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호스트레이독스/망향(望鄕)'에 해당되는 글 28건

  1. 2016.10.17 망향 26.
  2. 2016.10.10 망향 25.
  3. 2016.09.11 망향 24.
  4. 2016.09.10 망향 23.
  5. 2016.09.08 망향 22.
  6. 2016.08.13 망향 21.
  7. 2016.08.10 망향 20.
  8. 2016.08.09 망향 19.
  9. 2016.08.08 망향 18.
  10. 2016.08.07 망향 17.
2016. 10. 17. 00:18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26.

=========================

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 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

"쿄카! 쿄카!!"

아츠시는 쿄카의 이름을 부르며 감옥 문을 흔들었다. 하지만 감옥 문은 잠깐 덜컹거리기만 했을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쾅! 거칠게 창살을 내리치는 소리에 쿄카가 겨우 눈을 떴다. 그녀는 눈을 두어번 깜박이다 창살 너머로 보이는 아츠시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라는 생각이 표정에 전부 드러나 있었다. 아츠시는 자물쇠를 부술만한 물건을 찾아 주변을 살폈지만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구색을 갖춰둔 감시용 책상 하나와 접이식 의자 뿐이었다. 저 의자라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아츠시는 의자를 덥썩 집어 철로 된 골조 부분을 자물쇠를 향해 내리쳤다. 쾅, 쾅! 연이어 커다란 소리가 아무도 없는 복도에 울렸다. 쿄카는 아츠시에게 거듭 그만두라고 얘기했지만 아츠시는 멈추지 않았다. 덜그럭, 얼마 안 가 내리치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망가진 자물쇠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간 아츠시는 쿄카를 묶어둔 사슬을 풀려고 했지만 사슬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이미 자물쇠를 부수느라 반쯤 망가져버린 의자는 곧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완전히 부서져버렸다.

"젠장, 어째서…!"
"아츠시…. 안 돼. 도망쳐!"
"무슨 말이야, 쿄카? 내가 어떻게 너를 두고 가."
"나한테서…. 나한테서 도망쳐!"
"못 가."
"지금 떨어지지 않으면, 내가 널 죽일지도 몰라…!"

쿄카의 눈빛은 공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녀에게서 보이는 공포는 전에 느꼈던 동질감이 있는 막연한 두려움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아츠시는 물러서지 않았다. 사슬을 끊어낼 수 없다면 통째로 뜯어내자고 생각한 아츠시는 벽과 사슬의 이음매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땀이 비오듯 흘렀지만 아츠시는 멈출 줄을 몰랐다. 단단한 벽돌을 공략하던 손에는 어느새 피가 맺히기 시작했다. 아츠시의 피 냄새에 쿄카는 혀를 깨물어서라도 정신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이미 피냄새에 깨어나기 시작한 본능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사슬에 매인 손을 뻗어 아츠시의 목을 움켜쥔 쿄카는 고통스러운 그의 숨소리를 무시한 채 고개를 움직여 그의 어깨를 물려고 했다. 아츠시는 반사적으로 있는 힘을 다해 쿄카의 이마를 누르며 버텼고, 쿄카의 날카로운 손톱은 아츠시의 목과 어깨에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정신…차려, 쿄카!"
"…크르르르…."

아츠시의 목소리는 쿄카에게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은 이미 광기에 물들어있었다. 피부를 파고 드는 손톱에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힘을 뺄 수는 없었다. 그 순간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아츠시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몇 번이고 느꼈던 살기가 지금 눈 앞에 있는 쿄카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쿄카의 힘은 평소보다도 엄청났다. 몇 번인가 훈련을 할 때 검을 마주한 적은 있고, 힘을 뺀 적도 없지만 지금의 그녀의 힘은 그 때의 배 이상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뱀파이어의 각성이란 이런 건가? 이런 피가 내게도 흐르고 있어서 나는 그렇게 보통 인간들보다 강한 거였나?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뒤에서 인기척이 나나 싶더니, 곧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상처로 흘러드는 물에 아츠시는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곧이어 다시 한 번,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 뒤에 이어지는 건 쿄카의 비명소리였다.

"아아아악!!!!"
"쿄카…!!"
"캬아아악!!"

절그럭거리는 사슬의 소리와 함께 쿄카는 괴로운 듯 비명을 질렀다. 물을 정통으로 맞은 피부는 희멀건 연기가 피어오르며 조금씩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쿄카에게 다가가려는 아츠시를 저지한 것은 낯익은 지팡이였다. 아츠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저지한 이를 쳐다보았다. 란포는 지팡이를 거두지 않은 채 주변의 상황을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누가 이 곳을 알려줬는 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아키겠지. 얼굴을 감싼 채 비명을 내지르며 뒹굴던 쿄카를 무심한 표정으로 내려보던 란포는 아츠시의 팔을 잡아서 일으키고는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진 침대에 데리고 가서 앉혔다. 얼마 안 가 쿄카의 숨소리는 안정되었고, 그녀는 푹 젖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미안해, 아츠시."
"…쿄카."
"나 참,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줬건만."
"왜, 이런 짓을 한 겁니까?"
"왜냐고? 저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란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분노에 찬 아츠시의 시선을 마주하며 물었다. 이즈미 쿄카는 지금 위험한 상태야. 각성이 진행 중이라고? 그 과정에서 훈련생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하지? 란포는 기관의 책임자로써 자신이 져야할 많은 생명들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아츠시는 납득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 생명을 이렇게 잔인하게 묶어두어야 하는가? 웬만한 힘으로는 풀리지도 않는 사슬이었다. 란포는 다른 생명을 지키겠다는 이유로 쿄카를 감금했다. 이 상황을 참고 넘겨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끊임없이 아츠시의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란포는 아츠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자신이 할 말을 할 뿐이었다.

"이즈미 쿄카는 각성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여기에 있을 거야."
"네? 그 각성이란 건 언제 끝나는데요?"
"나도 모르지. 문헌에서는 길면 일 년 정도 간다고 하는데."
"그럼, 일 년 내내 쿄카를 가두겠다고요?"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왜 말이 안 되지? 실제로 조금 전에 죽을 뻔 했으면서."
"…그건."

확실히 그랬다. 란포의 말에 반박을 할 수는 없었다. 란포가 오지 않았다면 자신은 벌써 죽었을 지도 모른다. 쿄카의 힘은 무서울 정도로 강했다. 란포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쉬고 조금 피 냄새를 맡은 것만으로도 그 정도라고 말하며 쿄카를 쳐다보았다. 쿄카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깨가 작게 떨리는 걸로 보아 아마도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란포는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가볍게 톡톡 누르면서 아츠시를 곁눈질로 흘끗 보고 얘기를 꺼냈다. 이대로 쿄카의 곁에 있다가 그녀의 손에 죽던지, 그녀의 각성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던지. 그 말을 들은 아츠시는 심장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죽고 싶지 않아서 지금까지 함께 버텨왔건만, 지금은 자칫 잘못했다가는 그녀의 손에 죽을 판이고, 각성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자니 그 전에 쿄카는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은 뱀파이어에 대해 아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아츠시는 주먹을 꾹 쥔채 물었다.

"…각성이 빨리 끝나는 방법은 없나요? 제가 읽었던 책에는 진정시키는 방법 정도 뿐이었어요."
"…그 책은 어디서 봤지?"
"예전에…. 도망치다가 우연히 들어간 폐가에서요."
"그래? 흠, 그렇단 말이지."

란포는 아츠시가 던진 질문에는 답을 주지 않은 채 혼자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통화버튼을 누른 그는 가만히 휴대폰의 통화가 연결될 때까지 생각에 잠겼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시였다. 란포는 그녀에게 튼튼한 자물쇠를 하나 가져오라고 말하면서 아츠시를 보았다. 루시의 대답을 듣고 통화를 끊은 그는 아츠시에게 걸어가 가만히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맞췄다. 란포의 녹색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아츠시를 쳐다보았다. 아츠시는 왠지 모를 위압감에 마른 침을 삼켰다. 그 모습을 본 란포는 이내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난 그 방법을 다자이를 만나기 전까진 몰랐는데 말이야."
"…네, 네에."
"그 집의 위치는 기억하고 있나?"
"…아뇨, 그, 급하게 들어갔던 거라…."
"그럼 특징이라도 기억하고 있다면 말해보게."
"…녹색 지붕의 집이었어요. 담벼락엔 마른 담쟁이가 있었고…."
"다른 특징은?"
"아, 그 근처에…커다란 신사가 있었던 것 같아요."
"호오, 신사."
"…아마도, 이름이…센…소지."

아츠시의 대답을 들은 란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금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아까보다 빠르게 연결된 통화에 란포는 핸드폰을 귀에서 조금 떼고는 한참동안 쏟아지는 잔소리를 흘려 넘겼다. 전화를 받자마자 쏟아지기 시작한 잔소리의 주인공은 요사노였다. 잔소리를 쏟아내던 그녀가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말을 멈추자 란포는 그제야 핸드폰을 가까이 대고 아츠시를 치료해주라는 말만을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아츠시에게 곧 아키가 이곳에 올테니 적절한 치료를 받으라고 하고는 쏜살같이 나가버렸다. 어디로 향하는 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지만, 그를 딱히 쫓을 생각은 없었다. 아츠시는 가만히 벽에 기대서 여전히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쿄카를 애처롭게 바라볼 뿐이었다.


'문호스트레이독스 > 망향(望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망향 25.  (0) 2016.10.10
망향 24.  (0) 2016.09.11
망향 23.  (0) 2016.09.10
망향 22.  (0) 2016.09.08
망향 21.  (0) 2016.08.13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10. 10. 00:52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25.

