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8. 9. 18:15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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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 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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츄야가 하마오 추기경과 함께 정례회의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네 번째가 되었다. 하마오는 제법 츄야를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츄야는 그런 그가 바보같다고 생각하면서도 태연하게 그의 앞에서는 사람 좋은 투자자 역할을 해냈다. 하마오는 자금의 출처는 묻지 않았다. 그저 그는 에도가와 란포가 가끔씩 보이는 행동만으로도 그를 완전히 끌어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에도가와 란포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츄야는 몇 번 그를 마주하고서 그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추기경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는지, 어떻게 지금까지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하마오는 아무리 용을 써도 에도가와 란포에게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만으로도 하마오는 제법 들떠있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상투적인 인사를 하고서 문을 열고 들어간 회의실에는 이미 란포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그렇게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이가 함께 있었다. 다자이 오사무. 백 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의 소재를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의 소재는 찾을 수 없었다. 반쯤 포기했을 때, 그의 소식을 접한 것이 칠여 년 전이었다. 그것도 교회의 소식지를 통해서였다. 그때의 기분을 어떻게 말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을까. 피붙이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다. 부모의 얼굴도 모른 채 그저 정신이 들었을 때부터 곁에 있었다. 그렇게 형제처럼 지내온 이가 갑자기 종교재판에 회부된다니. 날벼락같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저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무혐의로 풀려났을 때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그가 눈 앞에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아는 체를 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그저 남일 뿐이다.

"오늘은 드물게 일찍 나오셨군요."
"뭐, 이런 날도 있는 법이죠."
"뒤에 계신 분은?"
"아, 정례회의에는 처음이었던가요? 제 대자(代子)입니다."
"…호오? 에도가와 경이 대부(代父:세례와 견진을 받은 자에게, 장차 신앙 생활의 길잡이가 되어 줄 사람을 선정하여, 영적인 어버이와 같은 관계를 맺어 준 자)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다자이 오사무라고 합니다."
"두 분이 나이차이도 그렇게 많이 나보이지는 않는데…."
"신앙을 시작하는 데에 나이가 중요하지는 않지요."

하마오경이 산 증인 아니십니까? 지금도 노력 중이시고요. 하마오의 말을 웃으면서 받아친 란포는 민망함에 목이 벌개진 그를 보며 웃음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혼자서는 상대가 안 된다니까. 츄야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도착해 정례회의가 시작됐다. 이 주에 한 번씩 치러지는 회의에 뭐 그렇게 대단할 것이 있나 싶었지만, 의외로 회의는 길게 이어졌다. 세 시간 가량이 흐르고 회의가 끝났을 때는 이미 해가 져버린 뒤였다. 교황청에서 온 이들이 먼저 일어나서 나가자, 다른 추기경들도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까지 자리에 남아있던 것은 란포와 하마오 뿐이었다. 형식적으로 다음에 볼 때까지 건강하라는 인사를 하고 나온 란포는 오랫동안 앉아있어서 뻐근했던 몸을 기지개를 켜며 풀었다.

"으으, 정말 회의는 질색이야…."
"하하, 고생 많았어, 란포씨."
"그래서, 생각했던 대로지?"
"그러네. 지독한 냄새도 여전했고.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말이지."
"그거 미안하게 됐네."

감정이 실린 채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란포와 다자이는 고개를 돌려 계단 위를 바라보았다. 계단 위에서는 츄야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짜증이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란포는 눈을 깜박이며 그를 보다가 다자이를 쳐다보았다. 이미 자신의 정체를 알아챘음에도 시치미를 뚝 떼며 아는 사람이냐고 묻는 란포의 태연자약함에 짜증이 난 츄야는 작게 혀를 차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에도가와 경께서 개를 한마리 키운다더니 그게 사실인 모양이군요."
"…나카하라 경도 후각이 뛰어나시네요."
"잠시 당신의 개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뭐, 어렵지는 않지만, 조심하세요."
"…?"
"우리 집 개는 당신을 무척 싫어하는 모양이라."

날이 선 미소를 지은 채 다자이에게 먼저 들어가겠다고 말한 란포는 그대로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다자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계단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 츄야를 쳐다보았다. 란포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계단에서 내려온 츄야는 다자이의 옆에 나란히 섰다. 의외로 다자이는 먼저 츄야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장소를 옮기자고 제안을 할 뿐이었다. 주변에 누가 지나갈 지 모르는 트인 장소에서 얘기를 길게 나누는 것도 딱히 달갑지는 않았기에 츄야는 다자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둘은 인기척이 없는 다리 밑에 도착할 때까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리 근처에 쌓여있는  콘크리트 더미에 자리를 잡고 나서 먼저 말을 꺼낸 건 다자이였다.

