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호스트레이독스'에 해당되는 글 145건

  1. 2016.07.05 망향 06.
  2. 2016.07.03 칠석(七夕)
  3. 2016.07.02 함께, 걸어가겠습니다.
  4. 2016.07.02 헌화(獻花)
  5. 2016.06.30 선의와 공포의 경계에서
  6. 2016.06.29 망향 05.
  7. 2016.06.28 망향 04.
  8. 2016.06.26 모순(矛盾)
  9. 2016.06.26 숨.
  10. 2016.06.26 격투씬 백업
2016. 7. 5. 00:18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06.


========================


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


다자이가 여유롭게 발을 들여 놓은 곳에는 인간의 사체가 주욱 늘어서 있었다. 마치 정육점의 고기처럼 사슬에 매달린 시체들을 보던 다자이는 손가락으로 시체를 슥 밀고는 그 너머로 한 발짝 발을 옮겼다. 그러다 묘한 위화감에 슬쩍 발을 떼자, 앞의 바닥이 무너져내렸다. 아무 생각 없이 내딛었다면 그대로 함정에 빠질 뻔 했다. 다자이는 낮게 휘파람을 불며 무너진 바닥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멀쩡한 바닥에 발을 딛은 그는 그대로 지그재그로 바닥을 밟으며 나아갔다. 그 끝에는 모니터로 구울과 한참 전쟁이 붙은 정원을 지켜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아아, 누군가 했더니…."

"이야, 다자이씨. 백 년 만입니다?"

"그만큼은 안 되지 않았나?"

"더 됐죠. 제가 여기에 자리를 잡은 게 백하고도 삼십년 전이니까요."

"헤에, 그 뒤로 처음인가?"

"아마도 그렇죠. 당신이 폭주했대서 돌아가지 않았거든요."

"호오, 그건 현명한 판단이었네. 아니었다면 그때 죽었을 테니까."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 다자이는 그의 옆에서 모니터를 함께 지켜보았다. 그 공간에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둘은 그저 한참을 위에서 인간들이 분투하는 모습만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먼저 손을 움직인 건 이미 그 자리에 있던 자였다. 그는 아주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품에서 칼을 꺼내 그대로 다자이에게 꽂으려고 했지만 그 공격을 피한 다자이는 여유롭게 그의 손목을 잡아 뒤로 꺾었다.


"아야야야, 아파요, 아픕니다!"

"카지이. 이런 수는 나한테 안 통하는 거 알잖아?"

"하하, 그랬죠, 참. 너무 오랜만이라 잊었네요."

"언제까지 시체를 갖고 놀 셈이지?"

"뭘 새삼스럽게 물어보십니까?"


당연히 제가 만족할 때 까지죠. 그렇게 말하며 카지이는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었다. 다자이는 그의 말에 작게 한숨을 쉬고는 카지이에게서 뺏은 칼을 들어 가만히 그의 심장을 향해 겨누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걸 전부 없애던지, 당하던지. 그 외의 선택지는 주지 않았다. 그저 물 흐르듯 손을 놀려 그대로 그의 심장을 향해 칼을 움직일 뿐이었다. 카지이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이였다. 다자이가 유예를 주지 않고 내리꽂은 칼 끝이 심장에 닿기 직전에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동시에 카지이가 만들었던 구울들은 시체로 되돌아가 바닥에 늘어졌다.


"자, 됐죠? 이제 그만…."

"아아, 그럴까?"


덤덤하게 웃으며 다자이는 그대로 칼을 카지이의 심장에 찔러넣었다. 내가 순순히 칼을 거둘 리가 없잖아? 나지막이 들려온 목소리에 카지이는 당했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두어 걸음 물러났지만, 심장에 타격을 받은 채로 이어지는 다자이의 공격을 받아낼 수는 없었다. 아츠시와 쿠니키다, 켄지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카지이는 바닥에 쓰러진 채 천천히 스러지고 있었다. 그 뒤에서 정육점의 고기마냥 걸린 시체들을 보던 아츠시는 몰려오는 역겨움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한 번 빈 속을 게워내고 있었고, 쿠니키다는 그런 그를 보더니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고 무너진 바닥 너머로 발을 내딛었다.


"아, 거기 조심해. 함정이 있으니까. 오른발부터 지그재그로 뛰면 돼."

"…번거롭게 해놨군."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야."

"상당한 악취미를 가진 자였나보네. 네놈과 아는 사이냐?"

"뭐, 그렇지. 내가 모르는 녀석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애들 뿐인걸?"


다자이의 말에 쿠니키다는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고는 카지이가 남긴 흔적을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대단한 수확은 없었다. 카지이는 그저 인간의 공상으로 쓰인 책 몇 권과, 자신이 실험한 것에 대한 결과를 하루하루 기록한 일지만을 남겼을 뿐이다. 쿠니키다는 그 일지를 빠르게 넘기며 문장들을 읽어내려갔다. 그 안에는 카지이의 각종 실험과 그에 대한 실패담들이 전부 적혀있었다. 쿠니키다의 눈에 들어온 페이지를 제외하고는. 그 페이지에는 몇 줄의 문장이 적혀있었다.


[각 사체에서 궁극의 부위를 적출해 봉합시켜보았다. 하지만 반혼술을 써도 혼은 깃들지 않았다. 퍼펫도 통하지 않았다. 심장이 필요하다.]


그 문장을 읽은 쿠니키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 그를 본 다자이는 따라오라며 고개를 까닥이고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가 커다란 철문을 열어젖혔다. 철문 너머에는 기다란 수술용 침대가 놓여있었고, 그 위에는 어느 유명한 소설의 한 장면과 닮은 여기저기 기운 자국이 있는 시체가 누워있었다. 쿠니키다는 대놓고 인상을 쓴 채 다자이를 노려보았고, 다자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네놈들은 이런게 취미인가?'