=========================

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 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

쿄카의 각성이 시작된지 두어 주가 지났다. 쿄카의 몸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쿄카의 상태를 보던 루시는 결국 그녀를 훈련에서 빼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츠시는 요즘 들어 눈에 띄게 나빠지는 쿄카의 상태가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쓰러지는 주기는 확실히 짧아지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루시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쿄카는 의무실에 실려가면 한참을 방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 쯤 되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은 세살짜리 어린아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쿄카는 아츠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캐내는 건 썩 내키지 않아 아츠시는 그녀를 가만히 두었다. 언젠가 말할 생각이 있다면 말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쿄카는 눈에 띄게 아츠시를 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늘 붙어다니던 둘이 서먹한 사이가 되자 다른 훈련생들이 둘이 싸웠느냐고 물었지만, 아츠시는 대답할 수 없었다. 차라리 싸웠다면 할 말이라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얘기를 해보기도 전에 쿄카는 자신을 멀리했다. 아츠시는 오늘도 비어있는 쿄카의 자리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쿄카…."
"대전 중에 다른 생각을 하다니, 여유부리냐?"

아차. 아츠시는 맹렬하게 턱을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을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젖혀 아슬아슬하게 피하고는 그대로 뻗어온 상대의 팔을 잡아 몸을 둥글게 말며 그를 집어 던졌다. 반동에 더해진 힘에 날아가버린 상대는 그대로 바닥에 구르다 벽에 부딪히기 직전에 멈췄다. 완전히 공격을 피하지는 못했는지, 턱이 조금 아렸다. 다 피한 줄 알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아츠시는 자세를 다잡고 달려오는 상대의 배에 주먹을 내질렀다. 아츠시의 주먹에 맞은 상대는 그대로 벽에 부딪히고는 주르륵 주저앉았다. 이걸로 끝이려나, 그렇게 생각하던 아츠시는 뒤에서 날아오는 발을 미처 보지 못하고 그대로 얻어맞고 말았다. 제법 묵직한 신발 굽이 아츠시의 볼을 스치며 상처를 남겼다. 욱신거리는 볼에서 배어나오는 피를 손가락으로 닦아낸 아츠시가 상대에게 반격하려는 때, 호각소리가 들리고 루시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자,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상처가 난 사람들은 치료받고 쉬세요!"
"감사합니다!!"

아츠시는 가만히 자신의 볼을 만지작거리다 큰 상처가 아니라 방으로 돌아가서 씻고 쉬려고 했다. 그런 그를 붙잡은 건 루시였다. 그녀는 아츠시의 목덜미를 덥썩 잡은 채 그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의무실로 그를 데려갔다. 요사노의 앞에 강제로 앉혀지고서야 아츠시는 루시를 쳐다보며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루시는 그의 말은 무시한 채 요사노에게 아츠시를 치료해달라고 했다. 요사노는 루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츠시의 볼에 소독약을 바르고는 밴드를 붙여주었다. 아츠시는 두 사람을 번갈아가면서 쳐다보다가 결심한 듯 질문을 던졌다.

"제 상처는 반나절만 있으면 나을 정도로 가벼운 상처인데 왜 일부러 치료해주셨죠?"
"가벼운 상처도 가볍게 보면 안 된단다. 알고 있잖니?"
"그건 보통 사람들의 경우잖아요. 저는 보통 사람들하고는 다르다고요."
"아츠시…."
"말해주세요. 뭐가 있는 거죠? 쿄카, 쿄카 때문인가요?"

아츠시의 물음에 두 사람은 답을 하지 못했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였다. 쿄카의 상태가 이상해진 것과 그들이 굳이 자신을 치료해준 것은 분명히 관계가 있었다. 대답해주세요. 거듭 채근하는 아츠시의 말에 요사노는 한참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옆에서 루시는 당황한 목소리로 그녀를 말리려고 했지만, 요사노는 어차피 곧 싫어도 알게 될 일이라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어렵사리 얘기를 꺼냈다. 사실 쿄카는 그대와 같은 하프가 아니라 순혈 뱀파이어라네, 아츠시군. 그녀의 담담한 말은 아츠시의 귀에 꽂혀 그대로 사고를 정지시켰다. 쿄카가, 여태껏 같은 처지라고 생각했던 쿄카가 하프가 아니라고? 그 뒤에 나온 요사노의 말에 아츠시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아직 인간의 피를 먹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확실하게 뱀파이어로 각성 중이라고 했다.

"쿄카가…그래서 요즘 저를 멀리했군요…?"
"그대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았을 게야."
"…왜죠?"
"그야, 지금까지 같은 종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존재가 충격을 받고 등을 돌릴까봐 그렇겠지."
"…저는 쿄카를 버리지 않아요!"
"그럼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게 좋겠지."
"어디에 있죠? 요즘 방에도 안 들어오는 것 같던데.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시죠?"

요사노는 미간을 찌푸리다 쿄카가 있는 곳을 말해주었다. 그 장소를 듣자마자 아츠시는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지하 감옥에 있네. 그대들이 처음 란포를 만난 곳 말이야. 그 차가운 곳에 간 지 며칠이 되었는지, 그것까지 요사노는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쿄카가 훈련을 나오지 않게 된 때를 거슬러 가보면 최소 사흘 이상은 그 곳에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마음 같아서는 란포를 한 대 치고 싶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쿄카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뱀파이어의 각성. 눈 앞에서 본 적은 없지만 자기를 쫓는 자들이 도대체 누구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문헌을 뒤지다가 어렴풋이 본 적이 있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이 나고, 죽이고 싶은 충동과 그것을 억누르려는 이성이 충돌하는 상태라고 했다. 그 충동을 안정시키려면 피를 주면 된다고 했었다. 그것이 무엇의 피인지는 상관이 없었지만, 각성 중이나 각성을 한 다음에 인간의 피를 입에 대면 다시는 인간 외의 생물의 피는 먹지 못하게 된다고도 써 있었다. 그저 지금은 쿄카가 무사하기만을 바라며 아츠시는 지하 감옥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감옥에 도착한 그가 본 것은 벽에 이어진 사슬에 묶인 채 기진맥진한 쿄카였다.

'문호스트레이독스 > 망향(望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망향 26.  (0) 2016.10.17
망향 24.  (0) 2016.09.11
망향 23.  (0) 2016.09.10
망향 22.  (0) 2016.09.08
망향 21.  (0) 2016.08.13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9. 11. 00:41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24.

=========================

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 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

쿠니키다의 부름에 서둘러 도착한 다른 엑소시스트들이 발견한 것은 사육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의 기둥에 그려진 붉은 마법진이었다. 사람의 발길도 잘 닿지 않는 곳이라 더욱 알기 힘들었던 것 같다. 그 마법진의 모양을 베껴 그린 뒤 원래 있던 마법진을 지워버린 엑소시스트들은 수도원에 다시 한 번 결계를 펼쳤다. 후에 쿠니키다의 메모를 건네받은 다자이는 낯익은 모양에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건 츄야가 자주 쓰는 소환진이야."
"츄야?"
"자네가 만났다던 그 주황색 머리의 뱀파이어 말이지. 좀 독특한 버릇이 있거든."

다자이는 소환진 끝에 그려진 문양을 가만히 보다가 종이를 접어서 그대로 태워버렸다. 쿠니키다는 모처럼 발견한 증거에 무슨 짓이냐고 했지만, 다자이는 덤덤하게 재를 허공에 날려보내며 이 소환진은 형태가 보존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침입할 수 있는 물건이라고 말했다. 누가 이 소환진을 이용해서 오갔느냐가 중요한 거지만, 애석하게도 사육장에는 피비린내만이 남아있었다. 단서가 될 만한 향기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들을 찾아야 하는가?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다자이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쿠니키다군, 덫을 준비하지."
"하아? 갑자기 무슨 소리냐."
"이런 짓을 하고 다니는 범인을 잡아들이자는 거야."
"…방법이 있나?"
"뭐, 백퍼센트 통할 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없지는 않지."
"믿어도 되나?"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있고? 어차피 타깃은 여기 만이 아니야."

아마 츄야라면 하마오 영감님을 구워삶아서 란포씨가 후원하고 있는 곳의 리스트 정도는 손에 넣었겠지. 다자이의 말에 쿠니키다는 팔짱을 낀 채 그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퍼뜩 떠오른 것이 있는 듯 급히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쿠니키다가 돌아가고 나서 다자이를 찾아온 건 요사노였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란포도 더이상 고집은 부리지 못했다. 얼마 만에 집무실로 돌아가는 건지. 물론, 돌아가자마자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다자이, 상황은 어때?"
"쿠니키다군이 보고하지 않았어?"
"종이 위의 보고는 언제나 늦잖아. 네가 파악한 걸 말해."
"아마 여기 말고 다른 곳에도 소환진이 뿌려졌을거야."
"최악의 경우는?"
"이즈미 쿄카의 각성으로 이쪽이 정신 없는 틈을 타서 동시다발적으로 수도원들을 습격하는 것."
"가능성은?"
"80퍼센트 정도."
"…이즈미 쿄카는 내가 맡을게."
"그럼 나는?"

란포는 다자이를 물끄러미 보다 지시를 내렸다.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서 전투에 임하라고. 자신의 몸을 건 명령이었지만 다자이는 그것을 어길 수 없었다. 부디 몸 조심하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다자이는 조용히 연기가 되어 란포의 집무실에서 빠져나갔다. 란포는 다자이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을 보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것은 다분히 원망이 섞인 투덜거림이었다.

