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Idolm@ster / Hareiro : Miura Azusa]
별 헤는 밤. 10.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윤동주, <별 헤는 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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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일 년 정도 됐구나. 이제는 꿈에도 네가 나오질 않아. 그렇다고 해서 널 잊은 건 아니니까…."
눈을 뜨고 가만히 무덤을 바라보던 아츠시는 멋쩍은 웃음을 짓고 작은 꽃을 가만히 무덤에 올려두었다. 어쩐지 마리아의 머리카락 색을 닮아서 자기도 모르게 사버린 몇 송이의 라일락을 놓고 일어나자 시선이 느껴졌다. 여태껏 상념에 젖어있어서 몰랐던 모양이다. 줄곧 아츠시를 쳐다보고 있었던 건지, 그 사람은 아츠시가 쭈볏거리며 일어나자 옆으로 다가와 그 작은 무덤에 하얀 꽃을 놓았다. 그리고는 그 앞에서 가만히 합장을 하고 한참을 말없이 무덤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모른척하고 그 자리를 뜨기가 뻘쭘해져 아츠시는 저도 모르게 그 옆에 서 있었다.
"…고마워요."
"네?"
따로 듣는 사람은 없었으니 역시 나에게 얘기 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무슨 뜻일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츠시는 곧 어렴풋이나마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시선을 마주친 그 사람은 쿠니키다씨가 보여줬던 조금은 성장한 것 같은 마리아와 매우 닮은 얼굴에 그녀보다는 짧고 차분한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츠시를 보며 상냥하게 웃었다. 새삼스럽게 심장이 뛰었다. 잠시 시계를 바라보던 그녀는 빙긋이 웃고는 아츠시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나카지마 아츠시 씨?"
"네, 네?"
"잠깐 시간 좀 내줄래요?"
"네? 하지만, 곧 돌아가봐야…하는데요."
"괜찮으니까."
그녀는 아츠시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자리를 옮겼다. 얼떨결에 끌려가면서도 아츠시는 이거 정말로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만 한가득이었다. 안 그래도 아침부터 일처리를 제대로 못해서 혼났는데, 이대로 가면 농땡이를 피우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럼에도 용기있게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못한 아츠시가 도달한 곳은 요코하마가 한 눈에 보이는 전망대의 식당이었다. 그러고보니 점심때가 훌쩍 지나있었지. 새삼스럽게 흘러간 시간을 깨닫자 배가 민망할 정도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볍게 웃고는 뭐든 좋으니 먹고 싶은 걸 시키라고 했다. 아츠시가 머뭇거리자 그녀는 사양하지 말라고 하며 자신도 메뉴판을 보기 시작했다.
"코스는 조금 부담스러우려나. 단품도 괜찮으니까 시켜요, 아츠시 씨."
"저, 저, 그, 그게요…. 죄송하지만 오늘 처음 본 분한테…. 그, 마음대로 시키라고 하셔도 말이죠…."
"아, 내 정신 좀 봐. 아직 소개를 안했죠?"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가볍게 손뼉을 친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웃음을 머금은 채 자기소개를 했다. 그녀의 이름은 루스 릴케. 그리고 굉장히 놀랍게도 마리아의 딸이었다. 아츠시는 딸이라는 말에 놀라서 기함을 토하고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따져보면 굉장히 많은 부분이 닮았지만, 설마 딸이 있었을 줄이야? 아츠시의 기억 속에 있는 마리아는 작은 소녀, 그리고 사진에서만 보던 20대 초반의 여성이었기에 그는 한동안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정말로 감사하는 의미에서 내는 거니까, 걱정 말고 시키세요."
"…그,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사양않고…."
"네, 얼마든지요."
수 분의 고민 끝에 주문을 하고서야 아츠시는 가만히 앞에 따라진 잔에 놓인 물을 마셨다. 사실 아직도 조금 진정되지 않는다. 딸이라니, 딸이라니? 심지어 그 딸이 자기보다 나이가 있어보였다. 그러면 마리아는 도대체 몇 살이란 말인가? 그리고 자기는 그렇다면 마리아에게 어떤 실례를 한 걸까,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갔다. 아츠시의 표정을 보던 루스는 작게 웃고는 손을 내저었다.
"어머니는 그런 걸 신경쓰실 분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마세요."
"…에, 어, 어떻게 그걸?"
"…아츠시씨, 지금 생각하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나있거든요."