"아니, 카지이 녀석이 이상한거야. 보통 이렇게까지 안 한다고."

"…어느쪽이든 최악이군."

"뭐, 저 녀석이 움직이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잖아?"


확실히 그랬다. 그 사체에 붙은 몸들은 제법 건장한 근육질이었기에 그것이 일어나 움직인다면 제법 버거웠을 것이다. 쿠니키다는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품에서 성수를 꺼내어 가볍게 엄지를 적셔 사체의 이마에 긋고는 기도문을 읊으며 성수를 적신 천으로 가만히 사체를 닦아 내려갔다. 그 장면을 잠시 지켜보던 다자이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그 방에서 나왔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카지이가 쓰던 기구를 둘러보던 그는 카지이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 쿠니키다가 기도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만 돌아가지."

"아, 할 일은 다 끝났어?"

"…그래."


썩 유쾌하지 않은 표정으로 답한 쿠니키다는 먼저 지상으로 올라가버렸다. 다자이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낮게 휘파람을 불며 손을 움직여 경고문이 적혀 있는 붉은 버튼을 누르고는 지상으로 올라갔다. 다자이까지 올라탄 차가 산길을 빠져나갈 때였다.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낡은 리조트가 무너져 내렸다. 의외로 별 다른 추궁을 하지 않은 쿠니키다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차를 몰아 공항으로 향했다. 그들이 공항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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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7. 3. 02:44

[문호스트레이독스]


칠석(七夕)


나카지마 아츠시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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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읏차, 들어갑니다!"


아침부터 사무실이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문을 쳐다본 아츠시는 커다란 화분을 들고오는 타니자키에 놀랐다. 타니자키가 들고 온 화분에는 풍성한 대나무가 꽂혀있었다. 응접실의 옆에 화분을 내려놓은 타니자키는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 위치를 다시 한 번 체크했다. 그런데 웬 대나무?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오미가 준비해 온 종이와 끈을 옆에 내려놓고서야 아츠시는 며칠 뒤가 칠석이라는 걸 깨달았다.


"…칠석이구나."

"응, 맞아요. 해본 적 있어요?"


나오미의 질문에 아츠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칠석에 대한 건 동화책을 잠깐 본 정도고, 말로만 들었었다. 고아원에서 이런 걸 했던 기억은 없었다. 이런 걸 한다더라, 하고 어렴풋이 얘기야 들어본 적 있지만 그런 행사를 해 줄 정도로 그 사람들은 인정이 많지 않았다. 나오미는 아츠시에게 길게 자른 종이와 펜을 건넸다. 그가 영문을 몰라 그걸 물끄러미 보자 나오미는 배시시 웃곤 말했다.


"소원을 적으시면 돼요. 그리고 그 종이를 나무에 묶는 거랍니다?"

"그렇군요…."

"아츠시씨는 어떤 소원을 빌 건가요?"

"나오미, 소원은 비밀이잖아?"

"에에, 어쨌든 달고 나면 다 보이게 되는 걸요?"


입술을 비죽이 내밀며 투덜거리던 나오미는 금세 타니자키와 둘만의 대화에 빠져버렸다. 이미 그들의 기행(?)에도 익숙해진 아츠시는 그들을 뒤로 하고 종이를 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소원, 소원이라. 뭘 빌어야 하지? 지금까지 사는 것에만 급급해 뭘 하고 싶은지, 어떻게 되고 싶은지 따위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갑작스럽게 그걸 종이에 적으라고 하니 머릿속은 점점 새하얘져갔다. 뭐, 칠석날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좀 더 생각해봐도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츠시는 잠시 적기를 미뤄두었다.


"아, 그렇지. 근처 강가에서 칠석 축제도 할 거예요. 칠석이 가까운 주말엔 항상 하거든요."

"헤에, 재미있겠네요."

"다 같이 놀러갈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라,버,니?"

"어? 응, 괘, 괜찮지 않을까…? 허락만 받으면 말이야."


곤란한 웃음을 짓던 타니자키는 곧 슬쩍 시선을 돌려서 쿠니키다를 바라보았다. 조용히 일을 하면서도 얘기를 다 듣고 있던 쿠니키다는 머리를 긁적이다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주말이고 하니 괜찮겠지. 그렇게 말하자 작은 환호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쿠니키다는 그런 사람들을 보다 물론 일은 하고 가야한다며 강조했지만, 이미 들뜬 사람들은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결국 그들은 일은 잠시 미뤄둔 채 강가로 조금 빠른 걸음을 했다. 축제를 하는 강가는 준비로 떠들썩했다. 간이무대에서는 사람들이 음향을 확인하고 있었고, 축제장소의 시작임을 알리는 현수막은 이미 걸려있었다. 그 너머에서는 사람들이 각자 준비해 온 즐길 거리를 매대에 전시해놓고 자기들끼리 분주하게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아츠시는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우와-, 굉장하네요, 축제라는 거!"

"…축제도 가본 적 없는거냐? 아츠시."

"에, 뭐…, 딱히 그런 걸 보여주거나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니까요."


그것 참 팍팍한 시설이었군 그래. 축제만의 각종 즐길거리에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는 아츠시를 보며 쿠니키다는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하루 정도는 하고 싶은대로 하게 둬도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쿠니키다는 또 한 명의 어린이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침 칠석 축제라 구색을 갖춰 입은 것 같은 기모노의 소녀의 눈은 새로운 것을 발견한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사람이 많으니 조심해라."

"…네."

"아츠시는 바보니까 네가 잘 챙겨주고."


