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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7. 14:17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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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 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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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츄야는 시내의 한 호텔을 찾았다. 그 호텔 최상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는 한 여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텔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불편한 기분이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자리를 놓쳐서는 안 된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쉰 츄야는 옆에서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는 여인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레스토랑의 안쪽에는 자리마다 칸막이가 있고 커튼이 쳐 있었다. 안에서 하는 얘기가 크게 밖으로 새어나갈 염려는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여인은 한 구석 테이블 자리의 커튼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머리가 희끗한 노신사 둘이 앉아있었다. 츄야는 모자를 벗고 정중히 예를 표하고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주문은 미리 해두었는지 츄야가 앉자마자 식사가 나왔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과 함께 칼소리만 나던 테이블은, 곧 여인의 아버지로 보이는 노신사의 말로 침묵이 깨졌다.

"그래, 자네가 우리 아이코의 연인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난 얼굴만 번듯한 남자는 좋아하지 않네."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의외네요."
"무슨 뜻인가?"
"국내 굴지의 기업을 이끄시는 분께서는 첫인상과 외모 만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시느냐는 뜻입니다."

츄야는 그렇게 말하곤 노신사를 마주보며 웃었다. 그 말에 노신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잔에 있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아마 그딴에는 츄야를 떠보겠다고 던진 말이었겠지만, 츄야는 그런 말에는 이미 이력이 나 있었다. 다행히 츄야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 뒤로는 조금 더 부드러운 분위기의 대화들이 오갔다. 식사를 절반 정도 했을 때, 먼저 본론을 꺼낸 것은 그, 아이코의 아버지였다.

"그래, 자네가 종교의 발전에 관심이 많다고?"
"그렇습니다."
"일본은 이미 꽤 많은 부분을 투자하고 있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뭐, 그 얘기는 옆에 있는 하마오 추기경과 하는 것이 좋겠지."
"…하마오 에이스케입니다."
"나카하라 츄야입니다."

추기경이라. 그 정도면 상당한 권한이 있는 자다. 게다가 얘기를 나눠보니 그는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종교에 귀의해 추기경의 자리까지 올랐다고 한다. 그렇다고 청렴결백한 이인가 하면, 결코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었다. 일본의 교회는 어딘가 뒤틀린 자들의 집합소라는 얘기는 전부터 들어왔지만, 직접 만나보니 제법 많이 썩어 있는 곳이었다. 웬만한 자리는 명분상의 인망과 돈이면 해결이 되었다. 그것에 유일하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에도가와 란포라고 했다. 에도가와 란포는 이미 옛날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고, 상부만이 알고 있는 무언가를 무기삼아 그 자리에서 한번도 내려온 적이 없다고 했다.

"사람이 너무 한 자리에만 머물러 있는 것도 좋지는 않은데 말이지요."
"조금 도와드릴까요?"

방금 전의 대화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마오 에이스케는 에도가와 란포의 몰락을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츄야의 제안을 덥썩 물었다. 츄야는 웃으면서 다음에 시간을 내서 방문하겠다고 하고는 조금 가벼운 이야기를 하자며 화제를 돌렸다. 식사의 결과는 썩 나쁘지 않았다. 역시 사람을 통하는 게 정답이었다. 아이코의 아버지와 하마오 추기경을 차에 태워 보낸 츄야는 느른하게 하품을 하며 팔짱을 꼭 끼고 있는 아이코의 팔을 떼어냈다. 그녀는 입술을 비죽이 내밀고는 츄야를 쳐다보았다.

"왜 그런 표정이야?"
"오랜만에 연락해선 다짜고짜 이런 자리나 마련하게 했는데 팔짱도 못 끼게 하고.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직 살려두고 있잖아. 그거면 되지 않아?"
"와아, 너무하네. 언제는 난 천박해서 안 된다며?"
"아하하,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 너는 너무 자유롭다니까?"
"그게 그 뜻 아니에요?"
"뭐, 아주 다른 건 아니지만."
"어머, 진짜 무례하네."
"보는 눈이 많은데서 실례했나?"
"그래요. 잘 아네요."
"그럼 쇼라도 해줄까?"

그렇게 말한 츄야는 그녀의 턱을 잡고 부드럽게 키스했다. 딱히 애정이 담긴 행위는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모욕했다는 그녀의 불만을 가라앉히기엔 나쁘지 않았다. 아이코는 사랑에 크게 무게를 두지 않는 여자였다. 츄야는 그런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를 곁에 둔 것은, 그녀가 우연히 그가 다른 아가씨의 피를 빨아먹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서 죽일 수도 있었지만 딱히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고, 그녀에게선 츄야가 좋아하는 냄새가 나지 않았기에 그만두었다. 필요 이상의 살인은 쓸데없는 이목을 집중시킬 위험이 있었기에 츄야는 가끔 그녀를 통해 다른 아가씨를 소개받곤 했다. 물론, 그때마다 그녀는 다른 남자들과 함께였다. 그리고 그녀가 남자를 바꿀 때마다 그녀의 사진은 인터넷 신문이나 잡지사의 찌라시를 몇 번이고 장식했다.

그렇듯 부잣집 아가씨에 워낙 문란한 사람이라 파파라치가 몇 명 붙어 있었는지 수풀 사이에서 셔터소리가 몇 번인가 들린 것을 확인했지만 나중에 그 인간을 찾아가 처치하면 그만이다. 아직 얼굴을 세상에 알릴 생각은 없었다. 짧은 키스를 끝낸 츄야는 예의상 할 일은 마무리 짓겠다며 그녀를 차에 태우고는 집에 데려다 주었다. 아이코는 그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이 닫히는 걸 보던 츄야는 핸들에 머리를 대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 지치는 하루였다.

츄야가 차를 몰아 아쿠타가와의 저택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밤이 깊은 때였다. 잔뜩 지친 표정의 아쿠타가와는 됐다는 말에도 몸을 일으켜 그에게 인사를 했다. 닥치는대로 식사를 한 흔적을 본 츄야는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 앉았다. 내장이 무너지는 고통을 버티기 위해서, 그리고 무너져가는 조직을 잡기 위해서 아쿠타가와는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다른 이였다면 벌써 기절했을 텐데도, 아쿠타가와는 식은땀만 흘릴 뿐,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차라리 정신을 놓아버리는 게 편할텐데. 한숨을 내쉬는 츄야를 보던 아쿠타가와는 그에게 조용히 물었다.

"일은, 잘 되어가십니까?"
"아아, 그래. 괜찮은 인맥을 찾았지."
"그럼 그쪽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넌 회복에 집중해."
"...네."

그리고 히구치가 몇 곳을 돌았는데 이미 다자이씨가 다녀간 뒤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쿠타가와는 빨갛게 X자 표시를 해둔 지도를 보여주었다. 그 곳들은 다자이가 폭주를 하기 전까지 알고 지내던 이들의 은신처였다. 그나마 그 이후에 새롭게 터를 잡은 이들이 알려지지 않은 게 다행인가. 하지만 다자이가 그들이 있는 곳을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번에 새로 찾은 인맥을 통해 그들을 흔들어 놓아야만 했다. 츄야는 다시 끓는 소리를 내며 각혈하는 아쿠타가와를 마법으로 강제로 재워버리고는 컴퓨터를 켰다. 에도가와 란포라고 했었지? 그는 하마오 에이스케의 말을 곱씹으며 검색창에 그의 이름을 쳤다.

