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란] 평행선의 연민
18다자이, 14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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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안개 속에 그들은 앉아있었다. 어떻게 만났는 지는 모른다. 서로 시선도 마주하지 않았다. 한 소년은 가쿠란에 망토를 두른 채 학교 지정의 모자를 쓰고 있었고, 다른 소년은 이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하는 앳된 외모를 붕대로 반쯤 가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쿠란의 소년은 발 끝을, 붕대의 소년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철제의 벤치에 앉아있는 두 사람은 서로 한 마디의 인사도 없었다. 아니, 실은 애초에 상대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알고싶지도 않았다. 상대의 이름이 무엇이든, 어떤 외모를 가졌든 크게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나 이외의 타인은 나를 이해할 수 없을테니까. 하지만 처음 봤을 때 느낀 것은 분명히 있었다.
「동류의 인간」.
굳이 정의를 내리자면 그런 부류에 속하는 인간일 것이다. 각자의 일생을 집합으로 표현한다면 그들은 서로 집합 외의 존재였다. 교집합조차 생기지 않을. 둘은 나란히 앉아서 같은 생각을 하며 서로를 흘끗 쳐다보았지만, 공중에서 마주친 시선은 그대로 스쳐 서로가 보던 풍경을 반대로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마도 붕대를 맨 소년 쪽이었던 것 같다. 아마 제삼자가 본다면 쓸데 없는 말이라고 했을 질문이었다. 붕대를 맨 소년은 제 상처투성이의 손을 내려다보다 물었다.
―너는, 사는 게 즐거운가?
가쿠란의 소년은 그 말에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모자의 챙으로 향하고는 손을 옮겨 모자를 누른 채 답했다. 아니.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고, 나는 언제나 눈치를 보는 것 밖에 못해. 상자 안에 갇혀버린 느낌이야. 한 걸음 한 걸음이 아파. 숨이 막혀와. 그 말에 붕대를 맨 소년은 짧게 웃고는 답했다. 이거 우연이군,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 참인데. 세상은 바보들이 넘치고, 살아있는 인간들은 살아가기 위해 의미 없는 행동들을 반복하지. 참으로 애석한 일이야. 쓸데 없는 일에 힘을 쏟는다는 건 말이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붕대를 맨 소년의 코트자락을 흘끗 보던 가쿠란의 소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난 자살은 하지 않아.
소년의 말에 붕대를 맨 소년의 상처투성이 손가락이 움찔했다. 살짝 구겨진 코트자락을 손가락 끝으로 가만히 두드려 펴며 붕대를 맨 소년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살은 하지 않아, 라. 내가 자살을 하는 이유는 아는가? 붕대를 맨 소년은 가만히 바닥을 발로 차며 물었지만 가쿠란의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알 리가 없지,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으니까. 붕대를 맨 소년은 홀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그렇게 하면 살아있다는 느낌을 다른 어떤 방법보다 빠르게 느낄 수 있거든. 죽음이 덮쳐와서 전신이 무력해지는 느낌과, 살기 위해 조금이라도 힘을 쓰는 그 느낌이 참을 수 없이 소름이 돋는다네. 자네는 그 기분을, 아, 모르겠군. 붕대를 맨 소년의 말에 가쿠란의 소년은 벤치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런 기분.
―그런가?
그런 기분을 느끼면서 살 이유를 찾기에는 내 세상은 너무나 무섭거든. 가쿠란의 소년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웃어보이고는 그럼, 잘 있어. 라는 인사를 남기고는 먼저 등을 돌려 안개 너머로 걸어갔다. 붕대를 맨 소년은 그가 사라진 곳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반대쪽에서 밝아지는 하늘에 피식 웃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시간이 다 됐던 건가. 벤치에서 일어난 붕대를 맨 소년은 코트를 벗어 공중에 가볍게 털고는 다시 걸치며 빛이 쏟아지는 곳을 향해서 걸어갔다.
―오늘도 죽기 좋은 날이야.
*
"…꿈인가."
눈을 뜨니 방의 천장이 보였다. 란포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눈을 깜박였다. 어쩐지 오랜만에 옛날 옷을 입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와 평소에는 하지 않을 얘기를 했던 것도 같다. 상대가 누구라도 쉽게 말하지 않을 묻어두었던 생각들이었다. 그래, 꿈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렇게 모든 것을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꿈이니까, 금방 사라질테니까. 이불을 대충 걷어두고는 욕실을 향해 걸어가던 란포는 장지문 너머에서 이불을 머리까지 둘둘 말고 있는 제 연인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발로 이불을 굴렸다. 빼꼼히 짙은 갈색의 머리만 보이던 남자는 벽까지 굴러가고 부딪쳐서야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벌써 아침인가요오…."
"일어나, 다자이."
"란포씨….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너는 뭐 그대로 질식사라도 할 생각이었나보네."
"아, 굉장하네요. 본 것 만으로도 아시는 거예요? 역시 란포씨."
바닥에 드러누운 채 그렇게 말하는 다자이의 정강이를 툭 걷어찬 란포는 별 다른 말 없이 욕실로 들어갔다. 안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걷어차인 정강이를 문지르던 다자이는 이불을 들고는 장지문을 넘어가 란포가 대충 걷어둔 이불을 정리하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어제는 분명히 란포씨를 화나게 해서 쫓겨나 따로 잤는데도 밤새 함께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그런 꿈을 꾼 탓이겠지. 간밤에 꿈에서 만난 이에게 다자이는 세상 어디에도 꺼내두지 않았던 이야기를 했다. 꿈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좀 더 거리낌없이 속내를 드러냈던 것 같기도 하지만. 환기를 위해 살짝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온 찬 바람에 결국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가며 다자이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당신도 같은 꿈을 꾸었을까요, 란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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