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8. 10. 01:18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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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 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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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노의 호출에 수도원으로 돌아온 다자이는 입구에서부터 나는 피냄새에 미간을 찌푸리곤 란포의 방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방 문을 열자마자 피냄새는 더욱 진해졌다. 바닥에는 아직 채 마르지도 않은 피가 흥건했으며, 피가 잔뜩 묻어버린 이불은 의미없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란포는 링거를 꽂은 채 침대에 누워 거칠게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가끔 끓는 소리에 이어 거친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요사노는 계속해서 란포의 식은땀을 닦아주며 그의 맥박을 체크하고 있었다. 다자이는 가만히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선생님."
"…왔는가."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회의에 다녀 온 뒤라네. 그 전까지는 호출당할 일이 없지 않았는가."
"…그렇군요."

갑작스럽게 비상 호출이 울려 와보니 란포가 말도 못하고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는 말에 다자이는 원인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오버로드(overload)였다. 인간과 계약을 하고 나면 뱀파이어는 그 인간의 힘을 받아서 평소보다 강한 힘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도 한계는 있으며, 힘을 제공하는 인간의 몸에는 상당히 부담이 가는 것이었다. 오늘 츄야를 상대하면서 그의 힘을 지나치게 많이 끌어다 쓴 모양이다. 게다가 매료안까지 평소보다 강하게 썼으니, 란포에게 과부하가 걸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마지막에 매료안이 풀려버린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다자이는 손을 들어 란포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 손길에 란포는 흐릿하게 눈을 뜬 채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말은 하지 못한 채 마른기침만을 뱉어낼 뿐이었다.

"…란포씨는 제가 재우겠습니다."
"수액은 계속 맞춰두게. 지금 몸 상태가 엉망이야."
"알겠습니다."

덤덤하게 대답하는 다자이를 보던 요사노는 일어나서 그의 등을 세게 한 번 후려치고는 란포의 방을 나갔다. 나중에 제대로 한 소리 듣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다자이는 엉망이 된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피투성이가 된 시트는 소각로에 넣어버리고, 바닥에 흥건한 피를 닦아내며 다자이는 틈틈이 란포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그의 호흡은 그 사이에 찬찬히 정리되었고, 곧 안정적인 숨소리가 돌아왔다. 정리를 끝내고 그가 다시 의자에 앉았을 때에는 란포는 눈을 감고 있었다. 다자이는 그런 그를 지켜보다 옆에 앉아 링거가 꽂힌 손을 가만히 잡은 채 중얼거렸다.

"미안해."

한편, 다자이가 돌아가고서도 한참 뒤에야 고개를 든 츄야는 가만히 아이코의 시체를 안아들었다. 몸을 돌고 있던 피마저 빠져나간 작은 몸은 평소보다도 가벼웠다. 이 작은 몸으로 그 공격을 어떻게 받아낼 생각을 했을까. 빚을 져버렸다. 갚을 수도 없는 빚이었다. 츄야는 그녀를 안은 채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밤거리를 지나 도착한 곳은 그녀가 홀로 살던 집이었다. 혼자 사는 살림살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그녀의 집은 단출했다. 침대에 가만히 그녀를 눕혀둔 츄야는 처음으로 들어와 본 그녀의 집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아담한 세간살이들이 눈에 들어오던 중에, 화장대에 놓인 모자가 하나 눈에 띄었다. 평소에 보던 그녀의 취향이 전혀 아닌 모자였다. 가끔 만날 때 마다 진짜 아저씨같다고 말하며 웃어대던 그런 모자였다. 츄야는 거울 앞으로 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는 그 모자를 가만히 눌러쓰곤 중얼거렸다.

"…바보 같은 여자."

이런다고 마음을 돌릴 줄 알았나. 아니, 그런 계산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적어도 자신을 대할 때에는 아무 계산도 하지 않았다. 그걸 잘 알기에 츄야는 모자를 받아가기로 했다. 침대 앞에 서서 내려다보는 그녀는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부디 다음 생에는 나같은 녀석은 만나지 마라. 그렇게 중얼거린 츄야는 손에 들고 있던 다른 모자를 그녀에게 씌워주고는 차가워진 볼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몸을 일으킨 츄야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아이코의 옷자락에 불이 붙었다. 그 불길은 점점 커지며 그녀를 조용히 삼켜갔다. 그녀가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가만히 보던 츄야는 등을 돌려 그녀의 집을 나왔다.

"…잘 가라."

마른 입술을 축이며 그렇게 말한 츄야는 다음 행동을 위해 움직였다. 자신의 흔적을 지워야했다. 아이코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의심의 화살은 가장 최근에 그녀를 만났던 자신에게 돌아오게 된다. 적어도 다자이에게 그녀의 목숨 값을 받아내기 전까지는 잡혀들어갈 수는 없었다. 정식 방문은 할 필요가 없었다. 조용히, 그리고 은밀하게 츄야는 함께 어울렸던 인간들에게서 그의 기억을 지워갔다. 불에 삼켜진 그녀와 함께, 나카하라 츄야는 완전한 이방인이 되었다. 그렇게 자신의 흔적을 전부 지우고 아쿠타가와의 저택에 돌아온 츄야는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가 아이코가 좋아하던 합주곡을 틀어놓고 와인을 잔에 따랐다. 갈 길 없는 한숨을 허공에 뱉으며, 츄야는 상대가 없는 건배를 하고는 취하지도 않는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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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