에도가와 란포, 32세. 추기경. 키 같은 자잘한 정보는 넘겼다. 추기경이 된 나이 25세. 보통의 추기경들이 40대 중후반인 것을 생각하면 그는 꽤 빠른 나이에 추기경이 되었다. 심지어 가족은 단 한명도 없다. 연고도 없는 고아가 스물 다섯에 추기경이라. 무언가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 중 하나는 다자이일 것이라고, 츄야는 확신했다. 그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찾아보자, 제법 흥미로운 소문이 도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은 전부터 이종족의 침략에 대비를 하고 있었다든가, 그가 밤중에 어느 낡은 건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든가 하는 소문이었다. 이 소문의 꼬리를 잡는다면 좀 더 수월하게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츄야는, 하마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에도가와 란포가 운영하고 있다는 수도원을 가보고 싶다는 그의 말에 하마오는 반색을 하며 당장 날짜를 수배하겠다고 말했다. 감사를 표하며 전화를 끊은 츄야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아직 밤은 한참 남아있었지만, 저녁부터 지나치게 힘을 뺀 탓에 무언가를 더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잠이 들어있는 아쿠타가와를 흘끗 본 츄야는 다시 시선을 돌려 천장을 보다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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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8. 7. 02:09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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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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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 너머에서는 제법 웅장한 통화 연결음이 들렸다. 합주곡이라나, 뭐라나. 머리까지 울리는 느낌에 귀에서 살짝 핸드폰을 멀리하고 기다리자, 조금 뒤에 음악 소리가 끊기고 밝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츄야씨 아냐?]

"이야,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왜 이렇게 연락을 안해요? 서운하게.]

"미안해, 요즘 일이 좀 바빠서 말야."

[또 그렇게 말한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츄야의 달콤한 말에 전화기 너머에서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세요, 목소리가 전혀 아닌데요? 상대의 날카로운 지적에 츄야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본론을 말했다. 전에 말했던 제법 고위 성직자라는 아버지의 친구분을 만나고 싶다는 말에 상대는 조건을 걸었다. 그 조건이란 만나게 해주는 대신, 자신의 연인 역할을 해달라는 말이었다. 그녀의 말에 츄야는 사레가 들렀는지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 정도도 못 해줘요? 나는 더 어려운 부탁을 들어줄건데.]

"아니, 그, 아버님이 싫어하시지 않을까?"

[지금 정략결혼 위기거든요. 하지만 난 좀 더 오래 자유롭고 싶은걸요.]

"…어쩔 수 없네. 이번만이다? 두 번은 안 통할걸."

[에이, 그 정도는 알죠. 좋아요. 식사자리 한 번 마련할게요.]

"하하, 잘 부탁해."


부탁의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를 끊은 츄야는 한숨을 내쉬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연인 역할이라니. 세상에서 가장 껄끄러운 일이다. 츄야의 타깃은 대부분이 상류층 여성이라 예전부터 적지 않게 했던 일이긴 하지만, 상류층 여성의 연인 역할이란 뭇 남성들과 그 여성의 아버지, 그리고 그 여성의 주변에서 재는 시선들을 모두 받아내야 하는 일이었다. 마음 같아선 거절하고 싶었지만, 지금 가장 간단하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인맥뿐이었기에 츄야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잠깐일 뿐이니까. 츄야는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며 찬장에서 와인을 꺼내 마셨다.


그 시각, 히구치는 길을 헤매고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던 70년 전과는 모습이 판이하게 다른 게 문제였다. 심지어 몇 군데는 비어있었다. 아니, 단순하게 비어있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가 확실히 다녀간 흔적이 있었다. 잠들어 있는 이들이 있던 곳의 관은 전부 열려있었고, 심장이 있던 자리에는 마른 모래가 남아있었다. 히구치는 씁쓸하게 모래를 어루만지다 다음 장소로 서둘러 이동했다. 누군가가 잠들어 있는 상태의 동료들을 노리고 있다면, 그들보다는 빨리 움직여야 했다.


히구치의 보고를 받은 아쿠타가와는 그게 누구의 짓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은 비교적 오래된 일이라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히구치가 서둘러주는 편이 좋아 일부러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자이 말고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현재, 동료인 자신들에게 명백히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와 소수의 인간들뿐이니까. 하나씩 확실하게 확인하고 그대로 처형한다. 참으로 매정하고 잔인한 자였다.


"아직도 분노를 지우지 못한 겁니까, 다자이씨."


일렁이는 촛불을 보며 중얼거리던 아쿠타가와는 이내 촛불을 꺼버리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세월이 지나면 그런 일은 잊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생각보다 강해, 지금은 종족 전체를 노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과거의 자신에게 왜 그랬냐고 묻는다면, 그가 이대로 썩어버릴까 두려워서 그랬다고 답할 자신은 있었다. 결과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지만,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쿠타가와는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의 분노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냥 앉아서 당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에게서 받은 저주부터 풀어야했다.


저주. 그 외에는 딱히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았다. 뱀파이어는 인간들보다 체력도, 완력도, 치유 및 재생능력도 뛰어난 종족이었다. 아쿠타가와의 내장은 진즉에 재생이 완료되었어야 했다. 츄야의 팔이 재생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재생을 하고 나면 몇달이 채 되지 않아 조직이 괴사하기 시작한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고통이지만, 처음에는 일어나지도 못한 채 몇날 며칠을 바닥에서 뒹굴며 신음만 뱉었다. 다시 아려오기 시작한 옆구리를 가만히 누르며 아쿠타가와는 깊은 신음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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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8. 6. 20:23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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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 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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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엉,

커다란 소리와 함께 낡은 철문에 연결되어있던 손잡이가 부서져버렸다. 츄야는 멋쩍은 표정으로 부서진 손잡이를 바닥에 집어던지고는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오래된 핏자국이 한동안 그 장소가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복도의 끝에 있는 작은 문을 열자 붉은 천이 덮여있는 관이 나왔다. 먼지투성이의 천을 인상을 찌푸린 채 살짝 끌어내린 츄야는 관의 뚜껑을 열었다. 관 속에는 어깨를 약간 넘는 길이의 금발을 가진 여인이 잠들어있었다.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던 건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들고왔던 주머니에서 작은 새 한마리를 꺼내서 그대로 손톱을 세워 주먹을 쥐었다.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작은 새의 몸에서 나온 피는 천천히 흘러내려 여인의 입술을 적셨다. 그 피에 반응하여 그녀의 콧구멍이 움찔거렸고, 말라붙었던 입술이 달싹거리며 움직였다. 곧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는 눈을 떴다. 입가에 묻은 피를 가볍게 핥은 그녀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관에서 일어나 앉았다.

"으음…. 어라, 츄야님?"
"잘 잤나, 히구치?"
"오랜만이네요. 그러니까, 70년 만이죠?"
"대충 그 정도 된 것 같다."
"여전하시네요."

상투적인 그녀의 인사법에 피식 웃은 츄야는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면서 히구치에게 여러 동물들이 담겨있는 주머니를 건넸다. 히구치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뒤를 돌아 한 마리를 꺼내어 식사를 시작했다. 한참 식사를 하던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뒤를 돌아보면서 아쿠타가와의 소재를 물었다. 츄야는 볼을 긁적이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오지 못했다고 하자, 그녀는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뭐, 그 녀석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려고 온 거니까 그런 표정은 하지 말고."
"앗, 다 드러났나요?"
"아주 노골적으로 말이지."
"죄송합니다. 조금은 덜 보이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 되네요."