그렇게 말하자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츠시의 손을 덥썩 잡고 인파 속으로 향했다. 쿠니키다는 조금 뒤에서 느긋하게 그들을 따라가며 그 나름의 방법으로 축제를 즐겼다. 란포는 과일사탕을 잔뜩 사서 천천히 설탕조림의 달콤함과 과일의 새콤함을 즐기고 있었고, 사장님과 요사노는 어느새 언덕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간단한 안주거리와 함께 맥주를 잔뜩 마시고 있었다. 조금 뒤에 간이무대 근처에서 물에 빠져있는 지금까지 어디있는지 알 수 없던 자살매니아도 약 1명 구조했으며, 아츠시와 쿄카는 어느새 금붕어 건지기에 열중하고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건진 건 한 마리도 없었다. 나오미는 타니자키가 사격으로 따낸 커다란 곰인형을 안은 채 걸어다니고 있었다. 땅거미가 지고 하늘에 별이 잔뜩 뜰 때까지 그들은 축제를 즐겼다.


"사람이 정말 많긴 하네요."

"뭐, 축제니까."


사장님과 요사노가 잡아둔 자리에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 탐정사의 인원은 제법 많았다. 노느라 출출해진 배를 채우기 위해 먹거리 장터에서 음식들을 사와 늘어놓자, 너나 할 것 없이 그 주변에 빙 둘러앉았다. 타이밍 좋게도 그들이 둘러앉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폭탄인가 싶어 놀랐던 아츠시와 쿄카도 어느새 넋을 놓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새를 못참고 선심을 써서 쿄카에게 건넨 과일사탕을 다시 먹어버린 란포는 나오미에게 잔소리를 들으며 입술을 비죽이 내밀었고, 나중에야 사탕이 없어진 걸 본 쿄카는 나오미가 새로 사 온 사탕을 받았다. 달달한 설탕과 함께 포도알을 가만히 입안에서 굴리던 쿄카는 그 단맛이 기분좋은지 배시시 웃었고, 그 웃음을 본 나오미는 쿄카를 와락 끌어안아버렸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당황하던 쿄카는 곧 적응했는지 가만히 포도알만을 입에서 굴리고 있을 뿐이었다.


불꽃놀이도, 다같이 먹는 저녁식사도 끝나고 정리를 하고 기숙사에 돌아온 아츠시는 씻고 자리에 누워서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다 쿄카에게 시선을 돌렸다. 장지문 너머에서 이부자리를 펴고 있던 쿄카는 아츠시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아츠시는 볼을 긁적이다가 아침의 일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말이지? 응접실 옆에 놓인 탄자쿠(短冊)에 소원을 쓰면 된대. 쿄카는 어떤 걸 쓰고싶어? 그렇게 말하자 쿄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곧 그녀는 잘 모르겠다고 답하고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아츠시는 닫힌 장지문을 보다가 너무 갑작스럽게 물었나 싶어 머리를 긁적이고는 천장을 바라보고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사무실에 놓인 대나무에는 이미 몇 장의 종이가 걸려있었다. 언제 쓴 거지, 이 사람들? 그렇게 생각하며 아츠시는 종이를 들고 펜을 잡아서 글씨를 써내려갔다. [여기에 오래 있을 수 있게 해주세요.] 조금은 애틋한 소원이었지만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은 그것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곳에 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사람들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동료였다. 그래서 더 오래 함께 하고 싶었다. 그 소원을 담아 아츠시는 탄자쿠를 가만히 대나무 줄기에 묶었다.


오래, 오래.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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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7. 2. 21:56

[문호스트레이독스]


함께, 걸어가겠습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히구치 이치요


전력 60분 주제 : 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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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일기예보같은 건 원래 신경쓰지도 않았기에 하늘을 보던 아쿠타가와는 가만히 걸음을 옮겼다. 마음에는 언제나 비가 내리고 있었으니 크게 상관 없었다. 언제쯤 그칠지도 모르는 비를 끌어안고 사는데 몸이 조금 젖는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딱히 걸음을 서두르지도 않았다. 서두를 필요도 없었기에. 주변에선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이들이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지만 아쿠타가와는 그 안을 유유자적하게 걸어다녔다.


"아쿠타가와 선배!"

"…히구치인가."


급하게 자신에게 우산을 들이미는 여자를 아쿠타가와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밝은 노란색의 머릿결이 태양과 같은 여자였다. 이름은 히구치 이치요. 이 음습한 세계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딱히 필요없는 오지랖도 잘 부릴 정도로 무른 사람이었다. 일례로 이미 젖은 이에게 우산은 필요없음에도 그녀는 자신에게 우산을 들이밀고 있었다. 쓸데없는 친절이다. 받을 필요도 없다. 어설픈 친절은 짜증만을 불러올 뿐이다. 아쿠타가와는 언제나처럼 그녀에게 호통을 쳤다.


"필요없다!"

"하지만, 지금은 몸이 많이 약해지셔서 위험해요!"

"이깟 몸이 무슨 대수란 말이냐!"


아쿠타가와의 일갈에 히구치는 말을 멈췄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쿠타가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을 두려워 하는가, 아니면 자신이 하는 말에 분노를 품는가. 어느 감정을 갖고 있다고 해도 아쿠타가와에게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문제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녀의 태도가 조금 달랐다. 눈빛에서 확고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물고 주먹을 쥐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아쿠타가와 선배."

"…?"


짝.


화려한 소리와 함께 아쿠타가와의 고개가 돌아갔다. 어디서 감히, 이 계집이! 화가 치민 아쿠타가와는 그대로 라쇼몽을 그녀의 목에 바짝 들이댔다. 하지만 히구치는 물러서지 않았다. 상사를 때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그녀는 눈을 돌리지 않았고, 그를 똑바로 쳐다본 채 입을 열었다.