그 정도로 동요했단 말인가. 혼자 속으로 중얼거린 아츠시는 다시 심호흡을 하고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찬 물이 목을 넘어 내려가자 조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사이에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고, 루스는 천천히 먹으면서 얘기를 하자며 그에게 음식을 들기를 권했다. 아츠시는 멋쩍게 웃으며 숟가락으로 음식을 떠서 입에 넣었다. 따뜻한 밥알이 입안에 퍼지는 게 기분 좋았다. 어쩐지 저도 모르게 표정이 풀어져 한참을 우물거리는데, 그 모습을 보던 루스가 멈췄던 얘기를 시작했다.
"마지막에 아츠시씨를 만나서 행복했겠네요."
"…마리아, 아니 어머니께서 말인가요?"
"그냥 마리아라고 해도 괜찮아요."
"…네에."
가만히 접시를 내려다보던 루스는 조금 오래된 이야기를 꺼냈다. 마리아는 그녀가 철이 들 무렵 조부모님에게 그녀를 맡기고 훌쩍 사라졌다고 했다.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고, 루스는 혼자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지내는 날이 많았다고 했다. 조부모님으로도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너무 커서 한때는 그녀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녀의 이능력을 알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녀의 이능력, 그리고 그 패널티를 듣고서야 루스는 자신에게서 숨어버린 바보같은 어머니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고 했다. 그 끝에 접한 것은 동쪽 끝에 있는 이 나라의 항구도시, 요코하마에서 어둠의 세력들의 항쟁에 말려들어 죽은 불운한 소녀의 소식이었다.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모습을 감춘 날은 아버지의 장례식이 일주일 지났을 때였죠."
"…어, 하지만 마리아의 이능력은…."
"그래요.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죠. 하지만 그것도 제한이 있어요."
"설마…."
"아츠시 씨가 생각하는 설마예요."
루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마리아의 이능력은 한 사람을 여러 번 살릴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이미 한번 살렸던 자신의 연인이 죽자 실의에 빠져 점점 소중한 것들을 멀리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렇게 사람도 적은 시골 동네에서 가끔 찾아 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받은 돈을 양육비로 부쳤다고 했다. 그런 돈으로 키워진 기분은 썩 유쾌하진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의 목숨이 빚으로 다가오는 기분이었단다. 거기까지 말하던 루스는 말을 멈추고 머리를 긁적였다.
"아아, 이런 얘기를 하려고 온 게 아닌데."
"…그러면…."
"말했잖아요? 감사의 인사라고."
"…네에."
"어머니의 마지막 연락처를 쫓아오니 다자이라는 분이 전화를 받으시더군요. 그래서 물어봤더니 그 때의 일을 전부 말해줬습니다."
"…다자이씨가…."
"네. 그래서 당신에게 감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그런…. 저는 지키지 못했는 걸요."
"자책하지 말아요."
분함에 주먹을 꼭 쥔 아츠시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쳐 부드럽게 쓸며 루스는 웃었다. 아츠시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표정을 본 루스는 가만히 다른 손을 들어 그의 볼을 토닥였다. 최고의 은인이 이런 표정을 하고 있으면 아마 천국에서도 한심하게 쳐다보느라 편히 쉬지도 못할 거라는 말을 듣고서야 아츠시는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자신이 최고의 은인이라니, 대체 무슨 영문인지 그는 알 길이 없었다. 루스는 아츠시의 손에 겹쳐둔 손을 들어 가만히 그의 볼을 주욱 늘렸다 놓았다. 기습적인 행동에 그가 당황하며 빨개진 볼을 감싸자 그녀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애인을 구하지 못한 슬픔에서 구해줬잖아요, 당신이."
"……."
"어머니는 다자이씨에게 남긴 메시지에서 '살고싶어졌다'고 했습니다."
"…아."
"그 생각을 하게 만든 건, 아츠시 씨, 당신이에요."
"…제가…."
"그러니까, 이제 그만 울어도 괜찮아요. 정말로 고마워요."
어쩐지 퍽 와닿은 루스의 말에 아츠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루스가 괜히 핀잔을 주자 급히 닦아내긴 했지만 어쩐지 눈물은 금방 멈추지 않았다. 내내 삐걱거리던 시간이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내일부터는 조금 후련한 기분으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울고 웃으며 하는 조금 떠들썩한 식사를 하는 그 너머엔 맑게 갠 요코하마의 하늘이 도시를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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