히구치의 말에 츄야는 어깨를 으쓱이곤 밥이나 마저 먹으라며 그녀를 토닥여주었다. 히구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개를 돌려 오랜만의 식사를 즐겼다. 히구치가 식사를 끝내고 일어나자, 그녀를 데리고 이동하며 츄야는 그녀가 잠든 사이에 있었던 세상의 변화를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히구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얘기를 들었지만, 딱히 실감은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조금 뒤에 저택을 빠져나간 히구치는 밤인데도 불구하고 번쩍거리는 빛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건…. 밤인데도 이렇게 빛나나요?"
"멋있지? 네온사인 이라는 거야."
"네온…. 사인."
"뭐, 아쿠타가와 녀석은 이것조차 부담스러운 모양이다만. 넌 어때?"
"반짝거리는게, 예쁘네요. 그리고 이렇게 빛나는데도 전혀 힘들지 않아요."
"그래? 마음에 드는 것 같네."
"네. 아주 좋습니다."
"그럼 이번에도 좀 힘 내줘야겠는데."
"이 세상을, 지배하실 겁니까?"

히구치의 말에 츄야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리고는 불빛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성기 때라면 그런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번의 목표는 그게 아니었다. 분명한 적의를 가진 존재가 있다. 뱀파이어들은 그에게서 살아남아야 했다. 츄야는 그녀에게 스마트폰과 옛날 일본의 지도, 그리고 몇 개의 주소지가 적힌 종이를 건네주고는 그녀가 할 일을 설명해주었다. 최종 주소지를 기준으로 흩어진 동족들을 모아달라는 말에 히구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움직일 건가?"
"그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럼 가기 전에 기능이라도 설명 해줄까."
"기능…이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히구치를 보던 츄야는 그녀의 핸드폰을 들어 잠금을 해제하는 방법과 전화를 거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히구치는 실수로 통화버튼을 눌러버렸다. 그녀가 당황하는 사이에 통화 연결음이 끊기고, 전화기 너머에서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히구치냐.]
"아, 아쿠타가와님!!"
[여전히 시끄럽군.]
"아, 그, 죄, 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 없다.]
"그, 네…."
[네가 전화를 했다는 건, 츄야씨를 만난 건가.]
"네, 깨우러 와주셨습니다."
[…번거롭게 해드렸군.]
"뭐, 그걸 알면 상태 회복에나 힘 쓰라고, 아쿠타가와."
[…네. 그럼, 나머지는 잘 부탁하마, 히구치.]
"네, 네!!"

전화통화를 끝낸 히구치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던 츄야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잘 됐네.'라고 말했다. 츄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히구치는 이내 바닥에 앉아 지도를 펼쳤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츄야는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는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겼다. 저래봬도 수완은 꽤 좋은 편이니 그녀는 금세 동료들을 모아올 것이다. 그럼 다음에 할 일은, 저쪽을 흔들어 놓는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한 츄야는 중얼거리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우선은 탐색을 좀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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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8. 6. 03:27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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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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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실에서 나온 루시는 그대로 란포의 집무실로 걸음을 향했다. 커다란 문 앞에 서서 예의상 두 번 문을 두드리자, 다자이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곤란한 웃음으로 지금 란포는 자리에 없다고 했다. 저녁 미사라나, 뭐라나. 루시는 볼을 긁적이다가 온 김에 차라도 마시고 가겠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다자이는 그녀에게 차를 내어주고는 무슨 일로 란포씨를 찾아왔느냐고 물었다. 루시는 찻잔의 손잡이만 만지작거리다가 다자이를 보면서 말했다.


"다자이씨, 그 여자애한테 락(lock)을 걸었더라고요?"

"…꽤 빨리 눈치챘네."

"뭐야, 하프가 둘이라며?"

"비공식적인 서류로는. 공식으론 둘 다 그냥 고아야."

"…굉장히 위험한 거 아니에요?"

"쉽게 걸리진 않을거야."


그거야 당신들의 희망사항이죠. 그렇게 말하며 루시는 조금 식어가는 차를 가볍게 한 모금 홀짝였다. 앗, 뜨거. 아직 뜨거운 김이 남은 차에 혀를 데었는지 작게 중얼거린 그녀는 각설탕을 몇 개 집어 차에 넣고 휘저으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 또다시 '에도가와 란포의 관계자'에게 '이단심문'이라는 판결이 내려지면 무사하지 못할지도 몰라요. 어쩌면 란포씨 자신이 이단심문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죠. 걱정어린 그녀의 말투에 다자이는 빙긋이 웃으며 다리를 꼬고 앉아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거라면 내가 어떻게든 막을거니까, 걱정하지 마."

"…믿어도 되나 몰라."

"아니, 그 정도는 믿어줄래? 계약자를 내던질 정도로 매정하진 않거든, 나."


루시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러시겠죠, 라고 답하고는 딸기잼이 진득하게 눌어붙은 버터쿠키를 한 입 물었다. 곧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녹초가 된 란포가 들어왔다. 문을 닫자마자 갑갑한 모자를 벗어던진 란포는 제 손으로 머리를 흩어놓고는 웃느라 경직된 얼굴을 가만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루시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자, 그제서야 그녀를 발견한 란포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의복을 벗으며 말했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루시?"

"아, 맞다. 거짓말쟁이씨를 만나러 왔었죠."

"벌써 눈치챈 거야? 빠르네."

"이래봬도 눈치는 빠르거든요?"

"미안, 미안.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그냥 확인차 온 거예요. 그리고 괜찮은지도 묻고 싶었고."

"아아, 괜찮아. 아직은 말이지."


란포는 아직은, 이라는 단어에 조금 힘을 주어 말하곤 유리잔에 얼음을 가득 채워와선 다자이가 우려둔 홍차를 잔에 따라 1인석에 앉았다. 천천히 몸을 늘어뜨리며 차를 조금씩 마시는 란포를 보던 루시는 찻잔을 내려놓고는 잘 마셨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란포와 다자이는 가볍게 손을 들어 그녀를 배웅했다. 루시는 고개를 꾸벅이곤 손을 흔들며 나갔고, 란포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마시던 음료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갑갑한 옷을 마저 벗었다.


"대체 언제 온 거야?"

"란포씨가 미사에 갔을 때."

"그냥 돌려보내지."

"뭐, 손님이잖아. 할 말도 있어보였고."

"아아, 걱정받았지."

"란포씨의 주변에서 이단심문이 자꾸 일어나면 다음은 란포씨가 대상이 되는 건 아닐까, 하더라고."

"하하,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지."


실없이 웃으며 옷을 갈아입는 란포를 보던 다자이는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이단심문, 그것은 애초에 오롯이 무언가를 캐내기 위한 심문이 아니었다.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평범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랬다. 전쟁 포로들을 고문하는 것에 못지 않은 고통이 기다리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그런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자이는 그가 멋대로 벗어놓은 옷들을 정리하며 그를 지키겠다고 홀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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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8. 5. 00:55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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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


인질을 이용한 도발에도 훈련생들은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아니, 넘어오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까? 조금 전에 내비친 살기에 겁을 먹어버린 건지, 그들은 잔뜩 굳은 채 루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루시의 칼 끝이 좀 더 아츠시에게 바짝 닿았을 때였다. 쿄카가 달려나와서 그녀의 손목을 잡고는 그대로 무릎을 걷어찼다. 루시가 쿄카의 공격을 피하느라 자세가 살짝 무너진 틈을 타 그녀에게서 벗어난 아츠시는 그대로 몸을 돌려 그녀의 허벅지를 노렸다. 하지만 루시는 쉽게 당하지 않았다. 쿄카에게 잡혔던 손목을 꺾어 그대로 그녀를 제압한 루시는 쿄카를 찍어누르며 공중제비를 돌아 아츠시의 공격을 피했다. 그대로 바닥에 착지하며 쿄카를 아츠시에게 집어던진 루시는 갑작스럽게 날아온 쿄카를 받으며 밀려난 아츠시를 보다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래도 용기 있는 사람은 있네요? 칭찬해줄게요."