"망할 놈들. 쉴 시간은 줘야 할 것 아냐."

―.

이즈미 쿄카는 요즘들어 자신의 몸 상태가 예전과는 다른 것을 느끼고 있었다. 루시가 온 이후로 전투훈련의 강도가 세지긴 했지만 체력이 붙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충분히 그 정도는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신을 차리면 의무실에 누워 있는 날이 늘었다. 그럴 때면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목은 바짝 타들어갔다. 미친 듯한 갈증을 해소하지 못한 그녀가 앓는 소리를 내면 요사노가 달려와 그녀에게 물과 붉은 알약을 주었다. 그것을 받아먹으면 서서히 속이 가라앉았고, 정신이 돌아왔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하지만 요즘은 어쩐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삼키기 직전에 입 안에 퍼지는 옅은 비린 맛은 가끔 상처가 났을 때 저도 모르게 입에 물었던 손가락에서 났던 그 맛과 닮아있었다. 피. 신기하게도 자신을 진정시키는 것은 피였다.

왜 피를 먹으면 진정이 될까? 아츠시는 한 번도 혈액을 섭취한 적이 없다. 적어도 쿄카가 아는 한은 그랬다. 그런데 자신은 왜?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이유는 알 수 있었다. 그녀, 이즈미 쿄카는 나카지마 아츠시와는 다른 종족이었던 것이다. 그저 아츠시가 자신은 하프이며 너도 그런 것 같다고 말해서 그 말을 믿었을 뿐이다. 단 하나의 확률에 기댔을 뿐이다.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이가 하나 더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진정되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츠시의 그 말이 오히려 쿄카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아츠시는, 하프, 같은 처지에 있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을 지켜주었다. 하지만, 사실은, 똑같지않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아츠시는 자신을 어떻게 대할까?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쿄카는 더없이 불안해졌다. 하루라도 빨리 이 능력을 컨트롤 해야했다. 아츠시에게, 자신이 그를 위협하던 그 종족이라는 것을 알려서는 안 됐다. 하지만 쿄카의 그런 결심을 비웃듯, 본능은 무서운 속도로 그녀를 잠식해갔다.

'문호스트레이독스 > 망향(望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망향 26.  (0) 2016.10.17
망향 25.  (0) 2016.10.10
망향 23.  (0) 2016.09.10
망향 22.  (0) 2016.09.08
망향 21.  (0) 2016.08.13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9. 10. 00:34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23.

=========================

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 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

―또야.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훈련생들은 사육장 앞에 모여있었다. 한 훈련생의 보고를 받은 쿠니키다가 급하게 사육장 쪽으로 달려왔다. 사육장 안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닭은 목을 전부 비틀려 죽어있었고, 바닥에는 핏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핏자국이 이동한 흔적은 없었으나, 다른 동물들도 몇 마리가 사라져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쿠니키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훈련생들에게 돌아가라고 말하고는 다자이와 루시를 불렀다. 쿠니키다의 호출에 나온 둘은 사육장을 보면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쿠니키다는 한숨을 내쉬며 둘에게 물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나?"
"…인간의 짓은 아니군."
"자, 그럼 둘 중 누구지?"
"우리를 의심하는 거예요?"
"여기서 내가 아는 인외의 존재는 다자이놈과 루시 자네, 그리고 아츠시와 꼬마 계집 정도야."
"그래서, 하프가 아니니까 우리를 의심한다?"
"그렇다."
"아아, 란포씨를 향한 충성심 만큼이나 쿠니키다군의 머리가 돌아가면 좋을텐데."
"뭐라고?"

다자이는 미간을 찌푸린 채 언성을 높이는 쿠니키다를 손을 가볍게 들어 저지하고는 자신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대며 쉿, 이라고 말했다. 목소리가 커지면 다른 사람들이 들을 염려가 있어. 이어지는 그의 말에 쿠니키다는 끓는 한숨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다자이는 차분히 그의 얘기에서 나오는 맹점들을 짚어나갔다. 첫째, 자신은 이미 계약자가 있는 상태라 굳이 동물의 피를 섭취할 필요가 없으며, 둘째, 루시는 피를 동물용 수혈팩으로 공급받는다. 그러니 적어도 우리 둘은 아니라는 말에 쿠니키다는 역성을 냈다. 가능성이 가장 높은 저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다자이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던 루시는 가만히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별로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쿄카가 아닐까요?"
"…그 꼬마가?"
"각성이 시작됐을 수도 있죠."
"…각성이라니?"
"뭐야, 다자이씨. 말 안 했어요?"
"…아차."
"아차? 아차라니. 그럼, 그 꼬마는 하프가 아니란 말이냐?"
"그렇다네. 이즈미 쿄카는 뱀파이어야."
"그렇게 중요한 사실을 왜 말하지 않았나!"
"말했다면 자네가 그녀를 평범하게 대할 수 있었을까, 쿠니키다군?"

다자이의 질문에 쿠니키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인외, 그것도 뱀파이어를 가장 싫어하는 자신이 이 둘과 일을 하고 있는 건 전부 자신을 거두어 준 란포씨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태도가 호의적인가, 라고 하면 그건 빈말로라도 그렇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그들에게 지켜줄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는 가장 사무적으로 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쿠니키다는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요령 좋게 숨기지 못했다. 확실히 이즈미 쿄카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자신의 태도 때문에 다른 학생들이 눈치챘을 수도 있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쿠니키다는 그들의 결정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조금 숙이고 생각에 잠긴 쿠니키다를 보던 다자이는 눈웃음을 짓다가 루시를 쳐다보았다.

"루시,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뭐지?"
"그게 말이죠. 누구도 그 애가 진짜 몇 살인지 모르잖아요?"

그랬다. 이즈미 쿄카는 겉으로는 열네살 정도의 외모를 가진 여자아이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성장을 멈춘 시기를 알려주는 지표일 뿐이었다. 누구도 이즈미 쿄카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는 알지 못했다. 운이 좋게도 각성을 하기 전이라 다자이가 조금씩 각성을 지연시킬 수 있었지만, 그 잠금장치는 얼마 전에 방문했던 츄야때문에 부서져버렸다. 루시는 한숨을 내쉬면서 어깨를 으쓱이고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각성을 할 때는 엄청난 열과 함께 갈증을 느끼고, 그래서 주변에 있는 생물의 피를 갈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에 쿄카가 훈련 중에 몇 번인가 쓰러진 적이 있다는 말까지 들은 쿠니키다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다자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한 번 사육장 안을 둘러보다가 깨달은 것이 있는 듯 피식 웃었다.

"과연, 그렇군."
"다자이씨?"
"다자이?"
"이건 외부인의 소행이야."
"어떻게 장담하지? 이 곳은 결계가 쳐져있다."
"쿠니키다군, 우리는 인간들보다 오래 사는 존재네. 결계를 깨는 방법 하나도 모를까."
"…설마!!"
"얼마 전에 자네가 만났다던 그 뱀파이어가 뭐라도 해두었겠지."
"…빌어먹을!!"
"지금이라도 엑소시스트들을 불러서 수도원을 샅샅이 뒤지고 결계를 다시 치는 게 좋지 않을까?"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흩은 쿠니키다는 곧 등을 돌리고 성큼성큼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다자이는 그가 가고도 쪼그려앉아 한참을 사육장 바닥에 있는 지푸라기들을 손으로 흩었다. 루시는 그런 그를 보다가 그의 옆에 쪼그려 앉아 그의 행동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다자이는 그런 그녀를 보다가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쿠니키다에게는 하지 않았던 말들을 꺼냈다. 이즈미 쿄카는 살해된 뱀파이어의 뱃가죽을 찢고 나왔네. 다자이의 말에 루시는 바닥을 훑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처음 듣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태어난 뱀파이어는 없었다. 뱀파이어라고 해도, 인간인 상태에서 뱀파이어의 피를 주입받아 변화하지 않는 이상 인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성장을 거친다. 물론, 개체차도 엄연히 존재하기에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죽은 이의 뱃가죽을 찢고 나왔다니, 그 말은 이미 나왔을 때부터 어느 정도 성장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게 말이 돼요?"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네. 뒷조사를 좀 했거든."
"그럼, 그 애 때문에 죽은거예요? 엄마는?"
"아니, 그건 아니네."
"…죽은 엄마의 몸 속에서 스스로 살아남았다?"
"그렇지."
"이 애가 돌아서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되면 더 위험해지기 전에 내가 처리할 생각이야."
"아츠시군은요?"
"위험요소가 된다면 마찬가지지."
"참 아무렇지 않게 말하네요."

루시는 다자이의 말에 질린 표정으로 그를 보다 고개를 돌려 다시 바닥을 뒤적거렸다. 다자이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는 발을 옮겨 그 자리를 구둣발로 몇 번 짓이겼다. 그러자 조금 뒤에 파인 흙 사이에서 작은 손가락 뼈가 나왔다. 그것을 손으로 집어든 다자이는 대충 상황을 알겠다는 듯 콧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는 여전히 쪼그려 앉은 채 그를 올려다보다 조금 뒤에야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좋은 거라도 찾았어요?"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이 있다는 증거를 찾았지. 누군지는 뻔하지만."
"듣지 않아도 알 것 같네요."
"그렇지? 쿄카 쪽은 맡겨둘게. 잘 좀 감시해줘, 루시."
"뭐어, 어디까지 막을 수 있을 지는 몰라요."
"너무 걱정은 마. 대책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니까."
"대책이요? 뭐가 있어요? 각성 중에는 이성도 자주 날아가는데."
"…설득해야지."