"그래서, 무슨 용건인데?"
"네가 동족들을 죽였냐?"
"응."
"왜 그랬어?"
"왜? 왜냐고?"

그 이유를 제일 잘 아는 이가 나에게 묻는건가, 츄야? 다자이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다시 한 번 내가 너희들을 등지고 나온 이유를 알려줘야 하나? 그렇게 말하는 다자이의 목소리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아직도, 그 인간을 잊지 못한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츄야는 씁쓸한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들어온 다자이의 공격에 급하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슬아슬하게 피한 공격은 뺨을 스쳐 볼을 타고 피가 흘렀다. 볼에 남은 미적지근한 온기를 닦아낸 츄야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얘기도 안 끝났는데 공격이라니, 너무한 거 아냐?"
"딱히 할 말이 많은 건 아니잖아? 우리 사이에. 얘기는 진작에 할 만큼 했지."

츄야는 새삼스럽게 란포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우리 집 개는 당신을 무척 싫어하는 모양이라. 그래서 문답무용이라는 거냐, 다자이. 바로 질러들어오는 그의 주먹을 막으며 츄야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그런 생각을 할 틈은 없었다. 다자이의 앞에서는 방심도 약점으로 이어졌기에, 츄야는 그의 배를 걷어차 날리고는 자세를 고쳐잡았다. 한참을 밀려난 다자이는 그에게 얻어맞은 배를 살짝 쓸어내리고는 피식 웃었다. 그 뒤는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이기는 놈이 진리요, 살아남는 놈이 진실인 목숨을 건 싸움이 시작되었다.

다자이와 츄야, 두 사람의 실력을 비교해 보자면 격투술의 파괴력과 사용하는 기술 자체는 츄야가 위였다. 하지만 다자이는 자신이 가진 고유능력과의 연계가 제법 좋았다. 매료안을 활용해 움직이는 것은 다자이가 조금 더 뛰어나, 츄야는 조금씩 자신의 시간축이 어긋나며 공격이 빗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내내 쓰고 있던 모자를 집어던져 다자이의 시야를 가린 츄야는 그대로 중심을 낮추고 주먹을 내질러 다자이의 명치를 가격했다. 쿨럭, 컥. 츄야의 정권에 맞고 바닥에  나뒹군 다자이는 고통스러운 숨을 뱉었다. 땅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 먼지를 털며 츄야는 그대로 다자이의 목을 꺾어버리기 위해 발을 찍어내렸지만, 다자이는 간발의 차이로 몸을 굴려 그 공격을 피했다. 구두 뒤축에 스친 목에서는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실력은 녹슬지 않았네. 오히려 발전한 것 같은데, 츄야?"
"그런 말 들어도 하나도 기쁘지 않거든?"
"그러게, 나도 네 성장을 봐도 전혀 기쁘지 않아. 힘을 좀 더 써야하니까."

가볍게 한숨을 내쉰 다자이는 뜨뜻미지근한 느낌에 가만히 목을 만져보고는 손가락에 묻어나온 피를 핥았다. 으엑, 맛없어.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혀를 내민 그는 가볍게 목을 돌리고는 츄야를 마주보며 웃었다. 서로 피는 한번씩 봤으니, 이걸로 마찬가지네. 그렇게 말하는 다자이의 오오라는 약간 섬뜩해, 츄야는 저도 모르게 조금 물러나 그를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붉은 눈에 츄야는 마른 침을 삼켰다. 하지만 다자이는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그를 보던 츄야가 내린 결론은 선수필승이었다. 당하기 전에 쳐야했다. 츄야는 손 끝을 날카롭게 세워 바닥을 박차고는 그대로 다자이에게 찔러들어갔다. 그 사이를 막아선 건, 아이코였다. 그녀를 찌르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빗겨나가게 한 츄야는 생각지도 못한 이의 등장에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이코?"
"이 사람을 괴롭히지 말아요!"
"…무슨 소리야?"

갑작스러운 등장에 이은 그녀의 말에 츄야는 맥이 풀렸다. 도대체 아이코가 왜 여기에 있는가부터 시작해 그녀는 지금 왜 나를 막아섰는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다자이는 자신에게 팔짱을 낀 채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팔에 볼을 부비는 그녀를 무심하게 보다가 빙긋이 웃으며 아이코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손길에 아이코는 어느 때보다 기쁜 미소를 지으며 다자이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의 츄야를 본 다자이는 손가락을 들어 가만히 그녀의 턱을 간질이며 말했다.