쿄카와 아츠시의 행동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일까, 곧이어 다른 훈련생들도 그녀에게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루시는 가볍게 어깨를 풀고는 다리로 땅을 두어 번 차다가 그대로 도약해 훈련생들의 사이를 빠르게 지나갔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급소를 얻어맞아 뒹구는 훈련생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공격을 그나마 대등하게 막은 건, 괴력을 가진 켄지 정도였다. 루시의 공격을 막아낸 켄지는 그녀를 잡아 벽으로 던졌지만, 밀려난 그녀는 벽을 발판삼아 그대로 켄지에게 더 빠른 속도로 돌아와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한참 기싸움을 하던 켄지가 손을 들면서 항복을 표시하자 그녀는 칼을 거두어 넣으며 손뼉을 쳤다.


"자, 기초 테스트는 여기까지 할게요. 본격적인 훈련은 내일부터 시작할거고요, 오늘은 이만 쉽시다."


쉬자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자 여기저기서 앓으면서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시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다들 의무실에 가서 상태를 봐달라고 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하면서 쿠니키다에게 걸어갔다. 루시가 하는 테스트를 전부 지켜본 쿠니키다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와 함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블라인드를 내린 쿠니키다는 루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쿠니키다의 시선에 루시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몸은 괜찮은가?"

"아, 그거요? 그거라면 뭐, 조금 따갑긴 한데 아직은 괜찮네요."

"그래, 평가 결과는?"

"음, 다들 신부님이 알려주신 것에만 너무 의존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내일부터는 훈련 방식을 바꿀거예요."

"…어떻게 할 거지?"


루시는 소파에 앉아 쿠니키다가 건넨 얼음팩을 받아 한쪽 얼굴에 대고는 눈을 감은 채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훈련생들을 두 팀으로 나눠서 자율 전술 훈련을 시키는 게 좋겠다는 말에 쿠니키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그에 따른 보상과 훈련 강화에 대한 논의를 해나갔다. 한편, 의무실에서는 요사노가 훈련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의 상태를 봐주고 있었다. 루시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요사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급소만 용케 골라서 때린 덕분에 다들 바닥에 굴러 가벼운 찰과상들을 입었다. 상태가 조금 심각하다고 할 수 있는 건 아츠시와 쿄카, 켄지 정도였기에 요사노는 그들을 빼고는 가벼운 처치 후에 돌려보냈다.


"그래, 너희들은 어째…매일 다치는고?"

"아하하. 그, 그러게요."


아츠시와 켄지는 피는 나지 않았지만 목에 칼로 살짝 스친 자국이 있었고, 쿄카의 손목은 상당히 강한 힘으로 눌렸는지 퉁퉁 부어있었다. 요사노는 아츠시와 켄지의 목에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여준 뒤에, 쿄카의 손목에는 파스를 뿌리고 붕대로 단단히 압박했다. 붕대를 감고 나서 요사노는 쿄카를 당분간 훈련에서 빼라고 말해야겠다며 간단한 소견서를 작성했다. 쿄카는 괜찮다고 말할 생각이었지만, 아츠시가 가만히 그녀를 붙잡았다. 쿄카는 아츠시를 올려다보다가 볼을 부풀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사노는 쿠니키다에게 다녀올 동안 편히 쉬고 있으라며 의무실을 나갔고, 그녀가 나가자마자 쿄카는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하루만 자면 가라앉는데."

"하지만 쿄카는 지금 싸울 필요가 없잖아?"

"…언제까지고 보호받고 싶지 않아."

"…쿄카."

"아츠시가 날 걱정해주는 건 고마워. 하지만, 나도 내 몸 정도는 스스로 지키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 전투를 배우는 거야."


짐이 되고 싶지 않아. 단호하게 자신을 보며 말하는 쿄카를 보던 아츠시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녀는 더이상 보호가 필요한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걸 느끼는 것이 왠지 씁쓸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성장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그런 얘기를 하는 사이 쿠니키다에게 다녀온 요사노는 루시와 함께 의무실로 들어왔다. 루시는 배시시 웃으며 들어와서는 멋대로 의자를 하나 끌어다 앉고는 그들을 보며 물었다.


"아, 여러분. 몸은 좀 괜찮아요?"

"아, 네."

"네, 튼튼한 건 장점이니까요."

"흐음, 그래요. 그건 다행이네요. 그리고, 음. 쿄카양은?"

"저도 괜찮아요."

"미안해요, 아까는 힘이 저도 모르게 많이 들어가버려서."

"정말로 괜찮아요."


루시는 그렇게 말하는 쿄카의 손목을 보다가 가만히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수 초 정도였을까, 아주 가볍게 눈의 색이 변하는 것 같았던 루시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외투의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그 안에는 색색의 별사탕이 들어있었다. 한 사람에 하나씩 별사탕을 나눠준 그녀는 빙긋 웃으며 화해의 표시라고 말하곤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남기고는 그들이 대답도 하기 전에 나가버렸다. 참 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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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8. 4. 01:32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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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


"흐-음, 여기인가."


붉은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땋아내린 소녀는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다 란포의 집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노크도 없이 열린 문에 란포는 가만히 시선을 올려 문을 쳐다보았다. 소녀는 한 손에는 낡은 레트로풍의 여행가방을 든 채 활짝 웃었다. 란포는 그녀를 마주보며 웃어주고는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소녀는 달그락거리는 가방을 끌고 들어와 문을 닫았다. 소녀를 보고 놀란 건 다자이 쪽이었다.


"…란포씨?"

"응, 왜?"

"새로 온다는 게 루시였어?"

"응."

"어라, 다자이씨한테는 비밀로 했던 거예요?"

"아니, 그냥 누가 오는지 말을 안 했지."

"…올 거라면 미리 언질이나 주지."

"아니, 뭐, 놀래키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라."


란포와 루시가 서로를 마주보며 웃자, 다자이는 한숨을 내쉬고는 소파에 앉았다. 루시라, 확실히 대 뱀파이어전 훈련에는 딱 맞는 전투조교였다. 그녀 또한 뱀파이어였으니까. 다만, 그녀의 정체는 교회에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란포가 철저하게 기록을 숨겨버렸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루시는 그저 어느 시골의 교회에 소속되어있는 한 사람의 수녀일 뿐이었다. 그녀는 다자이가 건넨 엑소시스트 명부를 받아서 소파에 앉아 한 장씩 서류를 넘겼다. 마지막 두 장을 손에 쥔 채 번갈아가며 보던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애들이 이번에 집중해야 하는 애들인가요?"

"음, 둘 다 하프거든."

"헤에, 하프가 둘이나 왔어요? 별 일이네."

"곤란해하고 있길래 주웠지."

"…흐응."


작게 콧소리를 낸 루시는 종이를 다시 파일 안에 넣고는 파일을 갈무리해서 일어났다. 이번 일에 대한 위험수당은 확실하게 챙겨달라는 그녀의 말에 란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했고, 그녀는 만족한 듯 인사를 하곤 짐을 풀러 떠났다. 문이 닫히자 마자 다자이는 란포를 빤히 쳐다보았다. 란포는 일부러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서류에 서명을 해 나갔다. 다자이는 일부러 조금 시끄럽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란포씨."

"응?"

"…상대가 진짜면 나도 그게 안 풀린다고는 장담은 못 해."

"그럼 루시에게 주의를 주던가."