조금 전에 한 말은 귓등으로 흘려넘겼나? 하는 표정을 짓는 루시를 보던 다자이는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발로 흩어진 지푸라기들을 정리하고 수도원으로 향했다. 루시는 입꼬리를 내리며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수도원의 결계를 깨지 않고 들어와 닭을 전부 비틀어 죽이고, 닭의 서식지에 손가락 뼈를 심어두었다. 그건 일종의 주술이자 경고였다. 주술으로써의 목적은 실패했지만, 경고는 충분히 먹혀들었다. 쿠니키다는 전국에 흩어져 있던 엑소시스트들 중 몇명을 불러들였고, 결계를 강화할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도원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문호스트레이독스 > 망향(望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망향 25.  (0) 2016.10.10
망향 24.  (0) 2016.09.11
망향 22.  (0) 2016.09.08
망향 21.  (0) 2016.08.13
망향 20.  (0) 2016.08.10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9. 8. 02:06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22.

=========================

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 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

아침 일찍 일어나 의무실의 문을 연 요사노는 먼저 도착한 손님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자이는 혈액팩이 들어있는 냉장고를 가만히 뒤지다가 뒤에서 느껴지는 매서운 시선에 그제야 머쓱하게 고개를 돌리고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조금 삐딱하게 서서 다자이를 노려보던 요사노는 그가 냉장고에서 한 걸음 물러서자 성큼성큼 걸어가 냉장고의 문을 잠그고 옆에 놓인 자물쇠를 다시 걸었다. 그가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 이유는 안 봐도 뻔했다. 이제 막 정신을 차린 란포에게 피라도 내놓으라고 했던 거겠지. 물론 그의 전투가 격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란포가 피를 쏟아낼 정도였으니, 그에게도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 란포가 그대를 쫓아 내던가?"
"그렇죠, 뭐. 한동안 결계를 쳐둘 것 같아서요."
"이번엔 얼마나 갈 것 같나?"
"글쎄요. 제가 란포씨는 아니니까 말이죠."
"그러게 뻔히 어찌 나올 지 알면서 왜 그랬나, 그대도 참…."

요사노의 핀잔에 다자이는 힘없이 웃고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마 란포에게 그 말을 할 때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이런 적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란포에게 가끔 무리한 요구를 하면 그는 으레 다자이를 쫓아내고는 결계를 쳐버리곤 했다. 다자이는 억지로 그 결계를 깨거나 한 적은 없다. 그 정도로 살았다면 분명히 결계를 깨는 방법쯤은 알고 있을텐데도, 그는 의외로 얌전히 란포의 화가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얼마나 버틸지 장담할 수 없었다. 츄야와의 싸움으로 빠져나간 체력을 단기간에 회복하려면 그에게는 란포가 필요했다. 그 사실을 아는 요사노는 머리를 긁적이며 침대에 누워있는 다자이에게 말했다.

"뭐, 일단은 그대도 상태가 좋지 않아보이니 얘기는 해보지."
"아, 감사합니다."
"단, 내가 없는 사이에 저 혈액들을 건드리면…. 알지?"
"네, 물론이죠."
"그럼 잠이라도 좀 자게."
"다녀오세요."

힘없이 손을 흐느적거리다 곧 잠에 빠진 다자이를 본 요사노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의무실을 나섰다. 또각, 또각. 맑은 구두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긴 복도를 지나 란포의 집무실로 들어간 요사노는 책상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란포를 빤히 보았다. 좀 더 쉬어야 할 상태인데 보는 눈이 없다고 이를 악물고 자리에 앉은 모습이 눈에 그려져 요사노는 그의 책상으로 걸어가 그대로 손에서 펜을 뺏고 서류를 덮었다. 란포는 뭐라고 말하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멋쩍은 미소를 지은 채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요사노는 그런 그를 빤히 보다가 표정의 변화 없이 문 너머를 가리켰고, 란포는 다른 말은 하지 않은 채 일어나 문 너머의 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일이 신경쓰이는지 집무실 쪽을 흘끗거리는 란포를 보던 요사노는 작게 헛기침을 해 그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옆에 누가 없으면 그렇게 바로 일에 몰두하는 것도 나쁜 버릇이네, 란포."
"음, 하지만 이미 밀린 일이 산더미야, 아키."
"…란포."

요사노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그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다. 그제야 란포는 머리를 긁적이며 얌전히 침대에 앉았다. 일은 다자이가 대신 하면 될 것을. 그렇게 중얼거리는 요사노의 목소리를 들은 란포는 그녀에게 팔을 맡긴 채 입술을 비죽이 내밀고는 불만을 터뜨렸다.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린 사람에게 피를 달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냐는 말에 요사노는 손가락을 들어 가만히 란포의 이마를 튕겼다. 란포는 그녀에게 맞은 이마를 가만히 손으로 가리고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린 사람이 일을 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누?"
"…잘못했어."
"게다가 얘기를 듣자하니 옛날 꿈을 꿨다고?"
"…다자이가 그래?"

쓸데 없는 짓을. 란포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주치의에게 있어 그것은 결코 쓸데없는 정보는 아니었다. 특히 지금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욱 그랬다. 대외적으로 란포는 나이가 조금 젊은 편이라는 것을 빼면 흠잡을 데 없는 추기경이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그래서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약한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아니,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그의 정신상태가 흔들릴만한 일은 바로 얘기하도록 다자이에게 얘기해왔었다. 옛날 꿈, 분명히 그 푸른 눈의 뱀파이어가 란포의 집을 습격했을 때의 기억이겠지. 요사노는 자기가 내민 죽을 절반 정도 비우고 약을 삼키고 자리에 누운 란포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주었다. 그를 발견했던 날은 정말로 하늘이 도왔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란포는 이미 산소결핍에 며칠간 아무 것도 먹지 못한 탓에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걸 겨우 정신을 붙들게 하고서야 데려와 치료를 해주었다. 아마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시체를 수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뒤로 란포는 아직도 어둡고 좁은 곳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불빛이 없으면 잠이 들지 못한다. 하지만 이 사실은 주치의인 자신과 최측근인 다자이를 제외하고 아는 사람은 없어야 했다. 그것이 란포가 선택한 길이었다.

"좀 더 완벽하게 보이고 싶다면 지금은 일단 자두게."
"…응."
"그리고 그대, 몸 상태가 좋아지면 수혈을 좀 해야할 것 같네."
"…그거 아픈데."
"그럼 결계를 풀던가."
"그건 아직 안 돼."
"선택의 여지가 없구만. 다자이도 저대로 두면 위험하니 말이지."
"…참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야."
"둘 다 말이지."

요사노의 한숨섞인 핀잔에 란포는 머쓱하게 웃고는 눈을 감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가 고른 숨을 내쉬는 것을 확인한 요사노는 그의 집무실에서 나와 가만히 기지개를 켰다. 집무실의 복도에서 내려다보이는 운동장에서는 정신없이 얽혀 공격을 주고받는 훈련생들이 보였다. 전보다 필사적인 표정에, 필살을 위한 행동들이 그리 머지 않아 피투성이의 전투를 겪게 될 것이라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았다. 요사노는 가만히 자기 손을 내려다보다 조용히 성호를 그었다. 이 손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구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아멘. 짧은 기도를 끝낸 그녀는 한참을 더 운동장을 내려다보다 의무실로 돌아갔다.


'문호스트레이독스 > 망향(望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망향 24.  (0) 2016.09.11
망향 23.  (0) 2016.09.10
망향 21.  (0) 2016.08.13
망향 20.  (0) 2016.08.10
망향 19.  (0) 2016.08.09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8. 13. 02:09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21.

=========================

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 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

소년은 아수라장 속에 있었다. 숨을 죽이고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소년의 녹색 눈동자에는 바닥에 가득한 피와 순식간에 말라 비틀어져버린 부모의 시체와, 싸늘한 푸른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뱀파이어가 비쳤다. 들켜서는 안된다. 좁은 틈새로 눈이라도 마주칠까 떨었다. 그는 입가를 가린 채 콜록거리며 가게의 모든 물건들을 전부 박살내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그게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은 기억이었다. 그는 누구였을까, 우리 부모님은 왜 습격당한 걸까. 우리 집은 왜 그렇게 되었어야 했는가. 소년은 숨을 죽인 채 끊임없이 속으로 되뇌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하던 생각은 완전한 어둠이 찾아드는 것과 동시에 끊겼다.

.
.
.

"란포씨, 란포씨."
"…!!"

조용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란포는 눈을 크게 뜨고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반사적으로 이불을 끌어올리고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 바람에 링거가 덜컹거렸다. 다자이는 손을 뻗어 링거를 잡고는 가만히 이불 위를 토닥여주었다. 조금 뒤에야 진정이 되었는지 란포는 가만히 숨을 고르며 이불을 걷었다. 다자이의 커다란 손이 가만히 머리를 쓸어주자 그제야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이 들지는 못했다. 눈을 감으면 다시 눈앞에 그 장면이 어른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란포는 다시 눈을 떠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일 뿐이었다.

"가위에 눌리는 것 같더라."
"…옛날 꿈을 꿨어."

나지막이 말하는 란포를 보던 다자이는 일어나서 컵에 따뜻한 물을 받아왔다. 다자이가 건넨 컵을 받아 한 모금 마신 란포는 입 안에서 맴도는 은은한 달콤함에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다자이는 빙긋이 웃고는 란포의 어깨를 토닥여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란포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천천히 컵에 담긴 물을 전부 마시고는 컵을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그리고는 다시 누운 뒤에야 다자이를 향한 불만을 하나씩 뱉어냈다.

