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2. 16. 01:33
"란포씨 올 업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이제 철야도 없으니 실컷 자야지."

란포의 진심이 섞인 농담조의 말에 촬영장에는 웃음 꽃이 피었다. 란포는 스탭들이 준비한 꽃다발을 한아름 안아들었다. 여름에 시작했던 드라마도 어느새 반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종영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란포의 마지막 씬의 촬영이 끝난 날은 눈이 내리는 12월의 어느날이었다. 사실 날짜는 전부터 어림짐작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날이 되니 란포는 새삼스럽게 마음이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크게 다를 것도 없었는데. 주차장으로 내려오면서 핸드폰이 울리는 걸 느꼈지만 품에 가득한 꽃다발에 전화는 잠시 미뤄두었다. 이걸 버릴 수도 없고. 일단 차에 넣어두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종종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품이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걸음을 멈추고 보니 다자이가 제 꽃다발을 하나 빼앗아 들고 있었다.

"흐응, 많이도 받았네요. 선배 앞이 안 보일텐데."
"뭐?"
"이것 때문에 전화도 못 받은 거예요?"
"아, 너였어?"
"그럼 또 누가 있는데요."
"그것도 그러네."

다자이에게 꽃다발을 몇 개 넘기고 주머니에서 열쇠를 빼들어 차 문을 연 란포는 뒷좌석에 대충 꽃다발들을 쌓았다. 저번의 연기가 전파를 탄 이후로 촬영장에서도 란포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은 누그러진 데다 팬들도 조금 늘어 예전보다도 많은 꽃다발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대로 운전석에 앉은 란포는 다자이가 조수석에 앉은 걸 보고 조용히 차의 시동을 걸었다. 다자이는 피곤하지 않냐며 제가 운전하겠다고 말을 했지만 란포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 날, 그러니까 란포가 항복선언을 한 이후로 둘은 평소와 다를 바 없어보이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나날들을 보냈다. 둘이 오프가 겹치는 날이면 몇 번인가 드라이브를 나가기도 했다. 처음에 다자이가 집에 데려다 준 날은 철야때문에 금세 잠들어버려 몰랐지만, 다자이의 운전솜씨는 상당히 형편없었다. 그 뒤로 란포는 단 한번도 다자이에게 운전대를 맡기지 않았다.

"아, 진짜. 선배. 저 못 믿어요?"
"운전만큼은 절대."
"자주 안 해서 그런 거라니까. 그래도 좀 나아지지 않았어요?"
"너 때문에 차 보험처리 할 뻔 했던거 기억 안 나?"
"…으윽, 그렇게 나오시면 할 말이 없네요."
"어디로 갈 건지나 말해."
"음, 어디가 좋을까요?"
"생각 안 해놨어?"

글쎄요, 선배 집도 좋고, 우리 집도 좋고. 그렇게 말하며 다자이는 희미하게 웃었다. 란포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없이 차를 몰았다.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지도 않느냐는 다자이의 말에 라디오를 트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란포는 그대로 고속도로를 탔다. 그렇게 한시간 반 여를 달려 도착한 곳은 바다가 보이는 작은 펜션이었다. 다자이는 눈을 가만히 껌벅이며 주변을 둘러보다 차에서 내렸다. 시동을 끄고 나온 란포는 짧게 춥다고만 말하고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난방이 틀어져 있는 펜션 안은 따뜻했다. 현관에 서서 제 옷에 묻은 눈을 털어내고 슬리퍼로 갈아신은 다자이는 란포에게 쪼르르 걸어가 가만히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선배, 여기가 어디에요?"
"내 별장."
"응? 별장도 갖고 있었어요?"
"몇 년 됐어. 사람이 토 나오게 싫어질 때면 오던 데야."
"그리고 일이 끝나고도요?"
"뭐, 그렇지. 혼자 쉬기엔 제일 좋거든."

란포의 말에 다자이는 작게 그렇구나, 라고 말하고는 몸에 힘을 빼고 란포에게 조금 더 기댔다. 장난기가 섞인 그의 행동에 란포는 제 어깨에 걸쳐진 팔을 툭툭 치다가 반응이 없자 제가 힘을 줘서 한쪽씩 풀어내고는 부엌으로 걸어가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얼마 전에 미리 부탁했던 식재료들이 들어가있었다. 이 정도면 며칠 지내는 데에 문제는 없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란포는 적당히 재료를 꺼냈다. 탁, 탁. 익숙하게 테이블에 올라오는 재료를 보던 다자이는 슬쩍 옆으로 다가와서 재료들을 이리저리 뒤적였다. 토마토소스에 양파, 버섯, 펜네. 메뉴를 대충 눈치챈 다자이는 옆에 와서 도마를 들고 칼을 들었다. 란포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다 물었다.