"하프라고 말해놓고?"

"그녀라면 금방 하프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눈치 채겠지."

"뭐, 몇 번 부딪쳐보면 눈치 채겠지만."


다자이는 턱을 괴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는 속으로 쿄카를 그대로 둘 것인가, 아니면 조금 더 오래 붙잡아 두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저울질을 시작했다. 조금 뒤에 결론을 내린 그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다녀오겠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나갔다. 다자이가 향한 곳을 어렵지 않게 짐작한 란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얘기하느라 잠시 멈췄던 펜을 다시 움직였다. 다자이는 쿄카의 방에서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투훈련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온 쿄카는 자신의 침대 위에 있는 남자에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지 않도록 입을 막고 문을 닫은 다자이는 그대로 시선을 낮춰 그녀를 쳐다보았다.


"쉿, 조용히 해 줄 거지?"


눈웃음을 지으며 하는 그의 말에 쿄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거스르는 건 좋지 않다.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쿄카의 답을 듣고서야 손을 뗀 다자이는 그녀를 옆에 앉힌 채 제법 일상적인 대화를 물었다. 전투 훈련은 어땠냐던가, 공부만 할 때보다 힘들겠다던가. 쿄카는 그럴 때마다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바닥을 쳐다보며 기계적으로 답했다. 한참을 겉도는 대화만 하던 다자이는 침대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을 마주보았다. 붉어진 그의 눈을 얼떨결에 마주 본 쿄카는 얼마 안 가 그대로 쓰러지듯 잠들어버렸다. 잠이 든 그녀를 가만히 눕혀준 다자이는 밖에서 나는 인기척에 조용히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쿄카의 방 문이 열리고 들어온 건 아츠시였다. 그는 잠이 들어버린 쿄카를 보다가 피식 웃고는 그녀를 제대로 눕혀주곤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었다.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네. 푹 쉬어, 쿄카."


다음날 아침, 쿠니키다는 영 탐탁치 않은 얼굴로 훈련생들 앞에 루시를 데리고 나왔다. 훈련장은 처음 보는 여성의 등장에 웅성거렸다. 그런 그들을 손뼉을 쳐서 시선을 집중시킨 쿠니키다는 그녀를 훈련생들에게 소개해주었다. 이름은 루시 몽고메리이며, 다른 지역에서 수녀를 하고 있었지만 이번에 수도원으로 발령이 났다고 했다. 그녀가 전투훈련에 참여할 것이라는 말에 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루시는 그에 아랑곳 않고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안녕, 루시 몽고메리예요. 오늘부터 잘 부탁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호오, 기합이 좋네. 그럼 쿠니키다 신부님, 지금부터 시작해도 되죠?"

"…좋을대로."

"네, 네. 그럼 먼저 기초 실력을 테스트해볼까요?"


쿠니키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미 기초는 충분히 닦아두었다. 문제는 없을 것이다. 루시는 그렇게 생각하는 쿠니키다를 비웃듯 훈련생들의 한가운데로 걸어들어갔다. 테스트를 한다며 나선 그녀의 행동에 영문을 모르던 훈련생들은 루시가 가볍게 손가락을 까닥이며 도발하자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자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뭐야, 여태껏 일대일 훈련만 한 거예요? 덤벼봐요."

"…하, 하지만 어떻게."

"음, 그럼 명분을 만들어주죠."


그녀는 생긋 웃고는 허벅지에 달린 홀스터에서 단도를 꺼내더니 옆에 있던 아츠시를 순식간에 낚아채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대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아츠시는 그녀에게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루시는 오히려 팔에 힘을 더 주고 목에 바짝 칼을 대며 웃었다. 그순간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살기에 훈련생들은 살짝 얼었고, 아츠시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루시는 아까와는 다른 섬뜩한 미소를 띤 채 훈련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이 덤비지 않으면 이 친구는 구할 수 없어요. 그래도 보고만 있을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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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7. 24. 23:05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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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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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신거리는 어깨를 감싼 채 비틀거리며 의무실에 도착한 아츠시는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나온 요사노는 아츠시의 상태에 당황하며 그를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침대에 앉힌 아츠시의 옷을 내려본 요사노는 생각보다 심한 상처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츠시의 목덜미 근처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있었으며, 어깨의 한 가운데에는 화상을 입었는지 피부가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요사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약품들을 가져와 아츠시의 상처에 적절한 처치를 하고 거즈를 얹고는 붕대를 감아주었다.


"란포가 그랬구나."

"…네."

"…잠시 자리를 비우마. 편히 쉬고 있거라."

"요사노 선생님?"


의문에 찬 아츠시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요사노는 거칠게 의무실의 문을 열고 나섰다. 란포가 뱀파이어를 적대시하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평소에 조금 더 강하게 말했어야 했다. 란포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알고 있어서 그 공격적인 성향만 보여주지 않는다면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차마 함부로 그의 상처를 헤집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도가 지나치지 않느냐. 아무리 이종족의 피가 섞여 있어도 저항할 수 없는 어린애의 어깨를 그토록 무자비하게 짓이기다니. 요사노는 아무 말 없이 란포의 집무실 문을 열었다. 내내 책상에 엎드려 있었는지 이마가 벌개진 란포가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음, 아키? 무슨 일로…."

"란포, 그대…. 아츠시에게 무엇을 했는가?"

"아츠시군? 으음, 조금 훈계…려나."


훈계? 그게 훈계라고? 분노에 차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란포는 멀뚱히 요사노를 쳐다보았다. 다자이가 말릴 틈은 없었다. 높이 올라간 요사노의 손은 그대로 란포의 뺨을 후려쳤다. 짝, 강렬한 소리와 함께 란포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리고나서 그녀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뒤를 돌아 나갔다. 란포는 얻어맞은 뺨을 가만히 문지르며 다자이를 물끄러미 보았다.


"뭐야, 뭔가 잘못된건가?"

"…뭐, 요사노 선생님이라면 화낼 만 한 일이었지."

"그런가…. 오늘은 꽤 아픈데."

"아, 많이 화나 보였으니까."


세게 닫힌 문을 바라보던 란포는 가만히 다자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닌 듯, 그는 익숙하게 얼음주머니를 건넸다. 란포는 유난히 그녀에게 약했다. 약했다고 해야할까, 무슨 훈계를 들어도 반항을 하지 않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과는 달랐다. 분명히 그녀의 말을 신경쓰고는 있었다. 하지만 쉽게 고쳐지지는 않는 듯, 종종 요사노는 란포에게 이렇게 크게 화를 내곤 했다. 얼음주머니를 베개삼아 다시 책상에 엎드린 란포는 시선을 돌려 다자이를 쳐다보았다.


"음? 왜?"

"아니. 여자애 말인데, 본능이 나오진 않을까?"

"전투훈련 정도로 내 암시는 풀리지 않아."

"…그러면 좋겠지만. 저항하기 시작하면 아츠시가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야."

"잘 알고 있어."

"좋은 사람인 척 하는 거, 도와줬으니까 마무리도 잘 하라고."

"네, 네."


여유롭게 대답하는 다자이를 보며 란포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의 일로 기분은 완전히 바닥에 떨어져버렸다. 이제 더 이상 일할 의욕도 없어. 그렇게 중얼거리는 란포를 보던 다자이는 그를 토닥여주었다. 한편, 요사노는 분노를 다 삭이지 못한 채 거칠게 의무실의 문을 열었다. 아츠시는 그녀를 기다리다 그새 잠들었었는지,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다. 요사노는 그대로 냉장고로 직행해 커다란 볼에 얼음을 털어넣고는 맥주를 따서 한가득 부어 절반 정도를 비우고서야 캬하, 하는 소리를 내며 잔을 내려놓고는 아츠시를 보았다.