"자신을 가볍게 여기는 말씀은 하지 말아주세요, 선배."

"…건방지구나, 히구치."

"화가 난다면 이 자리에서 절 죽여버리셔도 상관없어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목숨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 스스로의 목숨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저도, 검은 도마뱀도 전부 당신을 경외해서 모였고 그래서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아쿠타가와 선배가 무너져버리면 우리도 있을 곳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니까 부디, 몸을 더 소중하게 생각해주세요. 무리하지 말아주세요.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지 말아주세요. 저에게 기대어달라는 주제 넘은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제발 부탁드립니다. 혼자 걸어가지 말아주세요. 함께 걸어갈 수 있게 해주세요!"

"…네가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자격이라도 된다고 말하고 싶은거냐?"


만약 그렇다면 정말 건방진 여자였다. 그 말에 히구치는 고개를 저었다. 가로젓는 고개와 함께 세차게 돌아갔다 마주한 눈에는 슬픔이 가득차있었다. 아까는 증오, 지금은 슬픔. 여러가지 감정에 쓸려가느라 바쁜 여자였다. 한심하게 그녀를 쳐다보고 있자, 히구치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제가 바라는 건, 그저 선배가 뒤를 돌아봤을 때 한 걸음 뒤에 제가, 그리고 검은 도마뱀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아쿠타가와 선배.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에요."

"…하나부터 열까지 정말 건방지구나."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확실히 그랬다. 마음을 먹고 라쇼몽을 제대로 휘두르면 죽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녀의 실종은 포트마피아가 알아서 덮을 것이었고, 특별히 문제될 것도 없었지만 아쿠타가와는 그녀의 손에서 우산을 빼앗아들고 말했다.


"이번 일은 불문에 부치겠다. 하지만 다음은 없다."

"…!!! 감사합니다, 아쿠타가와 선배!"


그 사이에, 그렇게 요란했던 빗줄기는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변덕스러운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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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7. 2. 01:09

[문호스트레이독스]


헌화(獻花)


다자이 오사무 & 나카하라 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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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습에 당했다―.


그게 가장 처음 받았던 통보였다. 다자이는 부하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야습에 당해? 누가? 소식을 전하러 온 부하는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답했다. 츄야씨가, 당했습니다. 그 말에 다자이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츄야가? 죽을 때가 됐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츄야가 누워있는 방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함께 해오면서 그보다 강한 사람을 보기란 쉽지 않았다. 아니, 아마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그런 츄야가 당했다고? 그런 일을 할 정도면 꽤나 뛰어난 암살자인가. 턱을 문지르며 혼자 머리를 굴리다 문을 열자 침대에 누워있는 파트너가 보였다.


"이게 무슨 꼴이람…."


아직 정신은 돌아오지 않은 듯 했다. 의료반이 신속하게 치료는 했지만 아마 신경계에 작용하는 독이 칼날에 발라져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과연, 야습에 독이라. 정신을 못 차릴 만도 하네. 팔짱을 끼고 가만히 그의 침대를 바라보던 다자이는 걸음을 돌려 방을 나섰다. 부하를 대동하고 건물을 나간 그가 가장 먼저 간 곳은 츄야가 습격을 당한 곳이었다. 야심한 시각에 실력이 좋은 녀석을 습격하려면 방법은 두 가지. 그의 움직임을 상회하거나, 그의 움직임을 제한하거나. 하지만 츄야의 움직임을 상회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녀석들은 츄야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방법을 썼겠지.


"과연, 그렇군."


전투의 흔적은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충격으로 떨어져 뒹구는 낡은 파이프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칼 한 자루. 아마도 그 칼에 독이 발라져 있던 거겠지. 다자이는 장갑을 낀 손으로 가만히 칼을 들어 손수건에 감싼 다음 부하에게 건넸다. 칼을 건네받은 부하는 곧바로 의료반으로 향했다. 칼을 떨어트린 것으로 보아 그 놈도 성한 상태로 돌아가진 못한 것 같았다. 뭐, 상대가 상대니까. 어지러이 찍힌 발자국을 보던 다자이는 어깨를 으쓱이곤 골목을 나갔다.


"이 정도면 최소한의 의리는 다 한거겠―지?"


혼자 중얼거리던 다자이의 눈에 띈 것은 그 골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꽃가게였다. 마침 국화철이었기에 그 곳에는 크고 탐스러운 국화가 잔뜩 놓여있었다. 문득, 재미있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자이는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며 꽃집으로 걸었다. 꽃집의 아가씨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음, 국화꽃을 좀 사고 싶은데요."

"몇 송이나 드릴까요?"

"흠…. 네 송이요. 하얀 것으로."


흰 국화, 검은색 양복, 붕대투성이인 얼굴을 본 그녀는 안타까운 미소를 지으며 꽃을 꺼내들었다. 소중한 분을 잃으셨나봐요. 그녀의 말에 다자이는 애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특별히 예쁜 꽃으로 골라주겠다며 꽃이 가득 담긴 통을 부드러운 손길로 뒤적였다. 그 녀석에게 그런 정성까지는 필요 없다고 하려다, 이왕 하는 거 좀 더 정성이 들어간다고 문제가 될 것은 없기에 그만두었다. 곧, 네 송이의 국화가 정성스럽게 검은 리본에 싸여 다자이에게 건네졌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위험했다. 하마터면 웃을 뻔했어. 값을 치르고 나와서 가볍게 국화꽃으로 어깨를 두드리면서 다자이는 작게 웃었다. 방에 돌아와 국화를 시들지 않게 하려고 적당한 그릇에 물을 담아 꽂아놓은 그는 그 중 한 송이를 들고 츄야가 잠들어있을 방으로 향했다. 방 주인이 잠들어있으니 노크는 필요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연 다자이는 안의 상황에 조금 놀랐다. 그 새 깨어난 츄야는 소파에 늘어져있었고, 바닥에는 반쯤 쏟아진 물병과 컵이 뒹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체력인거야? 신경계 독이라고 했는데. 혈청이 그렇게 금방 나왔을 리는 없고. 그렇게 생각하며 츄야에게 다가가 그를 가만히 흔들었다. 츄야는 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움찔거렸다.