"죽는 줄 알았어."
"미안해."
"내가 신경쓰여서 못 싸울까봐 피해준 거긴 한데."
"알고 있어."
"…속이 다 아프네."
"많이 힘들었지?"

란포가 투덜거리는 말들을 받아주며 다자이는 식은 땀으로 젖은 란포의 이마를 닦아주고는 조금 더 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란포는 고개를 젓고는 시선을 돌려 방을 이리저리 살펴볼 뿐이었다. 가구를 하나하나 확인하는 모양새에 다자이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나쁜 꿈을 꿨으니 무리도 아닌가 싶었다. 하나씩 가구에 새겨진 세월을 확인하고 안심하던 란포는 자동으로 넘어가는 달력을 보고 반사적으로 일어나 앉았다. 어느새 달이 바뀌어 있었다. 아니, 얼마나 잠들었던 거야. 란포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다자이에게 물었다.

"나, 며칠이나 잠들어 있었어?"
"란포씨? 한 사흘 정도?"
"…맙소사."
"위에는 몸살이 났다고 말해뒀어."
"…그건, 그건 고맙네."
"아직 새벽이니까 조금 더 쉬어. 지금 속도 엉망이야."

요사노에게 들은 말을 전해주며 다자이는 다시 그를 눕혔다. 자신의 전투가 생각보다 부담이 되었는지 란포는 사흘간 제대로 눈도 뜨지 못했다. 다자이와의 계약 덕분에 요사노의 능력으로는 완벽하게 치유를 하지 못해 그녀는 응급처치만을 겨우 해둔 정도였다. 맥을 짚어본 그녀는 다자이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그들 사이의 관계를 가장 잘 아는데다 란포를 곁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켜봐 왔기에 더 애가 탔을 것이다. 아니, 애가 타는 것을 넘어 속이 탄 그녀는 매 시간마다 란포의 방에 들러 그의 상태를 체크하곤 했다. 아마 그녀가 없었다면 회복하는 데에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다자이는 가만히 침대에 앉아서 베개에 몸을 기댄 란포에게 말했다.

"요사노 선생님이 고생 많이 했어."
"…아키에겐 항상 신세만 지네."
"그걸 알면 사고 좀 덜 치지 그러나, 란포."
"…아키."
"몸은 좀 어떤가?"
"아직 속이 좀 아프지만 다른 데는 괜찮은 것 같아."
"그건 다행이구만."

요사노는 란포에게는 별 다른 말은 하지 않고 고생했다는 말만을 건넸다. 란포는 그 말을 듣고서도 한참 뒤에야 링거를 정리하고 있는 그녀에게 작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을 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요사노는 그 한마디를 말하기가 그렇게 힘들어 어떡하느냐고 말하며 웃고는 오늘까지는 푹 쉬라며 방을 나섰다. 다자이는 그녀가 나가는 것을 보다가 란포의 손을 가만히 잡아 주사바늘이 꽂혔던 자리를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조금 아쉬워보이는 눈빛에 란포는 미간을 찌푸리며 옆에 놓여있던 베개를 들어서 다자이에게 휘둘렀다. 얼굴을 얻어맞은 다자이는 란포를 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어라, 내 생각 들켰어?"
"아주 노골적으로 보고 있잖아. 숨길 생각도 없지?"
"아니, 어쩐지 조금 아쉬워서 말이야."

에너지도 이미 엄청 써버려서 요즘 조금 힘든데. 다자이는 눈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란포는 질색하며 그를 몇 대 더 때렸다. 태연하게 란포의 주먹을 받아낸 다자이는 그를 토닥여주며 농담이라고 말했지만, 이미 란포는 마음을 굳혔는지 눈을 감고 기도를 시작했다. 란포의 기도를 듣던 다자이는 속이 불편해지는 느낌에 벌떡 일어나 란포의 방을 벗어났다. 그와 동시에 란포의 방문이 닫히고 안에서 걸쇠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 다자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한동안 눈치 좀 봐야겠네."


'문호스트레이독스 > 망향(望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망향 23.  (0) 2016.09.10
망향 22.  (0) 2016.09.08
망향 20.  (0) 2016.08.10
망향 19.  (0) 2016.08.09
망향 18.  (0) 2016.08.08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8. 10. 01:18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20.

=========================

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 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

요사노의 호출에 수도원으로 돌아온 다자이는 입구에서부터 나는 피냄새에 미간을 찌푸리곤 란포의 방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방 문을 열자마자 피냄새는 더욱 진해졌다. 바닥에는 아직 채 마르지도 않은 피가 흥건했으며, 피가 잔뜩 묻어버린 이불은 의미없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란포는 링거를 꽂은 채 침대에 누워 거칠게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가끔 끓는 소리에 이어 거친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요사노는 계속해서 란포의 식은땀을 닦아주며 그의 맥박을 체크하고 있었다. 다자이는 가만히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선생님."
"…왔는가."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회의에 다녀 온 뒤라네. 그 전까지는 호출당할 일이 없지 않았는가."
"…그렇군요."

갑작스럽게 비상 호출이 울려 와보니 란포가 말도 못하고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는 말에 다자이는 원인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오버로드(overload)였다. 인간과 계약을 하고 나면 뱀파이어는 그 인간의 힘을 받아서 평소보다 강한 힘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도 한계는 있으며, 힘을 제공하는 인간의 몸에는 상당히 부담이 가는 것이었다. 오늘 츄야를 상대하면서 그의 힘을 지나치게 많이 끌어다 쓴 모양이다. 게다가 매료안까지 평소보다 강하게 썼으니, 란포에게 과부하가 걸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마지막에 매료안이 풀려버린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다자이는 손을 들어 란포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 손길에 란포는 흐릿하게 눈을 뜬 채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말은 하지 못한 채 마른기침만을 뱉어낼 뿐이었다.

"…란포씨는 제가 재우겠습니다."
"수액은 계속 맞춰두게. 지금 몸 상태가 엉망이야."
"알겠습니다."

덤덤하게 대답하는 다자이를 보던 요사노는 일어나서 그의 등을 세게 한 번 후려치고는 란포의 방을 나갔다. 나중에 제대로 한 소리 듣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다자이는 엉망이 된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피투성이가 된 시트는 소각로에 넣어버리고, 바닥에 흥건한 피를 닦아내며 다자이는 틈틈이 란포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그의 호흡은 그 사이에 찬찬히 정리되었고, 곧 안정적인 숨소리가 돌아왔다. 정리를 끝내고 그가 다시 의자에 앉았을 때에는 란포는 눈을 감고 있었다. 다자이는 그런 그를 지켜보다 옆에 앉아 링거가 꽂힌 손을 가만히 잡은 채 중얼거렸다.

"미안해."

한편, 다자이가 돌아가고서도 한참 뒤에야 고개를 든 츄야는 가만히 아이코의 시체를 안아들었다. 몸을 돌고 있던 피마저 빠져나간 작은 몸은 평소보다도 가벼웠다. 이 작은 몸으로 그 공격을 어떻게 받아낼 생각을 했을까. 빚을 져버렸다. 갚을 수도 없는 빚이었다. 츄야는 그녀를 안은 채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밤거리를 지나 도착한 곳은 그녀가 홀로 살던 집이었다. 혼자 사는 살림살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그녀의 집은 단출했다. 침대에 가만히 그녀를 눕혀둔 츄야는 처음으로 들어와 본 그녀의 집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아담한 세간살이들이 눈에 들어오던 중에, 화장대에 놓인 모자가 하나 눈에 띄었다. 평소에 보던 그녀의 취향이 전혀 아닌 모자였다. 가끔 만날 때 마다 진짜 아저씨같다고 말하며 웃어대던 그런 모자였다. 츄야는 거울 앞으로 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는 그 모자를 가만히 눌러쓰곤 중얼거렸다.

"…바보 같은 여자."

이런다고 마음을 돌릴 줄 알았나. 아니, 그런 계산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적어도 자신을 대할 때에는 아무 계산도 하지 않았다. 그걸 잘 알기에 츄야는 모자를 받아가기로 했다. 침대 앞에 서서 내려다보는 그녀는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부디 다음 생에는 나같은 녀석은 만나지 마라. 그렇게 중얼거린 츄야는 손에 들고 있던 다른 모자를 그녀에게 씌워주고는 차가워진 볼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몸을 일으킨 츄야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아이코의 옷자락에 불이 붙었다. 그 불길은 점점 커지며 그녀를 조용히 삼켜갔다. 그녀가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가만히 보던 츄야는 등을 돌려 그녀의 집을 나왔다.

"…잘 가라."

마른 입술을 축이며 그렇게 말한 츄야는 다음 행동을 위해 움직였다. 자신의 흔적을 지워야했다. 아이코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의심의 화살은 가장 최근에 그녀를 만났던 자신에게 돌아오게 된다. 적어도 다자이에게 그녀의 목숨 값을 받아내기 전까지는 잡혀들어갈 수는 없었다. 정식 방문은 할 필요가 없었다. 조용히, 그리고 은밀하게 츄야는 함께 어울렸던 인간들에게서 그의 기억을 지워갔다. 불에 삼켜진 그녀와 함께, 나카하라 츄야는 완전한 이방인이 되었다. 그렇게 자신의 흔적을 전부 지우고 아쿠타가와의 저택에 돌아온 츄야는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가 아이코가 좋아하던 합주곡을 틀어놓고 와인을 잔에 따랐다. 갈 길 없는 한숨을 허공에 뱉으며, 츄야는 상대가 없는 건배를 하고는 취하지도 않는 술을 마셨다.


