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고요?"
란포의 질문을 받아친 다자이는 그의 턱을 잡았던 손을 놓고 가만히 그의 어깨에 기대서는 오래된 얘기를 시작했다. 그건 란포도 익히 기억하고 있는 만남이었다. 당시 17세의 다자이는 소위 연기의 엘리트코스라고 불리는 학교를 다니면서 여러 오디션을 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란포가 작업하던 드라마 감독의 눈에 띄어 그 자리에서 단역으로 캐스팅되었다. 그 자리에서 만난 건 몇 명의 대선배님, 그리고 티비에서 가끔 봤던 선배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다자이는 사람의 환심을 사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도 어렵지 않게 녹아들 자신이 있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호감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그 사람은 자신을 이따금씩 굉장히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항상 느꼈던 비수같은 시선은 모두 그의 것이었고, 그 앞에서는 가면을 쓸 수 없다는 걸 다자이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심지어 그 사람은 아주 정확한 판단을 했다. 촬영 중에 잠깐 휴식을 하는 동안, 감독은 그에게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모양이다. 감독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배우로써는 성공할 것'이라고. 다자이는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를 그렇게 전부 꿰뚫어 본 건 선배가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날 그렇게 따라다녔다고?"
"네, 당신이라면 절 더 키워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처음부터 말했잖아요. 연줄은 상관없다고."
"....바보냐, 진짜."
"뭐라고 말해도 상관없어요."
"동경심이랑 연심을 착각하는 거 아냐?"
"내가 그것도 구분 못할 바보로 보여요?"
"응."
와, 진짜 너무하네. 처음부터 끝까지. 다자이는 벽을 짚고 있던 손을 그러쥐고는 이를 세워 란포의 목덜미를 물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다자이의 머리를 때리려던 란포는 그대로 한쪽 손목이 잡힌 채 다자이의 눈을 마주했다. 언제부터 다자이는 이렇게 진심이 된 걸까. 그 눈빛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었다. 그래, 다자이는 배우로 장성할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이 비어있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은 새로 들어오는 물질의 성질이 어떤 것이든지 온전히 제 안에 담을 수 있다. 그 성질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온전히 덮어쓸 수 있다. 그리고 분명히 다시 비울 수 있다. 걸리는 시간에는 개인차가 있겠지만 다시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면 또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게 된다. 가장 공허하고, 허무하기에 다른 사람을 연기할 수 있다. 란포가 처음에 다자이에게서 발견한 것은 그것이었고, 그것은 다자이 스스로도 느끼고 있는 자신의 본질이었다. 란포는 다른 손을 들어 가만히 다자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넌,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야."
"선배는 도망가고 있죠."
"그런 적 없어."
"지금 하고 있잖아요."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선배는 나에 대해 뭘 아는데요?"
"그만하자."
"그만할 수 없어요."
"다자이."
"선배."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란포는 끓는 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왜 이렇게 몰라줘요. 다자이는 애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란포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모르지 않아. 잘 알고 있어. 그래, 처음 시작은 그게 아니었다고 해도 그가 지금 갖고 있는 감정은 확실한 연심이었다. 앞길을 막고 싶지 않다. 내가 저 빈 그릇을 채워버리면, 그래서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멈춰버리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만이 가득했다. 다자이는 싸늘한 표정으로 눈을 감는 것으로 자신을 피해버린 란포를 보다가 그의 입술에 가만히 입술을 겹쳤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란 란포는 강하게 얽어들어오는 혀에 당황해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바둥거리며 눌린 소리를 내는 란포가 지칠 때까지 진득하게 키스를 하던 다자이는 란포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지자 그제야 혀를 떼고는 엉망으로 붉어진 얼굴을 마주했다. 울 것 같은 란포의 표정에 다자이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손목을 잡아두었던 손을 놓고 란포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선배."
"왜."
"찬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지으면 어떡해요. 차인 건 난데."
"...그러니까 처음부터 말했잖아. 다른 사람 찾으라고."
"이런 것까지 내다보고 있었어요?"
"맹목적으로 따르다보면 그런 일도 생기니까."
"그건…. 경험담이죠?"
"…그래."
사람이 사람을 좇다 보면 존경하는 감정이 애정과 혼동되기도 한다. 자신도 그랬던 적이 있다. 한참이나 위인 선배였다. 그가 나만 봐줬으면 했고, 나만 챙겨주었으면 했다. 그런 멋진 사람이 이미 자신을 챙겨주고 있는 것 부터가 특별하게 여겨져서, 정말로 이 사람과 특별한 사이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린 날의 감정일 뿐이라는, 그런 냉정한 말을 들었다. 한 순간의 감정이라면 이렇게 아플리가 없잖아. 그렇게 혼자 목놓아 울던 날이 있었다. 그 상처는 시간이 조금씩 무디게 만들어주었다. 일부러 일에 몰두했다. 누군가와는 필요 이상의 관계를 만들지 않았다. 까칠하다고 소문이 파다해져 일은 많이 들어오지 않았지만 사람이랑 얽힐 일은 많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대환영이었다. 열일곱살의 다자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게 충분히 가능했다. 그리고 란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에게서 옛날의 자신을 보았다. 그제야 그는 선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그건 정말 한때의 감정이다. 그 감정에 휩쓸려 자신을 잃어가는 후배를 잡아주는 게 그 선배에게 배운 선배로써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절할 수밖에 없다. 그래, 이걸로 됐어. 란포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다자이의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다자이는 그대로 한참을 떨어지지 않았다. 갑갑함을 견디다 못한 란포가 벗어나려고 하자 다자이는 그를 조금 더 세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런 말로는 포기 안해요."
"대체 왜."
"그거 알아요? 선배랑 나는 많이 닮았어요."
"...웃기지 마."
"이미 느꼈잖아요? 그래서 더 도망가고 있잖아."
"...집에 데려다 줄게."
"말 돌리지 마요. 그리고 대답해."
"...자꾸 말 끝이 짧아지네?"
"선배인 척 하지 말아요. 좀 더 솔직해지라고요."
내가 사고쳤다는 말에 왜 그렇게 급하게 달려온 건데요? 선배 그때 옷도 뒤집어 입었던 거 알아요? 다자이의 말에 란포는 입술을 꾹 다물 뿐이었다. 언제부터였더라,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저 끈질기고 귀찮은 후배라고만 생각했다. 그가 좋아한다는 말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어차피 진심일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수려한 용모를 가진 그에게 들어오는 역할이란 대개 인기가 많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역이었고, 그만큼 사랑에 보답하는 역할이 많았다. 그런 역할 때문에 습관이 몸에 배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가는 길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그가 비어있다는 걸 아니까. 마음에도 없는 자신을 연기하는 일은 쉽지 않다. 몇 번이고 겪었다. 지쳐서 죽고싶었던 적도 많다. 그래서 그에게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자기도 모르는 곳에서 죽어버릴까봐.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마음을 받아줄 생각은 없었지만서도. 하지만 밀어낸 만큼 들어오고, 들어온 만큼 밀어내는 사이에 그에게 시선을 들켰던 걸까? 란포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지않은 채 작게 말했다. 내가 졌어. 그건, 다자이에게만 들린 항복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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