사람을 지키는 일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가는 곳을 따라가야 하는 게 아닐까? 그게 맞는 거겠지? 아츠시는 그 질문을 아침부터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 마리아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건지, 마리아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우선은 아무데서나 재울 수 없어 방으로 데려간 것 까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정도 불편함은 의뢰를 위해서라면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어딘가를 가고 싶다거나, 무언가를 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아침에 태연하게 일어나서 어제와는 다른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츠시의 출근길을 따라나섰을 뿐이다.


"저기, 마리아…?"

"응, 왜?"

"아니, 음, 가고 싶었던 곳이라던가… 없어?"


있으면 함께 가 주겠다는 의미로 말했지만, 마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딱히 가고 싶은 곳은 없다고 말한 그녀는 사무실의 빈 자리에 앉아서 창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행동은 다자이가 다가와서 그녀를 쓰다듬으려고 시도할 때 까지 멈추지 않았다. 마치 언제쯤 다자이가 다가올 지 알고 있었던 것 처럼, 그녀는 기막히게 의자를 다시 돌려앉았고 그 덕분에 의자와 부딪힌 다자이는 턱을 부여잡고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마리아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를 쳐다보다가 아츠시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마리아, 마리아?"

"…응?"

"저, 혹시… 다자이씨랑 싸웠어?"

"아니."

"그럼…왜 피하는 거야?"


아츠시의 질문에 사람들 사이를 서둘러 걷던 마리아의 걸음이 멈췄다. 아츠시를 가만히 바라본 그녀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는 조금 걸음을 늦춰 사람들 사이로 걸어들어갔다. 그녀가 가장 먼저 아츠시를 데리고 들어간 곳은 옷가게였다. 하지만 옷에는 관심이 없는지 걸려있는 예쁜 옷들을 지나쳐 간 그녀가 손에 잡은 것은 베이지색의 모자였다. 머리카락을 한데 말아서 모자를 뒤집어 쓴 그녀는 가만히 아츠시를 쳐다보았다.


"어때?"

"…음, 색이 조금 밝지 않아?"

"…그런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마리아의 태도를 보면 그녀가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눈치 챌 수 있었다. 눈치는 아직 멀었고 경험도 적었지만 그 정도의 육감은 있었다. 아츠시는 진열된 모자들 중 다른 사람들의 모자들보다도 튀지 않고 그녀의 옷과 어울리는 색의 모자를 골라 그녀에게 씌워주었다. 거울을 본 마리아는 그게 마음에 드는지 빙긋이 웃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온 그녀는 아까보다 조금 편안해진 표정으로 거리를 걸었다. 아츠시는 왠지 뿌듯한 기분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나카지마 아츠시."

"그냥 아츠시로 괜찮아."

"…고마워, 아츠시."

"응? 뭐가?"


아츠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마리아는 조금 슬프게 웃으며 그냥 여러가지로, 라고 말하곤 걸음을 옮겼다. 문득 보인 그녀의 웃음은 어린 아이가 짓기엔 너무도 아파보였지만 그녀의 걸음에 맞추느라 그걸 파고 들 틈은 없었다. 사람이 제법 많은 길임에도 마리아는 그녀의 작은 체구로 여기저기에 잘 파고 들었다. 오히려 뒤에서 따라가는 아츠시가 힘에 부쳐 쉬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어느새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버린 그녀를 한참 찾다 지친 아츠시가 바닥에 쪼그려 앉을 즈음, 눈 앞에 불쑥 화려한 물체가 들어왔다. 갑작스런 물체의 등장에 놀라 조금 물러나다 엉덩방아를 찧자,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리아? 한참 찾았잖아."

"미안, 여기는 워낙 신기한 게 많아서."

"…아까는 가고 싶은 데가 없…으읍."


마리아를 향한 반문은 곧 그녀가 강제로 입에 물려버린 그 물체에 막혔다. 반사적으로 물체를 씹은 아츠시는 입 안에 퍼지는 단맛에 살짝 늘어졌다. 마리아가 가져온 것은 크레페였다. 부드러운 크림에 차가운 아이스크림, 그 위를 장식한 초콜릿 시럽과 진득한 치즈케이크가 얇은 크레이프와 함께 입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맛있다…. 아츠시가 볼이 터지도록 오물거리는 모습을 본 마리아는 그제서야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자기 몫의 크레이프를 베어물었다. 입 안에서 터지는 체리가 기분 좋았다.


"다 먹으면, 이 도시에서 제일 높은 곳에 가보고싶어."

"그럴까?"

"응."


아츠시는 마리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높은 곳이라고 해도 퍼뜩 떠오르는 건 랜드마크 타워 정도였지만. 관람차와 랜드마크 타워, 둘 중에 어느 곳을 가는게 좋을까 고민하던 아츠시는 일단 랜드마크 타워에 가보기로 했다. 만약 거기에서 마리아가 다른 곳을 원한다고 하면 그 곳으로 가면 그만이니까. 아직 낮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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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5. 27. 00:23

별 헤는 밤. 01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윤동주, <별 헤는 밤> 中-


=============================================


그 소녀를 만난 건 딱 수국이 피기 시작할 때였다. 그 날은 마침 다른 사람들은 전부 나가고 아츠시만 남아 있었다. 똑, 똑. 커다란 나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책상 위에 어지러이 놓여있던 서류를 대충 쌓아놓고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있는 건 자신의 가슴팍 정도까지 오는 키를 가진, 다소 화려한 블라우스에 점퍼스커트를 입은 이국적인 분위기의 여자아이였다. 조금 구불거리는 푸른 수국을 닮은 단발은 그녀의 어깨를 조금 넘었고 짙은 녹색의 눈동자는 아츠시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시선을 받은 게 오랜만이라 당황하는 사이 소녀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버렸다.