"…누구야."

"츄야, 정신이 들어?"

"…물."


사실은 놀려주고 갈 생각이었지만, 이런 모습을 보니 의욕이 반쯤 죽어버린 다자이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물병과 컵을 주워 탁자 위에 올려놓고 다른 컵에 수돗물을 받아서 건넸다. 그 물을 받아마신 츄야는 다시 늘어진 채 기절해버렸고, 다자이는 이를 어쩔까 하고 고민하다가 이불을 가져와서는 그에게 덮어주고 잠시 그를 쳐다보다 나갔다. 품에는 아까 사온 꽃 한 송이를 놓은 채.


그 다음날이었다. 뒤에서 유난히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등에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얻어맞은 몸을 웅크리던 다자이는 고개를 돌려 배짱도 좋게 저를 친 사람을 보았다. 그와 동시에 얼굴에 날아온 건, 어제 정성스럽게 골라온 그 꽃이었다. 다자이는 꽃을 손에 들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화가 난 표정의 츄야를 쳐다보았다. 츄야는 부들부들 떨더니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난, 아직, 안, 죽었어! 이 자식아!!"

"하하, 그렇지?"

"멀쩡한 사람을 죽이다니, 무슨 수작이냐!"

"아니, 난 그냥 네가 빨리 깨어났으면 해서."


뭐가 어째? 그런 놈이 그 꽃을 들고 와? 그렇게 말하며 버럭대던 츄야는 곧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의료반에게 강제로 붙잡혀 끌려갔다. 다 나으면 너부터 팰 줄 알아!! 끌려가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츄야를 보던 다자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빨리 깨어났지만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건 나쁘지 않았지만 나머지 꽃이 쓸모없게 됐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다자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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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스트레이독스]


선의와 공포의 경계에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이야기.


=======================



날이 더워졌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옷차림이 바뀌는 건 아니었지만 거리의 풍경은 많이도 바뀌었다. 아쿠타가와는 아직도 거리의 분위기에 적응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으며, 적응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조용히 한 걸음 떨어져 이방인처럼 도시를 바라볼 뿐이었다. 도시는 화려하고 적적했으며, 조용하고 시끄러웠다. 그리고 그 어느 곳에도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도시를 바라보던 그는 걸음을 옮겼다. 사무실로 돌아가니 히구치와 히로츠가 뭔가를 급히 숨겼다.


"…뭘 하고 있었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쿠타가와 선배!"

"…히구치."


조용히 그녀를 부르자 히구치는 시선을 피한다. 그동안 이런 적은 없었는데, 웬일이지 싶어 조금 더 추궁하려고 했다. 아마 보스의 부름이 없었다면 그랬을 거다. 전화를 받으며 등을 돌리는 뒤에서는 안도의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여튼 숨기는 건 정말 못하는 녀석이다.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 그렇게 생각하며 통화를 마친 아쿠타가와는 보스를 만나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히구치는 그의 뒤를 바로 따라왔다.


"부름을 받으신 겁니까?"

"…그래."

"이번엔 어떤 임무일까요?"

"…네가 신경 쓸 게 아니다."


그 한마디에 히구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정말 귀찮은 여자다. 딱 잘라버리지 않으면 옆에서 어떻게든 버티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 재능도, 적성도 아무리 봐도 마피아에는 맞지 않는 인간이다. 그래, 차라리 유치원 선생이라도 하면 모를까. 아쿠타가와는 입을 가리고 가볍게 콜록거리다 보스의 집무실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오, 그래, 들어오게."

"…부르셨습니까."


아쿠타가와는 긴 테이블 너머의 보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보스는 그를 보다가 빙긋이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곧 요란한 폭죽소리가 들리고 주변이 밝아졌다. 아쿠타가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따라가지 않아 그저 멀뚱히 테이블을 보고만 있었다. 테이블에는 각종 음식이 차려져 있었고, 그 주변에는 검은 도마뱀의 일원들이 모여있었다. 남몰래 얘기하고 있던 건 이것이었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보스가 태연하게 자리를 권했다.


"자, 이건 자네를 위한 연회일세. 그 쪽에 앉게."

"……."

"뭐 하고 있나? 어서 앉지않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마음에 드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거부할 수는 없었다. 자신에게는 거부권이 없다. 그 사실을 아쿠타가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보스, 모리 오가이의 선량한 눈빛 뒤에는 그 어느 것보다 무서운 이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그에게 맞설 만한 사람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하물며 자신은? 이 곳이 아니면 갈 데가 없는 그저 가련한 한 마리의 개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부정하면서까지 그의 호의를 거절할 정도로 배짱이 있지도 않은 인간이었다. 아쿠타가와가 자리에 앉자, 모리가 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고? 그러니 즐기게, 제군들."

"예에~!!"