'문호스트레이독스 > 망향(望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망향 22.  (0) 2016.09.08
망향 21.  (0) 2016.08.13
망향 19.  (0) 2016.08.09
망향 18.  (0) 2016.08.08
망향 17.  (0) 2016.08.07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8. 9. 18:15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19.

=========================

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 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

츄야가 하마오 추기경과 함께 정례회의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네 번째가 되었다. 하마오는 제법 츄야를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츄야는 그런 그가 바보같다고 생각하면서도 태연하게 그의 앞에서는 사람 좋은 투자자 역할을 해냈다. 하마오는 자금의 출처는 묻지 않았다. 그저 그는 에도가와 란포가 가끔씩 보이는 행동만으로도 그를 완전히 끌어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에도가와 란포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츄야는 몇 번 그를 마주하고서 그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추기경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는지, 어떻게 지금까지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하마오는 아무리 용을 써도 에도가와 란포에게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만으로도 하마오는 제법 들떠있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상투적인 인사를 하고서 문을 열고 들어간 회의실에는 이미 란포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그렇게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이가 함께 있었다. 다자이 오사무. 백 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의 소재를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의 소재는 찾을 수 없었다. 반쯤 포기했을 때, 그의 소식을 접한 것이 칠여 년 전이었다. 그것도 교회의 소식지를 통해서였다. 그때의 기분을 어떻게 말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을까. 피붙이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다. 부모의 얼굴도 모른 채 그저 정신이 들었을 때부터 곁에 있었다. 그렇게 형제처럼 지내온 이가 갑자기 종교재판에 회부된다니. 날벼락같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저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무혐의로 풀려났을 때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그가 눈 앞에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아는 체를 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그저 남일 뿐이다.

"오늘은 드물게 일찍 나오셨군요."
"뭐, 이런 날도 있는 법이죠."
"뒤에 계신 분은?"
"아, 정례회의에는 처음이었던가요? 제 대자(代子)입니다."
"…호오? 에도가와 경이 대부(代父:세례와 견진을 받은 자에게, 장차 신앙 생활의 길잡이가 되어 줄 사람을 선정하여, 영적인 어버이와 같은 관계를 맺어 준 자)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다자이 오사무라고 합니다."
"두 분이 나이차이도 그렇게 많이 나보이지는 않는데…."
"신앙을 시작하는 데에 나이가 중요하지는 않지요."

하마오경이 산 증인 아니십니까? 지금도 노력 중이시고요. 하마오의 말을 웃으면서 받아친 란포는 민망함에 목이 벌개진 그를 보며 웃음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혼자서는 상대가 안 된다니까. 츄야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도착해 정례회의가 시작됐다. 이 주에 한 번씩 치러지는 회의에 뭐 그렇게 대단할 것이 있나 싶었지만, 의외로 회의는 길게 이어졌다. 세 시간 가량이 흐르고 회의가 끝났을 때는 이미 해가 져버린 뒤였다. 교황청에서 온 이들이 먼저 일어나서 나가자, 다른 추기경들도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까지 자리에 남아있던 것은 란포와 하마오 뿐이었다. 형식적으로 다음에 볼 때까지 건강하라는 인사를 하고 나온 란포는 오랫동안 앉아있어서 뻐근했던 몸을 기지개를 켜며 풀었다.

"으으, 정말 회의는 질색이야…."
"하하, 고생 많았어, 란포씨."
"그래서, 생각했던 대로지?"
"그러네. 지독한 냄새도 여전했고.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말이지."
"그거 미안하게 됐네."

감정이 실린 채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란포와 다자이는 고개를 돌려 계단 위를 바라보았다. 계단 위에서는 츄야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짜증이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란포는 눈을 깜박이며 그를 보다가 다자이를 쳐다보았다. 이미 자신의 정체를 알아챘음에도 시치미를 뚝 떼며 아는 사람이냐고 묻는 란포의 태연자약함에 짜증이 난 츄야는 작게 혀를 차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에도가와 경께서 개를 한마리 키운다더니 그게 사실인 모양이군요."
"…나카하라 경도 후각이 뛰어나시네요."
"잠시 당신의 개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뭐, 어렵지는 않지만, 조심하세요."
"…?"
"우리 집 개는 당신을 무척 싫어하는 모양이라."

날이 선 미소를 지은 채 다자이에게 먼저 들어가겠다고 말한 란포는 그대로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다자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계단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 츄야를 쳐다보았다. 란포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계단에서 내려온 츄야는 다자이의 옆에 나란히 섰다. 의외로 다자이는 먼저 츄야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장소를 옮기자고 제안을 할 뿐이었다. 주변에 누가 지나갈 지 모르는 트인 장소에서 얘기를 길게 나누는 것도 딱히 달갑지는 않았기에 츄야는 다자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둘은 인기척이 없는 다리 밑에 도착할 때까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리 근처에 쌓여있는  콘크리트 더미에 자리를 잡고 나서 먼저 말을 꺼낸 건 다자이였다.

"그래서, 무슨 용건인데?"
"네가 동족들을 죽였냐?"
"응."
"왜 그랬어?"
"왜? 왜냐고?"

그 이유를 제일 잘 아는 이가 나에게 묻는건가, 츄야? 다자이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다시 한 번 내가 너희들을 등지고 나온 이유를 알려줘야 하나? 그렇게 말하는 다자이의 목소리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아직도, 그 인간을 잊지 못한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츄야는 씁쓸한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들어온 다자이의 공격에 급하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슬아슬하게 피한 공격은 뺨을 스쳐 볼을 타고 피가 흘렀다. 볼에 남은 미적지근한 온기를 닦아낸 츄야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얘기도 안 끝났는데 공격이라니, 너무한 거 아냐?"
"딱히 할 말이 많은 건 아니잖아? 우리 사이에. 얘기는 진작에 할 만큼 했지."

츄야는 새삼스럽게 란포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우리 집 개는 당신을 무척 싫어하는 모양이라. 그래서 문답무용이라는 거냐, 다자이. 바로 질러들어오는 그의 주먹을 막으며 츄야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그런 생각을 할 틈은 없었다. 다자이의 앞에서는 방심도 약점으로 이어졌기에, 츄야는 그의 배를 걷어차 날리고는 자세를 고쳐잡았다. 한참을 밀려난 다자이는 그에게 얻어맞은 배를 살짝 쓸어내리고는 피식 웃었다. 그 뒤는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이기는 놈이 진리요, 살아남는 놈이 진실인 목숨을 건 싸움이 시작되었다.

다자이와 츄야, 두 사람의 실력을 비교해 보자면 격투술의 파괴력과 사용하는 기술 자체는 츄야가 위였다. 하지만 다자이는 자신이 가진 고유능력과의 연계가 제법 좋았다. 매료안을 활용해 움직이는 것은 다자이가 조금 더 뛰어나, 츄야는 조금씩 자신의 시간축이 어긋나며 공격이 빗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내내 쓰고 있던 모자를 집어던져 다자이의 시야를 가린 츄야는 그대로 중심을 낮추고 주먹을 내질러 다자이의 명치를 가격했다. 쿨럭, 컥. 츄야의 정권에 맞고 바닥에  나뒹군 다자이는 고통스러운 숨을 뱉었다. 땅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 먼지를 털며 츄야는 그대로 다자이의 목을 꺾어버리기 위해 발을 찍어내렸지만, 다자이는 간발의 차이로 몸을 굴려 그 공격을 피했다. 구두 뒤축에 스친 목에서는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실력은 녹슬지 않았네. 오히려 발전한 것 같은데, 츄야?"
"그런 말 들어도 하나도 기쁘지 않거든?"
"그러게, 나도 네 성장을 봐도 전혀 기쁘지 않아. 힘을 좀 더 써야하니까."

가볍게 한숨을 내쉰 다자이는 뜨뜻미지근한 느낌에 가만히 목을 만져보고는 손가락에 묻어나온 피를 핥았다. 으엑, 맛없어.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혀를 내민 그는 가볍게 목을 돌리고는 츄야를 마주보며 웃었다. 서로 피는 한번씩 봤으니, 이걸로 마찬가지네. 그렇게 말하는 다자이의 오오라는 약간 섬뜩해, 츄야는 저도 모르게 조금 물러나 그를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붉은 눈에 츄야는 마른 침을 삼켰다. 하지만 다자이는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그를 보던 츄야가 내린 결론은 선수필승이었다. 당하기 전에 쳐야했다. 츄야는 손 끝을 날카롭게 세워 바닥을 박차고는 그대로 다자이에게 찔러들어갔다. 그 사이를 막아선 건, 아이코였다. 그녀를 찌르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빗겨나가게 한 츄야는 생각지도 못한 이의 등장에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이코?"
"이 사람을 괴롭히지 말아요!"
"…무슨 소리야?"

갑작스러운 등장에 이은 그녀의 말에 츄야는 맥이 풀렸다. 도대체 아이코가 왜 여기에 있는가부터 시작해 그녀는 지금 왜 나를 막아섰는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다자이는 자신에게 팔짱을 낀 채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팔에 볼을 부비는 그녀를 무심하게 보다가 빙긋이 웃으며 아이코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손길에 아이코는 어느 때보다 기쁜 미소를 지으며 다자이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의 츄야를 본 다자이는 손가락을 들어 가만히 그녀의 턱을 간질이며 말했다.