"오야, 그새 잠든 걸 깨워버린 모양이구나."

"아, 오셨어요?"

"많이 피곤했을텐데 좀 더 자도 괜찮단다."

"아뇨, 란포씨랑 무슨 일 있으셨나요?"

"늘 있던 일이지."


그렇게 말하며 요사노는 잔을 마저 비우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쭈뼛거리는 아츠시를 침대에 앉히고는 그대로 꼭 끌어안아주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손길은 곧 그의 등을 토닥였다. 부드러운 온기가 닿아오는 것이 기분이 좋아 아츠시는 가만히 눈을 끔벅거렸다. 요사노는 그대로 아츠시를 다시 눕히고는 옆에 앉아 이불을 덮어주며 씁쓸하게 웃었다.


"내 능력이 별로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 같아서 미안하구나."

"아, 아녜요, 지금도 충분히 감사한걸요!"

"내 힘이 네게 역효과만 불러올 것이라 쓰지 못하는 걸 이해해다오."

"그럼요, 전 괜찮아요. 금방 나을 거예요! 하루 정도 자면!"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듯 누워서도 손짓발짓을 하며 설명하는 아츠시를 보던 요사노는 유쾌하게 웃고는 이불을 토닥여주며 알았으니 조금 더 자두라고 말했다. 아츠시는 조금 전의 행동이 제법 머쓱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하곤 눈을 감았다. 아츠시가 잠드는 모습을 본 요사노는 조용히 냉장고에서 맥주를 더 꺼내서 하늘을 벗삼아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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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AU


망향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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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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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쿠니키다는 아침 일찍 란포를 찾았다. 란포는 그가 내민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이미 구두로 보고를 받았는데, 굳이 이런 것 까지 준비할 필요가 있나 싶어 그는 의자에 늘어지게 기대서는 보고서를 천천히 넘겼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란포는 그가 보고서를 올린 이유를 알게 되었다. 우직하게 시킨 일만 해내는 줄 알았더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쿠니키다가 제출한 보고서의 마지막에는 전력 강화를 위한 인력 충원 요청 및 그에 따른 일정표의 수정 요청서가 있었다. 란포는 자세를 고쳐앉고는 아직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운을 띄웠다.


"이 계획은 검토해보지. 지금 당장 인원을 움직이기엔 조금 힘들 것 같아서 말이야."

"…부탁드립니다."

"응, 뭐, 꽤 훌륭한 계획이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격식을 차려 인사를 하고 나가는 쿠니키다를 본 란포는 한참 뒤에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끌어올 수 있는 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평소 인맥이라면, 그리고 그들에게 보여준 품성이라면 충분히 운용할 수 있는 인력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오겠다고 답한대도 금방 사람을 무 뽑듯 뽑아다 옮겨 심을 수는 없었다. 그게 교회의 시스템이었다. 란포는 이 시스템을 아주 싫어했지만, 당장 모든 것을 뒤집어 엎을 정도의 권력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교회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실질적인 위협 뿐이었다. 란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그놈들이 기다리다 지쳐서 사고라도 쳐주면 좋을텐데."

"내가 도와줄까?"

"…아직 안 잤어?"

"뭐, 얘기소리가 들려서 말이야."


졸음이 가득한 눈을 하고 다자이는 가만히 란포의 책상 옆에 기대어 선 채 그를 빤히 보았다. 끔벅 눈을 감았다 뜬 그는 란포의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다 말을 이어갔다. 나라면 충분히 훌륭한 미끼가 되어줄 수 있다는 말에 란포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들고는 의자에 몸을 깊이 묻고 커피를 홀짝였다. 씁쓸한 커피를 한참 입안에서 굴리던 란포는 곧 목으로 커피를 넘기고는 다자이를 빤히 보았다.


"도발하다가 다른 사람들이 말려들면 안 되는데."

"하하, 란포씨. 내가 누구라고 생각해?"

"뭐, 더 좋은 생각이 없으면 그 의견을 써먹도록 할테니까 일단 자두지 그래?"

"음, 그거 좋은 생각이야. 사실 꽤 졸렸거든."


란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다자이는 그대로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비척비척 제 방으로 들어갔다. 작게 혀를 찬 란포는 시계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으로 걸어가 예복을 꺼내들었다. 붉은 옷을 뒤집어쓰고 단추를 채우고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진 그는 모자를 머리에 얹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복도를 걷는 걸음이 썩 가볍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싸워나가는 수 밖에 없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오늘도 쉽지 않은 하루가 될 것 같다.



*


첫 임무가 너무 버거운 것이었을까, 아츠시는 그대로 며칠을 앓아누웠다. 온 몸이 몽둥이로 얻어맞은 것처럼 후들거리고 무거워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요사노가 갖다준 약을 먹고도 꼬박 사흘이 지나서야 그는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 사이에 교황청에서 내려온 공문은 켄지가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교황청의 공문 내용을 읽은 아츠시는 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쿠니키다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자, 쿠니키다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쳐다보았다.


"들어올 때는 노크를 하라고 했을텐데."

"…죄송합니다. 지금, 조금 급해서요."

"뭐가 말이냐."

"이 공문, 사실인가요?"

"그렇다."

"비전투인원도 앞으로는 훈련에 참가시킨다니요!"

"…예외는 없다.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텐데?"


며칠 전에 만난 뱀파이어가 원인이겠지. 사실 그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담담한 말과 함께 꽂힌 날카로운 쿠니키다의 시선에 아츠시는 입술을 꾹 물며 주먹을 쥐었다. 쿄카는 싸움에 말리지 않기를 바랐다. 이 험한 싸움에 몸을 던지는 것은 나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녀마저 전장에 내몰고 있었다. 더 할 말이 없으면 그만 나가보라는 쿠니키다의 말에 아츠시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등을 돌려 나갔다. 쿠니키다는 가만히 닫힌 문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츠시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 소녀, 이즈미 쿄카는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친형제 이상으로 소중한 사이라고 했으니까 아마 그녀에게도 훈련을 시키는 게 내키지 않는 걸테지. 하지만 전쟁이란 건 혼자만 희생한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서 그에 상응하는 대비를 해야 할 뿐이었다. 준비는 얼마든지 해도 모자랐다.


쿠니키다의 집무실에서 나온 아츠시는 구겨진 종이를 다시 펼쳐보며 한숨을 쉬었다. 공문에는 란포의 사인마저 들어가 있어, 이것을 쿠니키다의 독단적인 결정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지금이 비상사태인 건 맞지만, 처음에 란포와 했던 약속은 그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생각한 아츠시는 그대로 란포의 집무실로 향했다. 켄지도 더 이상은 말릴 여력이 없는지 그를 가만히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긴 복도를 지나 란포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아츠시는 물끄러미 문을 바라보다 손을 들어 노크를 했다. 똑똑.


"들어와."

"…실례합니다."

"오, 이게 누구야. 웬일로 여기까지 왔어?"

"…공문에 대해 할 말이 있어서요."

"흐음? 공문?"


고개를 갸웃거리는 란포의 책상 위에 아츠시는 구겨진 공문을 내려놓으며 그 내용에 대해 다시 한 번 물었다. 추기경님의 서명이 들어가 있으니 이미 다 알고 승인을 내주신 게 아니냐는 말에 란포는 볼을 긁적이며 아츠시를 빤히 보았다. 그래서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느냐는 듯한 표정에 아츠시는 주먹을 꾹 쥐고는 말했다.