"저, 저기…!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편하게 말해도 괜찮아. 지금 있는 사람은 당신 뿐이야?"

"…으, 응."


아츠시는 문을 닫고 소녀에게 다가갔다. 소녀는 별 다른 말은 하지 않고 가만히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려는 걸까? 언제 올 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소녀에게 마실 것을 권해보았지만 소녀는 괜찮다고 하며 아츠시를 빤히 보다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손을 뻗어 그의 양 볼을 잡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았다. 당황한 아츠시가 어찌할 바를 몰라 팔을 허공에 휘젓자 소녀는 손을 떼고 물었다.


"당신은 강해?"

"나? 나는…아니. 그다지 강하지는 않을지도…."


강하냐는 물음에 아츠시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답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졌다. 소녀는 그저 담담하게 그렇구나, 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보다, 처음 보는 여자애를 앞에 두고 아츠시는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몰랐다. 손님인 것 같긴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하고 무슨 얘기를 이어가면 좋단 말인가? 차라리 무언가 확실하게 의뢰를 한다던가 하는 말이라도 하면 서류라도 받아 둘 텐데. 아츠시는 소녀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저, 저기, 이름이…뭐야?"

"…마리아."

"예쁜 이름이네, 나는…."

"알고 있어, 나카지마 아츠시. 유명하니까."


유명해? 내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츠시는 반사적으로 소녀에게서 떨어져 벽으로 붙었다. 자신이 유명한 것은 결코 빛의 세계에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포트마피아나 그 관계자란 말인가? 그런 줄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들여버렸다. 어린아이라고 방심해버렸다. 어떡하지, 이대로 마리아를 없애버려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며 마른 침을 삼키는데, 마리아가 살포시 웃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 이능력은 전투용이 아니니까. 당신을 잡기 위해 온 것도 아니고."

"…그럼, 어째서?"

"그건…."


마리아가 무어라 말을 하려는 찰나,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더위에 찌든 두 사람이 들어왔다. 한 사람은 옷이 푹 젖어 있는 게 보지 않아도 무슨 짓을 했는지 뻔했다. 바닥에 물이 떨어지진 않았지만 젖은 코트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놓던 그는 제 파트너가 어째서인지 눈싸움을 하고 있는 소녀를 발견하더니 이미 누군지 아는 눈치인 듯 달려가 팔을 벌렸다.


"마-리아-♡"

"…가까이 오지 마. 젖어."

"…!! 오랜만에 봤는데 너무 차가운 거 아냐?"

"…전혀."


마리아의 냉랭한 반응에 어깨를 축 늘어뜨린 다자이는 그대로 의자에 힘없이 걸터앉았다. 그녀, 마리아를 아는 건 아무래도 다자이 뿐인 것 같았다. 쿠니키다는 둘의 대화를 듣더니 마리아에게 시선을 맞추고 말을 걸었다. 다자이의 지인인 것 같은데 여기까진 무슨 일이냐는 말에 마리아는 그제서야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의뢰를 하려고 왔어."

"…의뢰?"


쿠니키다의 반문에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어서 의뢰의 내용을 말했다. 나를 지켜줘. 너희들이라면 믿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소녀의 시선은 잠시 다자이를 향했던 것 같다. 다자이에게서 시선을 돌린 마리아는 제법 표정이 진지해진 쿠니키다와 아츠시를 덤덤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조용히, 그러나 답을 바라는 소녀의 시선에 쿠니키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런 의뢰라면 사장님을 통하는 게 빠를 겁니다."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다자이의 전화벨이 울렸다. 의자를 돌려 전화를 받은 다자이는 짧게 대화를 주고 받더니 '알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귀신같은 타이밍에 걸려온 전화는 사장에게서 온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난 다자이는 마리아에게 다가가 가만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방금 전화, 사장님에게서 온 거야."

"…뭐라고 하셨나?"

"음, 이 가련한 소녀의 의뢰를 받아주라고 하시더군."

"뭐, 사장님이 그랬다면야…."

"그리고 그 의뢰를 수행하는 건 아츠시군, 자네야."

"네?"


저요? 제가요? 아츠시는 갑작스런 말에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았다. 능력 조절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주제에 다른 사람의 호위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미 정해진 일이라는 듯 다자이와 쿠니키다는 아츠시의 어깨를 두드리며 잘 부탁한다고 말할 뿐이었다. 하다못해 마리아라도 다른 상대를 지목해주길 바랐지만, 아츠시의 앞에 똑바로 걸어온 그녀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잘 부탁해, 나카지마 아츠시."


아아, 잘 해나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아츠시는 하릴없이 손을 뻗어 소녀의 작은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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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