"손을 좀 썼거든. 지금 그녀에겐 내가 너로 보이지."
"…뭐…라고?"
"눈치채지 못했던 모양인데, 그녀는 우리가 교회를 나서는 순간부터 따라오고 있었거든."
"…네 녀석, 그래서 일부러 걸었던 거냐!"
"뭐, 그랬지."
"……."
"내가 마냥 앉아서 당하기만 할 리가 없잖아?"
"…네 놈."

다 알고 있어, 츄야. 그녀가 너를 좋아하는 것도, 네가 그걸 이용하는 것도. 다자이는 가소롭다는 듯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츄야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물론 그도 아이코의 감정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감정을 받아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먹이일 뿐이다. 그래서 츄야는 거리를 둔 채 그녀를 다리 삼아 인간들과 소통을 하고 있었다. 아이코는 얼핏 보기에는 가벼워보였지만 제법 헌신적이었다. 츄야의 먹잇감을 조달해온 것도 그녀였고, 그 뒤치다꺼리를 해준 것도 그녀였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감사하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해줄 수 없지만, 그녀가 죽을 때까지 함께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자이는 그것을 간단히 뒤집어버렸다. 아이코의 목덜미를 가만히 손가락으로 쓸며 미소짓던 다자이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츄야를 보았다.

"이 상황,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뭐?"
"많이 닮았네. 네가 가장 무력했던 때랑."
"…너, 설마 일부러…."
"네가 아니라 아쿠타가와였다면 좀 더 괴로워했을까?"
"…이미 백 년도 더 된 일이야."
"그래서? 잊으라고?"
"미련을 털 때도 되지 않았냐."
"오, 아니, 그건 아니지. 소중한 것을 뺏겼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잊겠어."

다자이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손톱을 세워 아이코의 목에 천천히 찔러넣었다. 하지만 아이코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건가? 이미 그녀에게 다자이가 자기로 보인다는 말은, 눈을 직접 마주치지 않고도 그녀를 홀릴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자이의 매료안이 저렇게까지 강해졌단 말인가. 아까는 대자, 대부라고 하더니 그게 아니라 계약자 관계였나. 츄야가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다자이의 손톱은 그녀에게 조금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대로 두었다간 그녀의 목이 부러질 것이다. 츄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의 앞으로 도약해 다자이의 손목을 잡고는 아이코의 목에서 손을 떼게 했다. 다자이는 덤덤하게 츄야에게 잡힌 손목을 보더니 역으로 손목을 돌려잡고는 그대로 그의 팔을 꺾었다. 예전의 다자이라면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풀 수 있었지만, 지금 그는 매료안을 포함해 모든 능력치가 상승한 것 같았다. 츄야의 짧은 비명소리를 들은 다자이는 피식 웃고는 그대로 그를 던지듯 밀어내고는 손톱을 날카롭게 세워 츄야의 심장을 향해 찔러들어갔다. 이대로 끝인가, 싶은 생각에 츄야는 눈을 감았지만 다자이의 손톱은 그의 심장을 관통하지 못했다.

"…괜…찮ㅇ…?"
"…아이코!!"
"…다행…이다."

다자이의 손톱이 찔러버린 것은 츄야가 아닌 아이코의 심장이었다. 그새 매료안이 풀린 건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혀를 차며 손을 거둔 다자이는 손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츄야는 눈 앞에서 힘없이 쓰러지는 아이코를 받치고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심장이 뚫린 아이코는 검붉은 피를 토해내며 츄야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츄야는 가만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투성이 손이 힘겹게 올라와 츄야의 입술에 닿았다 그대로 땅으로 떨어졌다. 츄야는 힘없이 떨어져버린 손을 잡은 채 미동도 않았다. 이대로 그를 처치해버리면 끝날 일이었다.

[RRRR….]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다자이는 작게 혀를 차고는 발신인을 확인했다. 요사노 아키코였다. 이 시간에 웬일이지 싶어 전화를 받은 다자이는 다급한 요사노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가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은 채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 츄야를 쳐다보았다. 운이 좋았네, 그렇게 말한 다자이는 츄야를 한 번 무심하게 쳐다보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사라졌다. 츄야는 그 뒤로도 한참을 아이코를 품에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다.


'문호스트레이독스 > 망향(望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망향 21.  (0) 2016.08.13
망향 20.  (0) 2016.08.10
망향 18.  (0) 2016.08.08
망향 17.  (0) 2016.08.07
망향 16.  (0) 2016.08.07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8. 8. 23:59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18.

=========================

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 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

"요즘, 하마오 영감님이 아주 짜증나게 구는데 말이지."

집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모자와 영대를 벗어던진 란포는 전용 의자에 몸을 푹 묻고 앉아 사탕을 하나 꺼내 물었다. 그리고는 달콤함이 퍼지기 전에 신경질적으로 사탕을 깨물었다. 정확하게 하마오 추기경이 수도원에 왔다 간 이후였다. 그는 그 이후로 묘하게 신경이 거슬리는 발언들을 하며 회의가 있을 때마다 란포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 자리에서 물의를 일으킬 수는 없기에 란포는 태연하게 받아치거나 무시해버리곤 했지만, 신경줄을 살살 긁어오는 기분은 참을 수 없었다. 일부러 오독오독 소리를 내며 사탕을 씹어삼킨 란포는 그대로 사탕막대를 자근자근 물면서 책상을 가만히 두드렸다.

"그 영감님 혼자선 나이를 먹어서 머리가 그렇게 잘 돌아가진 않을거란 말이야? 역시 그 남자인가? 그렇지?"

누군가에게 대답을 바란 말은 아니었다. 그저 란포는 혼자서 정신 나간 사람마냥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마오 에이스케의 옆에 어느날 부터인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그 남자가 하마오가 자신을 번거롭게 만들도록 하고 있음은 틀림이 없었다. 그 전까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노려보기만 하던 사람이 그 남자가 붙은 이후부터 야금야금 제동을 걸어왔다. 둘을 떼어놓아야 했다. 그리고 그건 시간이 빠르면 빠를 수록 편해질 것이다. 빈 종이에 깃펜을 들어서 의미없이 선을 긋던 란포는 펜을 내려놓고는 아까부터 소파에 앉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다자이를 보았다.

"다자이."
"응?"
"다음 회의에는 너도 가자."
"어라, 그래도 괜찮아? 종교재판 이후로 안 데리고 다녔으면서."
"네가 확인해야 할 게 있어."
"뭐, 란포씨의 지시라면야."

그렇게 말하며 다자이는 사탕상자에 손을 집어넣는 란포의 입에 생강쿠키를 물려주었다. 입에 퍼지는 알싸한 생강의 맛에 미간을 찌푸린 란포는 슬쩍 혀로 과자를 밀어내며 거부의사를 보였지만, 다자이는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 억지로 담백하고 알싸한 과자를 다 먹어치운 란포는 등 뒤에 있던 쿠션을 꺼내서 다자이에게 집어던지고는 방으로 연결된 문을 열고 들어갔다. 평소보다 더 짜증이 나있는 모습에 어깨를 으쓱인 다자이는 가만히 그를 따라 들어가 머리맡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는 이미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쓴 란포를 보았다.

"란포씨?"
"왜."
"왜 이렇게 짜증이 나있어."
"다 들었잖아. 하마오 에이스케."
"뭐, 주된 원인은 알았지만, 그 옆에 누가 붙어있는데?"
"아마도 아츠시가 봤다던 그 뱀파이어겠지. 인상착의가 비슷했어."
"…호오."
"그리고 하마오 영감보다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 같더라."

이불 속에서 웅얼거리던 란포는 화가 뻗친 듯 고개를 다시 불쑥 내밀며 짜증을 냈다. 다자이는 손을 들어 가만히 그를 토닥여주다 이마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이제 그만 자는게 내일을 위해 좋겠어. 그렇게 말하며 다자이가 란포의 이마를 두어 번 두드리자, 란포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잠에 빠졌다. 방의 불을 전부 끄고 조금 떨어진 자신의 자리에 놓인 간이 테이블의 램프를 켠 다자이는 다리를 꼬고 앉아 두꺼운 교양서적을 넘기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란포의 말대로라면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츄야일 것이다. 며칠 전에 수도원에 방문했던 것도 그 녀석일 것이다. 란포는 일부러 그때 스케줄을 잡아 자신을 대동해 나가버렸지만, 그가 있던 자리에는 희미하나마 좋아하지 않는 냄새가 남아있었다. 그러고보니 쿄카를 보고 갔다고 했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다자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긁적였다.

"이 이상 건드리면 망가질텐데…."

쿄카에게 더이상 손을 쓸 수는 없었다. 생각 외의 곳에서 한 대 맞은 기분에 다자이는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순순히 당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에게 이 빚을 돌려주는 게 효율적일까? 결론을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란포가 생각하는 것만큼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아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저 그가 몸에 익힌 것이라면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과 요령 좋게 상대를 구워삶는 처세술 정도겠지. 그 덕분에 하마오는 겨우 그를 지지대 삼아 주저앉아 있던 늙은 몸을 일으켜 란포에게 삿대질을 해대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 지지대가 스스로 늙은이를 떠나게 만들면 되는 것이다. 다자이는 읽던 책을 덮고는 램프를 끄고 눈을 감은 채 빙긋이 웃었다.

"다음에 만날 때가 기대되는걸, 츄야."


'문호스트레이독스 > 망향(望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망향 20.  (0) 2016.08.10
망향 19.  (0) 2016.08.09
망향 17.  (0) 2016.08.07
망향 16.  (0) 2016.08.07
망향 15.  (0) 2016.08.07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8. 7. 17:37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17.