"손을 좀 썼거든. 지금 그녀에겐 내가 너로 보이지."
"…뭐…라고?"
"눈치채지 못했던 모양인데, 그녀는 우리가 교회를 나서는 순간부터 따라오고 있었거든."
"…네 녀석, 그래서 일부러 걸었던 거냐!"
"뭐, 그랬지."
"……."
"내가 마냥 앉아서 당하기만 할 리가 없잖아?"
"…네 놈."

다 알고 있어, 츄야. 그녀가 너를 좋아하는 것도, 네가 그걸 이용하는 것도. 다자이는 가소롭다는 듯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츄야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물론 그도 아이코의 감정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감정을 받아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먹이일 뿐이다. 그래서 츄야는 거리를 둔 채 그녀를 다리 삼아 인간들과 소통을 하고 있었다. 아이코는 얼핏 보기에는 가벼워보였지만 제법 헌신적이었다. 츄야의 먹잇감을 조달해온 것도 그녀였고, 그 뒤치다꺼리를 해준 것도 그녀였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감사하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해줄 수 없지만, 그녀가 죽을 때까지 함께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자이는 그것을 간단히 뒤집어버렸다. 아이코의 목덜미를 가만히 손가락으로 쓸며 미소짓던 다자이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츄야를 보았다.

"이 상황,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뭐?"
"많이 닮았네. 네가 가장 무력했던 때랑."
"…너, 설마 일부러…."
"네가 아니라 아쿠타가와였다면 좀 더 괴로워했을까?"
"…이미 백 년도 더 된 일이야."
"그래서? 잊으라고?"
"미련을 털 때도 되지 않았냐."
"오, 아니, 그건 아니지. 소중한 것을 뺏겼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잊겠어."

다자이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손톱을 세워 아이코의 목에 천천히 찔러넣었다. 하지만 아이코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건가? 이미 그녀에게 다자이가 자기로 보인다는 말은, 눈을 직접 마주치지 않고도 그녀를 홀릴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자이의 매료안이 저렇게까지 강해졌단 말인가. 아까는 대자, 대부라고 하더니 그게 아니라 계약자 관계였나. 츄야가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다자이의 손톱은 그녀에게 조금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대로 두었다간 그녀의 목이 부러질 것이다. 츄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의 앞으로 도약해 다자이의 손목을 잡고는 아이코의 목에서 손을 떼게 했다. 다자이는 덤덤하게 츄야에게 잡힌 손목을 보더니 역으로 손목을 돌려잡고는 그대로 그의 팔을 꺾었다. 예전의 다자이라면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풀 수 있었지만, 지금 그는 매료안을 포함해 모든 능력치가 상승한 것 같았다. 츄야의 짧은 비명소리를 들은 다자이는 피식 웃고는 그대로 그를 던지듯 밀어내고는 손톱을 날카롭게 세워 츄야의 심장을 향해 찔러들어갔다. 이대로 끝인가, 싶은 생각에 츄야는 눈을 감았지만 다자이의 손톱은 그의 심장을 관통하지 못했다.

"…괜…찮ㅇ…?"
"…아이코!!"
"…다행…이다."

다자이의 손톱이 찔러버린 것은 츄야가 아닌 아이코의 심장이었다. 그새 매료안이 풀린 건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혀를 차며 손을 거둔 다자이는 손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츄야는 눈 앞에서 힘없이 쓰러지는 아이코를 받치고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심장이 뚫린 아이코는 검붉은 피를 토해내며 츄야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츄야는 가만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투성이 손이 힘겹게 올라와 츄야의 입술에 닿았다 그대로 땅으로 떨어졌다. 츄야는 힘없이 떨어져버린 손을 잡은 채 미동도 않았다. 이대로 그를 처치해버리면 끝날 일이었다.

[RRRR….]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다자이는 작게 혀를 차고는 발신인을 확인했다. 요사노 아키코였다. 이 시간에 웬일이지 싶어 전화를 받은 다자이는 다급한 요사노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가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은 채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 츄야를 쳐다보았다. 운이 좋았네, 그렇게 말한 다자이는 츄야를 한 번 무심하게 쳐다보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사라졌다. 츄야는 그 뒤로도 한참을 아이코를 품에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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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