"요리는 할 줄 알아?"
"선배는요?"
"예전에 요리프로그램 한 적 있어."
"아, 그랬지. 그때 앞치마 입은거 귀여웠는데."
"…앞치마는 잊어버려."
"왜요, 노란 병아리 같아서 귀여웠어요."
"…다자이."
"네?"
"나 칼 들었다."
"아하하하, 죄송해요."

란포의 협박 아닌 협박에 다자이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옆에서 재료손질을 도왔다. 조금 뒤에 냄비를 불에 올리고 소금을 한꼬집 집어넣은 란포는 다른 팬에 다자이가 썰어둔 재료들을 넣고 볶기 시작했다. 다자이는 란포가 시키는 대로 끓는 물에 펜네를 넣었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2인분의 요리가 완성되었다. 제법 고급스러워보이는 접시에 요리를 덜어낸 란포는 테이블에 요리를 옮겼다. 이 별장에서 다른 사람하고 같이 밥을 먹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아마 몇 년 전에 처음 이 별장을 샀을 때, 후쿠자와를 잠시 초대했던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거다. 그 뒤로는 늘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고 조용히 주변의 경치를 즐기다 갔다. 식사를 하면서 감상에 잠긴 란포를 다자이는 턱을 괴고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란포가 눈을 깜박이자 다자이는 피식 웃고는 입술을 비죽이 내밀었다.

"아아, 애인을 앞에 두고 다른 남자 생각이라니."
"그런 적 없는데."
"거짓말."
"정말이야."
"또 그런다. 선배, 그거 후쿠자와 선생님 생각하면 습관적으로 하는 말인거 알죠."
"…내가 그랬어?"
"네, 매번. 이제 그만 좀 생각해요. 눈 앞에 있는 건 난데."

다자이의 불만 섞인 말에 란포는 볼을 긁적이고 머쓱하게 웃고 말았다. 그러네, 실례겠지. 선배는 선배일 뿐이니까. 다자이는 란포의 웃음을 보다가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흩어놓고는 란포가 불만을 표시하며 머리를 정리하는 사이에 그의 차로 가서 조그만 케익 상자를 가지고 왔다. 저걸 손에 들고 있는 건 본 적이 없는데? 그렇게 생각한 란포가 뭐라고 말하려고 하자, 다자이는 손가락을 란포의 입술에 대곤 빙긋이 웃었다. 비밀이에요. 그 말에 란포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다자이의 무릎을 걷어찼다. 상자를 손에 꼭 든 채 절뚝거리며 급하게 테이블로 걸어가 상자를 놓은 다자이는 무릎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아야, 왜요. 왜, 이번엔 아무 것도 안 했다고요?"
"누가 멋대로 내 차키 복사하래."
"그치만 저번에 핀으로 땄을 때 선배가 하지 말랬잖아요."
"당연하지! 그건 범죄라고! 그전에, 내 소중한 차를 망가뜨리지 마!"
"선배 차가 망가지면 제 차에 타면 되잖아요."
"네 차에 타도 운전은 내가 할 거지만, 싫어."
"아, 진짜 너무하시네. 모처럼 좋은거 사왔는데."
"뭔데?"

란포가 자신의 말에 반응을 보이자 다자이는 씨익 웃으며 상자를 열었다. 그 상자 안에는 초코로 만든 스펀지 롤케익에 마롱크림이 올라가 슈가파우더를 예쁘게 입고 있는, 귀여운 장식이 주변에 놓여있는 케이크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하면 가장 쉽게 떠올릴 만한 그런 케이크였다. 부쉬 드 노엘. 이런 건 언제 준비했대. 그렇게 생각하며 란포는 살풋 웃고는 까치발을 들어 다자이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주었다. 다자이는 그런 란포의 허리를 잡고는 고개를 틀어 천천히 입을 맞췄다. 쪽, 가볍게 맞닿았다 떨어진 입술은 이내 서로를 찾아들며 뜨거운 숨을 얽었다. 조금씩 중심을 잃어가는 란포의 몸을 단단히 받친 다자이는 입술을 떼고는 여유롭게 웃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요? 그 말에 란포는 그제야 머릿속으로 날짜를 세어보았다. 아, 그렇구나. 란포의 웃음을 신호로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창 밖에는 한참 전부터 내린 눈이 소복히 쌓여 세상을 하얗게 물들여가고 있었다.


Oh the weather outside is frightful

But the fire is so delightful

And since we've no place to go

Let It Snow! Let It Snow! Let It Snow!

-크리스마스 캐롤, Let it snow 中-


'문호스트레이독스 > 가벼운 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쌍흑] 그 후.  (0) 2017.01.12
[R18] 매니큐어  (0) 2016.12.31
添い寝(소이네) 5  (0) 2016.12.15
添い寝(소이네) 4  (0) 2016.12.14
添い寝(소이네) 3  (0) 2016.12.14
Posted by 스위스무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