이 사람의 공포를 아는 지 모르는지, 아래 녀석들은 신이 나서 먹고 즐기고 있었다. 하여튼 한심한 족속들. 그러니 평생 위로는 올라가지 못하는 거다. 고개를 가볍게 저은 아쿠타가와는 말없이 음식을 입에 넣었다. 마음에 들면 좋겠네. 그렇게 말하는 모리에게 그는 상투적으로 맛있다고 말하고는 식사를 이어나갔다. 이렇게 갑작스런 선의와 그 뒤에 도사리는 음험한 기운 사이에서 갈등하는 음식은 도대체 맛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단단한 무언가를 살기 위해 씹어삼킬 뿐이다. 그래,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 언젠가 그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자신을 다잡으며 아쿠타가와는 아슬아슬한 연회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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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6. 29. 23:55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05


=======================


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


방에 돌아온 아츠시는 훈련을 하느라 엉망이 된 옷을 벗어 던지고 가볍게 샤워를 했다. 그리고는 내내 옷장에 걸어두었던 코트를 꺼냈다. 그렇게 무거운 천이 아니었는데도 새삼스럽게 옷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쿠니키다 신부님은 분명히 처음에 정식으로 일을 맡으려면 백 일 정도는 지나야 할 거라고 하셨는데. 생각보다 빨리 다가온 실전의 기회에 아츠시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신축성이 좋은 바지를 입고, 단정한 셔츠를 입고는 거울을 보며 단추를 채우는 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단추를 채우고 문을 열자 쿄카가 그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쿄카?"

"임무…가는 거야?"

"응, 생각보다 빠르지?"

"그러네."


고개를 끄덕인 쿄카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말없이 아츠시의 코트 안주머니에 넣으면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츠시가 영문을 몰라 그녀를 마주 내려다보자 쿄카는 그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고는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말하고 방으로 돌아가버렸다. 쿄카가 돌아가고 나서 한참 문을 쳐다보다가 시계를 본 아츠시는 여유 부릴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부랴부랴 짐을 마저 챙기고는 코트를 걸쳤다. 서둘러 쿠니키다의 집무실로 가자, 먼저 도착한 켄지가 인사를 건넸다.


"왔어요?"

"네, 저…신부님은요?"

"아, 잠시 확인할 게 있으시다고 해서요."

"그렇군요."

"식사는 했어요?"

"아뇨, 아직…."

"음, 차라리 빈 속이 나을거예요. 뭘 먹는 것 보단 말이죠."


켄지의 말에 아츠시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그에게 물었다. 현장에 가본 적이 있냐고. 켄지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볼을 긁적였다. 가본 적이야 있죠. 그 틈에서 살아남기도 했고. 켄지의 말에 다소 놀란 아츠시는 조심스럽게 그를 토닥여주었다. 켄지는 이미 다 지난 일이라며 웃었지만 평소의 쾌활한 웃음과는 어딘가 달랐다. 어쩐지 어색해진 공기를 깬 것은 문을 열고 들어온 쿠니키다와 다자이였다.


"준비는 다 된 모양이군. 그럼 출발하지."

"네!"


세시간 여를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 곳은 휴양지의 느낌이 물씬 나는 한가한 섬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너무도 평화로운 곳이라 아츠시는 이 곳의 어디에 구울이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쿠니키다가 수배해 둔 차에 올랐다. 쿠니키다는 차를 몰아 목적지로 향하면서 간단하게 설명을 했다. 이 근처에 잠들어 있던 뱀파이어가 깨어나서 인간을 잡아먹고는 그 시체를 갖고 놀고 있다며 그는 혀를 찼다. 사람은 함부로 갖고 놀라고 있는 게 아닌데 말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쿠니키다는 증오의 눈초리로 다자이를 노려보았다. 다자이는 쿠니키다의 시선에 말없이 웃고는 그의 말을 받아 설명을 이어갔다.


"저 안쪽에 지금은 쓰지 않는 리조트가 있거든. 거길 근거지로 삼았다나 봐."


가끔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을 잡아먹은 것 같다고 해. 실제로 목격된 구울들 중에 그나마 형체를 알아볼 만한 것들은 실종자 리스트에도 올라와 있었다고 하더라고. 다자이의 말에 아츠시는 어쩐지 속이 울렁거렸다. 형체를 알아볼 만한 것이 있다고 하면 역시 그렇지 않은 것도 있겠지?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츠시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걸 본 켄지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그를 가만히 토닥여주었고, 다자이는 어깨를 으쓱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그렇게 얘기하는 사이, 차는 낡은 리조트 앞에 멈췄다.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자물쇠도 제대로 걸려있지 않은 녹슨 문을 열자,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밀려났다. 아츠시는 부들부들 떨면서 품에 있는 성수병을 점검하고 총을 꺼내어 안전장치를 풀었다. 예전엔 화려했을 정원도 지금은 잡초가 우거진 숲으로 변해있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몇 개의 낡은 테이블만이 이 곳이 예전엔 사람들이 여유롭게 차를 마시곤 했던 곳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만히 공기를 들이마시자,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비릿한 냄새와 썩은 냄새가 풀냄새와 함께 들어왔다. 결국 아츠시는 구석으로 달려가 위액을 뱉었다. 켄지가 빈 속이 나을 거라고 했던 말을 그제야 뼈저리게 느낀 그는 가만히 입가를 닦고 숨을 고르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으아아악!!"


눈이 마주쳤다. 구울이란 이렇게 흉측한 것이었던가. 이미 눈알이 빠져 함몰된 거죽에서는 구더기들이 기어다녔고, 뼈는 기이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이 들려왔다. 흐어어어, 그어어어, 그 소리를 신호로 여기저기서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광기에 찬 눈빛을 한 구울들이 나왔다. 쿠니키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두 자루의 총을 꺼내 손에 쥐었고, 켄지도 말없이 너클을 손에 쥐었다. 아츠시는 급하게 뒤로 물러나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구울에게 총을 쏘았다. 탕, 탕. 엉망인 조준 덕에 그 놈은 팔만이 겨우 날아갔을 뿐이다. 남은 팔을 내밀며 필사적으로 기어오는 구울을 걷어찬 것은 다자이였다. 다자이는 태연하게 놈의 두개골을 밟아 부수면서 말했다.