=========================

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 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

다음날, 갑작스러운 견학 요청서를 받은 쿠니키다는 란포에게 전화를 걸었다. 투박한 내선전화의 연결음이 들리고 조금 뒤에 전화를 받은 란포는 다소 졸린 듯한 목소리였다. 잠이 덜 깨신 건가, 그게 아니라면 새벽미사를 끝내고 졸고 계셨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쿠니키다는 본론을 말했다. 투자를 위해 시설을 보고싶다며 견학 요청이 왔는데 어떻게 하느냐는 말에 란포의 목소리가 조금 바뀌었다.

[헤에, 견학 요청? 누가?]
"하마오 에이스케 추기경님입니다."
[하마오..? 아, 그 영감님이구만. 보나마나 물어뜯을 게 없나 하는 거겠지.]
"훈련은 어떻게 하죠?"
[뭐, 하루 정도 쉬어도 문제 될 건 없잖아?]
"...알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지하실에서라도 전투 훈련을 계속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욕심이라는 것은 쿠니키다도 알고 있었다. 하마오 에이스케는 대놓고 에도가와 란포를 자리에서 밀어내려고 하는 사람이었기에, 그에게 책을 잡혀서 좋을 것은 없었다. 어디서 어떻게 훈련을 하든 그에게 들킨다면 분명히 불온분자라는 이유로 란포를 재판대에 올리고 이단심문을 받게 만들 것이다. 이미 다자이가 한 번 재판대에 올랐던 적이 있다고 했으니, 다음이 란포가 될 것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쿠니키다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훈련생들을 모아 일정을 말했다.

"내일은 교황청에서 추기경님이 방문하시므로 전투 훈련은 없다."
"추기경님이요? 란포님 말고요?"
"그래, 다른 분이 오실거다. 그리고 내일 하루는 전투에 대한 것은 일절 말하지 말도록. 또, 전투훈련이 없다고 기도와 이론수업이 없는 것은 아니니 너무 즐거워하지도 말고."
"네에."

잠시나마 쉴 수 있다는 말에 들뜬 분위기를 잔소리로 가라앉히고 쿠니키다는 아츠시와 쿄카, 켄지를 따로 조용히 불렀다. 하마오 추기경의 방문 인원은 2명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혼자서 오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그가 혹여나 이종족인 그들에게 의심을 갖게 된다면 골치가 아픈 일이었다. 쿠니키다의 사무실에 모인 그들은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곧, 문이 열리고 루시까지 들어오자 쿠니키다는 본론을 꺼냈다.

"내일 오는 사람은 란포님의 정적이다."
"정적..이요?"
"그래, 뭐 교회에서 이런 말을 쓰는 게 웃기긴 하지만 그렇게 표현하는 게 가장 정확하겠지. 그러니 너희들은 각별히 조심해야한다."
"...저희가 인간이 아니라서요?"
"응, 맞아. 하지만 조심하라는 건 단지 란포씨를 위해서만은 아니겠지."
"무슨 뜻이에요?"
"너희들도 위험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켄지는, 이종족을 눈감아주고 있었다는 이유라도 붙일 수 있겠지."

루시는 이미 쿠니키다가 걱정하는 것을 눈치챈 듯, 나머지는 자기가 이야기 하겠다며 양해를 구하고는 모두를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그녀는 조금 오래 된 이야기를 꺼냈다. 그건 다자이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 당시 종교신문은 온통 그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고 한다. 다자이라는 인물은 누구인가, 어디서 온 지도 모르고 연고지도 모르는 인물을 에도가와 추기경은 왜 받아들였는가. 거기에 소문이 붙어 하루에 몇 명을 홀려서 잡아먹었다더라, 인간이 아니라더라 하는 말들이 도처에 퍼져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사실인 것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날조였다. 그러나 그는 종교재판에 부쳐졌다. 종교재판이란 교회와 신의 이름으로 교회에 위협이 되거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판단되는 이들의 처신을 어떻게 할 지 정하는 재판이다.

"뭐, 대부분은 유죄로 판결이 나지만."

짧게 말을 덧붙인 루시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이단심문 판결이 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책에서 읽은 이단심문의 끔찍한 과정에 대해 하나씩 나열해갔다. 처음엔 손톱을 뽑고, 그 다음은 손가락을 꺾는다. 그렇게 손발톱을 모두 뽑고 나면 그 다음은 치아, 안구, 그리고 종내는 거죽을 벗겨낸다고 했다. 실제로 그 모든 과정을 겪고 살아남은 이는 아직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루시의 말을 들은 아츠시들은 가만히 몸을 떨었다. 루시의 말이 끝나자 쿠니키다는 헛기침을 해서 주의를 환기시킨 후 말을 했다.

"그러니 너희들은 각별히 조심해라. 질문을 들어도 적당히 넘겨라. 곤란할 때는 우리가 도와주마."
"....감사합니다."
"내일은 제법 피곤한 하루가 되겠네요."
"뭐, 버티는 수밖에 없지. 그럼 가서 쉬어라."

아츠시들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쿠니키다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루시가 말해준 고문의 내용이 내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그 말을 해준 이유는 루시가 말한 종교재판에 부쳐질 가능성이 높아서겠지. 어쩌면 인간이 가장 무서운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얘기들을 나눈 그들은 곧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츠시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며 차라리 날이 밝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속도 모르는 해는 다음 날도 방을 밝혀주었다.

방문객이 온 것은 조금 늦은 오후였다. 땅거미가 질 즈음 찾아온 추기경과 방문객은 원장수녀의 안내를 받으며 수도원의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생각보다 깔끔한 시설과 얌전히 공부만 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에 하마오는 다소 짜증이 섞인 표정을 지었고, 방문객은 흥미로운 눈으로 학생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곧 원장수녀의 소개로 쿠니키다와 만난 그들은 형식적인 이야기들을 했다. 쿠니키다는 방문객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얼마 전 공항에서 만났던 그가, 지금 여기에 있었다. 도대체 왜? 하마오 에이스케와 무슨 접점이 있는 거지? 속으로 그렇게 머리를 굴리는데 방문객이 웃었다.

"신부님, 얘기에 집중을 못 하시네요."
"아닙니다. 계속 말씀하세요."
"뭐, 이 수도원은 다른 곳보다는 깔끔한 것 같네요."
"란포님이 신경을 많이 써주시니까요."
"호오, 그렇군요. 조금 더 둘러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편하게 둘러보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가시죠, 추기경님."
"아아, 그러지요."

방문객과 하마오가 방을 나서자마자, 쿠니키다는 소파에 몸을 푹 묻고 앉아 놀란 속을 진정시켰다. 지금 저 자도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하마오는 란포의 꼬투리를 잡아 그를 재판에 부칠 생각일 것 같지만 저 자가 뱀파이어인 것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하마오를 역으로 잡아넣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무슨 수로 증명한단 말인가? 추측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과거 다자이가 이단심문에 부쳐질 뻔 했을 때 이 점을 이용했던 사람이 에도가와 란포였기에 쿠니키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당장은 그저 아무 일이 없이 지나가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츄야는 쿠니키다를 보고 이 곳 어딘가에 다자이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하마오와 함께 훈련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교실로 들어갔다. 훈련생들은 그들을 한 번 쳐다보고는 곧 교사의 지시에 따라 다시 수업을 시작했다. 아츠시는 츄야를 보자마자 놀라 자빠질 뻔 했지만 겨우 자신을 다잡고 필기를 시작했다. 오히려 켄지가 조금 더 침착해보였다. 츄야는 잠깐 그 둘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려 아까부터 신경쓰였던 훈련생의 옆으로 걸어갔다. 짙은 남색의 머리를 양갈래로 내려묶은 소녀는 그가 온 줄도 모르고 필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하지만 지금 츄야가 확인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음, 꼬마 아가씨, 이름이 뭐야?"

옆에서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쿄카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츄야의 눈은 어느새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한 쿄카는 눈을 크게 뜨며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이름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조금 뒤, 쿄카는 교실 바닥으로 쓰러져버렸다. 떨어지는 그녀의 몸을 붙잡은 츄야는 쿄카를 의무실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아츠시가 먼저 일어나서 그녀를 안아들고는 교실을 나갔다. 쿄카를 안아든 순간 츄야를 노려본 아츠시의 눈에는 남모를 살기가 담겨있었다. 츄야는 그들이 나가고서야 소동을 일으켜 미안하다고 말하곤 교실을 나섰다. 하마오에게는 요령 좋게 사과를 하면서도 츄야는 속으로 웃었다. 처음 살펴볼 때부터 신경쓰였던 그녀는, 아주 재미있는 소재였다. 다자이가 그녀를 어떻게든 묶어두려고 한 흔적도 발견했다. 이름은 아직 듣지 못했지만, 그녀는 계획에 아주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수도원은 흠잡을 곳은 없네요. 다른 곳을 파고들어보죠."
"...나카하라 경의 판단이 그렇다면, 좀 더 찾아봅시다."

하마오가 이 곳을 무너뜨리게 공작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필요한 조건은 갖춰져 있다. 어느 정도 손도 써 두었다. 나머지는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알아서 흔들릴 것이다. 그렇게되면 좋든 싫든 다자이는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자신이 해야할 일은 저들이 무너질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 그리고 에도가와 란포가 이곳에 신경 쓸 틈이 없도록 그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다음 목표가 정해진 츄야는 하마오와 또 다른 날 만나기를 약속하고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문호스트레이독스 > 망향(望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망향 19.  (0) 2016.08.09
망향 18.  (0) 2016.08.08
망향 16.  (0) 2016.08.07
망향 15.  (0) 2016.08.07
망향 14.  (0) 2016.08.06
Posted by 스위스무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