"처음 약속과 틀리잖아요."

"처음 약속?"

"…시키시는 건 제가 다 한다고 했잖아요."

"아, 그거?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잖아?"

"그래도 쿄카는 아직 어려요!"

"그래서?"

"…네?"


그래서? 란포는 다시 한 번 그렇게 물었다. 아츠시는 대답을 찾지 못한 채 란포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이즈미양이, 전투훈련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란포는 또박또박 한마디씩 끊어가며 말했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늘 웃고 있던 눈을 가만히 뜬 채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갑작스럽게 손잡이를 쥐고 그대로 아츠시의 얼굴에 차를 뿌렸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아츠시가 멍하니 그를 보자, 녹색의 눈동자는 미동조차 없이 아츠시를 마주보며 말했다.


"어리광 부리지 마."

"……."

"전쟁에 예외는 없어. 그리고,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말 끝을 늘이던 란포는 그대로 손을 뻗어 뒤에 있는 옷걸이에 걸려있던 지팡이를 들어 그대로 아츠시의 어깨를 후려쳤다. 갑자기 느껴진 통증에 아츠시가 휘청거리며 주저앉자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걸어와서는 늘 웃던 것처럼 눈을 휘며 지팡이의 끝으로 어깨를 찍어눌렀다. 지팡이가 닿은 부분에서 느껴지는 격한 통증에 아츠시는 미간을 찌푸리며 비명을 질렀다. 괴로운 비명소리가 집무실을 채우는 것에도 신경쓰지 않고 란포는 아츠시의 어깨에 지팡이를 누른 채 끝을 꾹 눌러 돌리며 말했다.


"너희들을 거둔 순간부터 칼자루를 쥔 건 나지, 너희가 아니야."

"…크윽."

"필요없어지면 언제든 잘라버릴 수 있다는 걸 명심해. 나한테는 그럴 권리도, 힘도 있거든."


그렇게 말하며 란포는 아츠시의 비명소리에 달려온 다자이가 그의 손을 잡아 지팡이를 거둘 때까지 손을 떼지 않았다. 다자이가 강제로 그를 아츠시에게서 떼어놓고서야 란포는 의자에 앉아 그대로 의자를 뒤로 돌렸다. 턱을 괴고 창 밖을 쳐다보기만 하는 란포를 보다가 아츠시를 일으켜서 데리고 나온 다자이는 머리를 긁적이다 그의 어깨를 보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많이 놀랐지?"

"…네…."

"미안해, 란포씨가 조금 예민해져 있어서. 음, 상처는 요사노 선생님에게 보여주는게 좋겠다."

"…알겠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건 내가 대신 사과할게."

"…아니에요. 저도 생각이 짧았어요."

"글쎄,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이 마음에 드는데, 난."

"…다자이씨."


욱신거리는 어깨를 잡은 채 자신을 쳐다보는 아츠시를 보다 다자이는 피식 웃고는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 모습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는지 아츠시는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하고는 요사노가 있는 의무실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다가 시야에서 아츠시가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다자이는 란포의 집무실로 돌아가 문을 닫았다. 란포는 이미 돌아앉아 있었지만 그의 책상 위에는 씹다 버린 사탕 막대가 여러 개 늘어져있었다. 다자이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입에서 사탕을 뺏었다.


"란포씨, 거기까지."

"내놔."

"안 돼."

"왜!"

"말했잖아, 내 먹이가 당분으로 끈적해지는 건 싫거든."

"…짜증나, 진짜. 이놈이고 저놈이고."


란포는 연신 투덜거리며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다자이는 그런 그를 보며 웃고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주었다. 그래, 알고있어. 란포씨가 제일 애쓰고 있다는 건. 그 말에 란포는 책상을 두드리기를 멈추고 그대로 고개를 숙여 책상에 이마를 대었다. 투덜대는 건 여전히 멈추지 않았지만, 다자이는 그런 란포를 지켜보다가 그의 뒷머리를 가만히 쓸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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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7. 20. 23:53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08.


=====================


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


란포의 집무실에서 나온 아츠시는 그대로 벽에 기대어 주저앉아버렸다. 더 이상 서있을 수가 없었다. 어젯밤부터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끔찍한 몰골의 구울과 늘어진 시체, 그리고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느껴야 했던 무시무시한 살기까지. 심지어 돌아오자마자 한 보고를 듣고 다자이도 만만치 않은 살기를 내비쳤다. 아마도 둘이 눈 앞에 대치하고 있었다면 그 살기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갔을 지도 모른다. 쿠니키다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아츠시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가만히 그를 부축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아츠시가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죄송해요, 신부님."

"오늘은 힘든 하루였으니까 그만 가서 쉬어라. 방까지는 데려다주마."

"…감사합니다."


쿠니키다는 그대로 아츠시를 방까지 데려다 주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아츠시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쿠니키다는 그런 아츠시를 흘끗 보고는 푹 쉬라며 방을 나갔다. 아츠시는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옷을 벗어두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무겁게 감겨오는 눈꺼풀을 이길 재간은 없었다. 돌아누워서도 부들부들 떨리는 팔과 다리가 혹독한 하루를 실감하게 했다. 그동안 스스로가 엄청 긴장했었음을 새삼 깨달으며 아츠시는 의식의 끈을 놓았다.


한편, 아츠시를 데려다주고 집무실로 돌아간 쿠니키다는 보고서에 집중하지 못하고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다자이놈이 그렇게 살기를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본 적 없던 살기에 자기도 모르게 다자이를 쳐다봤었다. 다자이가 살의를 띨 만한 존재가 나타났다는 건 여태껏 소소하게 이어져 온 그들과의 전쟁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 것일까?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내일부터는 조금 더 강하게 훈련하는 수밖에 없다.


보고를 할 때에 뿜어져 나온 다자이의 살기도 무시무시했지만, 그 뱀파이어가 아츠시에게 드러낸 살의도 만만치 않았다. 듣기로 뱀파이어들은 자신들과 타종족이 섞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그래서 그렇게 무시무시했겠지. 그나마 뱀파이어들이 활동하기를 꺼리는 시간대라서 아무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한숨을 내쉰 쿠니키다는 전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성물방입니다.]

"나다."

[오, 신부님 아니십니까? 무슨 일이시죠?]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

[…정말입니까?]

"그래. 별로 유쾌하지 않은 소식을 전해 미안하군."

[아닙니다. 좀 더 많은 무기가 필요하겠군요.]

"그렇다. 그리고 각 성물방의 결계도 강화하도록 소식을 전해줘."

[네, 알겠습니다!]

"부디…몸 조심해라."

[신부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래."

[신의 가호가 있기를.]

"신의 가호가 있기를."


전화를 끊은 쿠니키다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가 노트북의 모니터에 스케줄을 띄우고는 일정의 조정에 들어갔다. 누군가가 옆에서 보면 일중독자라고 하겠지만, 불안을 떨칠 수 있는 방법은 일에 몰두하는 것 뿐이었다. 일을 하고 있을 때면 오롯이 신경을 그 곳에만 쏟을 수 있었다. 그 때만큼은 잡생각도 들지 않았다. 머리를 비우고 기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지금은 기도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


"여전히 칙칙한 곳에 살고 있구만, 아쿠타가와 녀석."


주황색 머리의 사내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에 발을 들이며 작게 투덜거렸다. 물론 빛 아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고는 하지만, 달빛조차 비치지 못하게 암막을 쳐놓은 이 곳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네온사인의 화려함을 좋아했고, 샹들리에의 불빛을 사랑했다. 그래서 그런 반짝이고 화려한 사람들 틈에 언제나 섞여 살았다. 하지만 아쿠타가와는 달랐다. 그는 화려한 불빛은 질색했다. 그리고 그에게 인간이란 먹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사내는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의 비명소리가 아우성치는 지하감옥을 지나자, 막 식사를 마친 아쿠타가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형형한 푸른 눈을 마주한 사내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식사를 방해한건가?"