"있잖아, 아츠시군?"

"네, 네!"

"구울에게 물려서 감염되면 자네도 구울이 되거든?"

"…뭐라고요!? 그런 중요한 건 미리 말씀해 주셨어야죠!!"

"깜박했어. 그래도 지금 말했잖아?"

"하, 하아…."

"뭐, 그래서 내가 할 말은 알겠지? 나야 원래 인외(人外)니까 괜찮지만, 너희들은 어쨌든 조심하는 게 좋아."

"…저 놈의 말대로다. 물린 부분은 도려내거나 끊어내지 않으면 계속 퍼져서 네가 죽게 될테니 조심해라."


다자이와 쿠니키다의 말을 들은 아츠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켄지도 담담하게 대답은 했지만 제법 긴장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리고 다자이가 밟아버린 구울이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그 자리에 있던 다른 구울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다자이는 자신에게 덤벼드는 구울들을 한 마리씩 제거하면서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그의 행동을 눈치 챈 쿠니키다가 어딜 가느냐고 다그쳤지만, 다자이는 웃음을 띠고는 자기는 맡은 임무가 있으니 먼저 안을 둘러보겠다고 말하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쿠니키다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구울들에게 총을 쏘며 투덜거리고는 아츠시와 켄지에게 말했다.


"최대한 빨리 이 곳을 정리하고 다자이의 뒤를 쫓는다. 알겠나?"

"네!"

"그럼, 신의 가호가 있기를."

"신의 가호가 있기를."


서로의 안녕을 비는 신호와 함께, 세 사람은 맞대고 있던 등을 떼면서 구울들을 향해 돌진했다. 비명소리와 총성이 빈 정원을 가득 메웠다. 다자이는 그 소리를 뒤로 하고 여유롭게 리조트 안으로 들어갔다. 1층에서 지도를 발견한 그는 가만히 지도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곤 휘파람을 불며 지하로 내려갔다. 리조트의 지하는 위에 그 낡은 건물이 있다고는 생각이 되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과연, 방공호로 쓸 예정이었던 모양이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스위치가 있는 벽에 다다른 그는 가만히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부드러운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실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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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6. 28. 23:42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04.


====================


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


아츠시와 쿄카가 온 지도 달포가 흘렀다. 아츠시는 제법 익히는 속도가 빠른데다 기본적으로 체력이 좋아 금세 상위 스킬을 배우게 되었다. 다만 그에 대한 쿠니키다의 평가는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 기본 스킬은 괜찮은데 응용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늘 대련하고 있는 상대의 평가이니 이 이상 정확한 것은 없었다. 란포는 쿠니키다의 보고서를 가만히 턱을 괴고 내려다보며 손가락으로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다 혼자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보고서를 덮었다.


"뭐, 부족한 건…실전으로 때워보는 건 어때?"

"…예? 그 말씀은…."

"나카지마 아츠시에게 지금부터 실전훈련을 시키자는 말이지."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보통 삼개월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만."

"그렇긴 하지만 그는 습득이 빠르잖아?"


그렇긴 했다. 웬만큼 어려운 동작의 연계도 하루이틀 정도면 익혀냈다. 그는 기본적으로 전투에 대한 본능적인 센스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걸 발휘할 틈도 없이 생명을 위협당하는 공포 속에서 살아왔겠지. 세상은 어느 쪽도 아닌 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으니까. 쿠니키다는 란포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는 알겠다는 뜻을 표했다. 란포는 가만히 머리를 긁적이다가 잔뜩 쌓인 파일들 중 하나를 쿠니키다에게 건넸다. 파일을 받아든 쿠니키다는 그 자리에서 펼쳐 자료를 읽어보았다.


"…추기경님."

"응? 왜 그러나, 쿠니키다군?"

"저,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그에게는 아직 난이도가 높은 임무가 아닐지요."

"어차피 견습으로 따라가는 거잖아? 본격적인 현장 임무도 아니고."

"그러니까 조금 더 쉬운 걸로…."

"아아, 괜찮아, 괜찮아. 그 애도 현실은 알아야 하니까."


태연자약하게 웃으면서 손을 내젓는 란포를 보다 쿠니키다는 가만히 파일을 덮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 란포는 '정 힘들면 자네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도 되네'라고 말했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별로 내키지는 않아도 교육 담당인 걸 어쩌겠는가. 오랜만에 현장에 나갈 생각에 쿠니키다는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한참을 고민하던 쿠니키다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는지 파일을 덮고 훈련장으로 향했다.


"읏차!"

"…와아악! 켄지씨, 포기, 포기!"

"어라, 벌써요?"


켄지와 대련 중이었던 건가? 애석하게도 켄지는 아츠시와 전투상성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켄지는 상당한 괴력을 갖고 있는데다 몸 자체가 튼튼해서 단순한 기술의 연계로는 그를 이기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아츠시는 응용력도 부족해 아직까지 켄지를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의 괴력으로 공중에 떠올랐다 내려온 아츠시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쿠니키다는 가볍게 안경을 고쳐쓰고 두 사람을 불렀다.


"아츠시, 켄지."

"아, 쿠니키다 신부님."

"무슨 일이세요?"

"따라와라."