"아뇨, 막 끝낸 참입니다."

"그래, 그런 것 같네."

"…요코하마에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아아, 수확도 있었고."


수확이 있었다는 츄야의 말에 아쿠타가와의 시선이 그에게 꽂힌다. 츄야는 촛불이 가만히 흔들리는 그 방이 익숙한 듯 찬장에서 꺼낸 유리잔에 와인을 따라 한 모금 마시고는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맞은 편에서 자신이 말하길 종용하는 듯한 시선을 한참 받고서야 츄야는 자신이 확인한 것을 말했다. 하프 뱀파이어와, 그들과 함께 행동하는 엑소시스트의 존재. 그리고 고개를 기울인 채 와인잔을 보던 그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뭐, 그 놈의 모습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 녀석들하고 함께 있겠지."

"…그 자리엔 없었던 모양이군요."

"원래 기가 막힐 정도로 도망은 잘 갔으니까."

"눈으로 확인하지 못해 아쉽네요."

"뭐, 어차피 조만간 싫어도 보게 될텐데. 몸 상태는 어때?"

"…움직일 만은 합니다."


그 말에 츄야는 작게 혀를 찼다. 움직일 만 하다니. 다자이가 폭주를 하고 나간 뒤로 백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회복에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였는데도 아쿠타가와가 다자이에게 뺏긴 것은 회복이 더뎠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뱀파이어의 자연치유력과 인간의 피를 섭취하며 얻는 회복력이면 충분히 재생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쿠타가와는 정기적으로 피를 쏟아내며 재생했던 조직들이 괴사하는 괴로움을 반복해서 겪고 있었다. 다자이가 무슨 짓을 한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저 녀석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들을 수 있을까하는 조금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츄야는 남은 잔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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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7. 12. 00:21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07.


========================


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


"벌써 아침이 되었네요…."

"밤새 고생했다. 돌아가면 씻고 좀 쉬어."

"그럼, 난 먼저 자러 갈테니까. 아침은 질색이거든."


그렇게 말하며 다자이는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지 않는 사이에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갑자기 눈 앞에서 일어난 일에 아츠시는 가만히 눈을 끔벅거렸다. 켄지와 쿠니키다는 이미 익숙한 지 어깨를 으쓱이고는 아직 넋을 놓고 있는 아츠시를 데리고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온갖 피로가 몰린 기분에 아츠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속은 아직도 울렁거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눈을 감고 차분히 가라앉히니 버틸 만은 했다. 그 사이에 잠들었는지, 기내방송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비행기가 착륙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곧 이 비행기는 하네다 공항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아츠시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몰려드는 잠을 겨우겨우 깨고 있었다. 켄지도, 쿠니키다도 그새 잠이 들었었는지 다소 몽롱한 표정으로 착륙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살기는 매우 익숙한 감각이었기에 아츠시는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일어난 그에게 승무원이 다가와 제지하는 순간 살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쿠니키다의 핀잔에 조용히 사과를 하고 다시 자리에 앉은 아츠시는 주먹을 꼭 쥐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무슨 일이냐, 아츠시."

"…살기를 느꼈어요."

"살기?"

"…뱀파이어가 이 비행기 안에 타고 있어요."


아츠시의 말에 쿠니키다는 재차 확인을 했다. 확실히 있는 거냐는 물음에 아츠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당장 착륙하는 비행기에서는 누구도 움직일 수 없었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는 동안, 세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누가 뱀파이어인지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인파에 섞여들었다가는 그들이 위험해질 가능성도 있었다. 어쩌면 다자이는 직감적으로 이 사실을 눈치채고 먼저 돌아가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전부 내릴 때까지 살기는 다시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결국 그들은 커다란 수확이 없이 비행기에서 내려야 했다.


"정말로 있던 게 맞나?"

"정말이에요. 제가 잘못 느낄리가 없어요."

"그렇겠지. 나도 반쪽짜리의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거든."

"?!"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 들려온 소리에 아츠시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는 검은 레이스 양산을 들고 화려한 체인 장식이 달린 모자를 쓴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우산의 그늘 아래서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다 싱긋 웃었다. 부드러운 웃음이 오히려 위화감을 더했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세 사람을 한 번씩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잔뜩 긴장한 그들을 보던 남자는 피식 웃고는 손을 내저었다.


"아침은 별로 상태가 안 좋아서. 너희들하고 지금 여기서 싸울 생각은 없어."

"그럼 일부러 얼굴을 비친 이유가 뭐지?"

"음, 보고 싶은 얼굴이 있어서 말이야."

"…이 녀석인가?"

"반은 그렇고, 반은 아니고. 뭐, 녀석은 없네."


그럼 다음에 보자. 그렇게 말하고 남자는 지루하단 표정으로 뒤를 돌아서 사람들 틈에 섞여 들어갔다. 그 남자의 뒷모습을 보던 아츠시는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비오듯 땀을 흘리는 아츠시를 본 켄지는 가만히 그를 부축해 차로 데리고 갔다. 뒷좌석에 가만히 그를 앉히고는 차를 몰고 가며 쿠니키다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수도원에 도착하자마자 겨우 정신을 차린 아츠시를 데리고 쿠니키다는 추기경의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짧은 노크소리에 안에서 이어지던 대화소리가 끊겼다.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이야, 쿠니키다군. 좀 늦었네?"

"…있었나."

"뭐, 내가 달리 갈 곳이 어디 있다고. 안 그래, 란포씨?"


어깨를 으쓱이고는 빙긋이 웃으며 말하는 다자이를 잠시 노려본 쿠니키다는 시선을 돌려 란포에게 그간의 일을 보고했다. 대량발생한 구울은 뱀파이어, 카지이 모토지로의 소행이었으며 그를 처치한 것은 다자이였다는 보고에 란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고를 하고 한참을 머뭇거리던 쿠니키다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돌아오는 비행기에 뱀파이어가 하나 타고 있었습니다."

"…뱀파이어가?"

"주홍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가진 남자였습니다."

"흐음…."

"…화장품 냄새가 났어요."


갑자기 끼어든 아츠시의 말에 표정이 가장 먼저 변한 건 다자이였다. 주황색 머리카락, 푸른색 눈, 그리고 화장품 냄새. 그 세 단어에서 떠오르는 존재는 딱 하나 뿐이었다. 다자이의 눈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에게서 피어나오는 무시무시한 살기에 쿠니키다와 아츠시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란포는 팔꿈치로 다자이를 가볍게 건드리며 두 사람에게는 나가보라고 손짓을 했다. 고개를 꾸벅이고 나가는 두 사람을 보던 란포는 그대로 다자이에게 곁눈질을 했다.


"아아, 미안해, 란포씨. 나도 모르게 그만."

"…엄청 흥분했네. 누군데 그래?"

"음, 오래된 친구지. 아주 오래된."


그렇게 말하며 다자이는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새로 우려낸 홍차에 각설탕을 하나씩 집어넣었다. 하나, 둘…. 퐁, 퐁. 가볍게 물보라를 일으키는 찻잔을 바라보던 다자이는 티스푼을 들어 어느새 가득차버린 각설탕을 녹여내기 시작했다. 란포는 턱을 괴고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조용히 깃펜을 들어 서류에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 묘하게 고요한 오후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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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