쿠니키다는 둘을 사무실로 데리고 와서는 임무에 관한 파일을 건넸다. 『구울 제거』 라는 파일을 본 켄지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내용을 가만히 살폈다. 표정이 굳은 채 서류를 보고 있는 켄지를 보던 아츠시는 조금 뒤에야 자신이 들고 있는 파일을 읽어내려갔다. 구울은 뱀파이어가 피를 빨고 남은 시체가 주술로 되살아 난 존재들이다. 지금 오키나와 섬에 있는 버려진 병원쪽에서 구울의 목격 정보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들을 제거하라. 거기까지 소리를 내서 읽은 아츠시는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쿠니키다를 쳐다보았다.


"뭐냐, 아츠시."

"저, 저도 가는 겁니까?"

"그러니까 부른 거다."

"…자신 없는데요."

"추기경님의 명령이다."


추기경님이? 왜? 그렇게 생각하며 아츠시는 쿠니키다를 봤지만 쿠니키다는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너희 둘만 보내는 게 아니라 나도 함께 갈테니 안심하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조금 뒤, 노크소리가 들리고는 쿠니키다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그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민 것은 다자이였다. 그는 느긋하게 웃으면서 쿠니키다가 한 소리를 쏟아내기 전에 자신의 용건을 말했다.


"란포씨가 너희들을 따라가 주라던데."

"…네 놈도 가는거냐."

"뭐, 그렇게 됐어."


그렇게 말하고 웃는 다자이를 보면서 쿠니키다는 인상을 팍 쓴 채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추기경님은 무슨 생각이신 건가. 물론 다자이가 전력으로써 동행한다면 그건 환영할 일이었다. 쿠니키다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의 능력이 자신을 한참 상회한다는 것 정도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신입에 대한 전력 보강이라고 생각하자. 그렇게 결론을 내린 쿠니키다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지시를 내렸다.


"출발 시각은 지금으로부터 세 시간 뒤인 여섯 시 정각이다. 그 때 까지 준비를 마치고 여기로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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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6. 26. 10:41

[문호스트레이독스]


모순(矛盾)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갈망, 갈증, 구원을 바라던 그 끝에 찾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끓어오르는 숨을 가볍게 기침으로 뱉어내며 아쿠타가와는 조용한 거리를 걸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을 걸으면 오히려 생각이 들끓어 올랐지만 그런 걸 신경쓰는 편은 아니었다. 원래부터 머릿속은 상념의 도가니탕이었다. 말을 배우기 전부터 그랬다. 서로 훔치고, 죽이고, 배신하는 일이 만연하는 그 세계 안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모든 것을 짓밟고 일어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라쇼몽(羅生門)은 최고의 이능력이었다. 찢고, 죽이고, 빼앗는다. 그것이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포트마피아의 개가 된 지금도 그 삶에 변화는 없다. 그저, 끝없는 갈증이 하나 더 생겼을 뿐이다.


새로운 욕구는 아주 성가신 것이었다. 쿨럭, 아쿠타가와는 가만히 입가를 가리고 다시 한 번 숨을 뱉었다. 서양의 무슨 학자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 대해 설명을 했다는 걸 언젠가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지만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새로운 욕구는 증오만이 소용돌이치던 감정을 내리누르고 올라앉기에는 충분했다. 여기서 무너지면 그 지옥같은 삶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는 공포와 함께 찾아온 것은 그렇다면 나를 쓸모있다고 인정하게 만들겠다는 욕구였다. 참으로, 참으로. 스스로가 애석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아쿠타가와는 그것에 집착했다.


[그 쓰레기같은 능력.]


쓰레기, 같은, 능력. 아쿠타가와는 가만히 그의 말을 곱씹으며 쏟아지는 총탄을 막아내고 적을 찢어발겼다. 도움은 필요없다.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건 스스로를 나약하다고 증명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혼자서 모든 일을 해내야한다. 그러기 위해 단련했고, 그러기 위해 강해졌다.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 모든 걸 씹어삼키고 올라서겠다. 그 사람의 눈에 나만이 보이도록. 그것이 지금 아쿠타가와를 그 자리에 있게 만드는 생각이었다.


"…지독한 상사다, 당신은."


아기토의 입 안에 적을 쳐넣으면서도 잊혀지지 않는 말들에 아쿠타가와는 입을 굳게 다문다. 앞으로도 수많은 비명소리와 시체로 쌓아올린 길을 걷겠지, 당신이 돌아봐주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마음 어디에선가는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정말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빛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을. 그와 동시에 그는 절실히 알고 있었다. 그 길이 예정된 지옥으로 향하는 불바다라고 해도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다자이씨에게―.


"……."


할 일을 끝낸 장소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을 눈 앞에 펼쳐놓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딱히 역겹지는 않았다. 지독하게 익숙해져 있던 것이기에. 아쿠타가와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아직 숨이 붙어서 도망가려던 놈을 찔러버렸다. 사와라비에 꽂혀 몸이 불쑥 솟아올랐다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는 그 자리를 떠났다. 앞으로 몇 구의 시체를 더 쌓아올려야 할 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받을 때까지 멈출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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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6. 26. 07:17

[문호스트레이독스] 


숨.


-


가끔 그냥 깊이 깊이 숨을 뱉어본다. 마치 그대로 조용히 모든 게 멈출 것 처럼. 처음엔 자연스럽게 가라앉을 것 같다가, 가슴 어딘가에 숨이 걸린다. 그러면 나는 켈록, 하고 짧은 기침소리와 함께 살아나는 것이다.요즘 들어 그런 횟수가 늘었다. 다만 그저 몸이라는 녀석은 제가 얼마나 놀란 지 아느냐고 시위하듯이 으레 딸꾹질이라는 놈을 달고 나온다. 참 까다롭다. 온전히 내 것인데도 나는 이놈을 마음대로 다루지 못한다.숨 쉬는 것 하나가 이리 괴롭고 힘들어서야 다른 어떤 것을 제대로 할 수 있겠냐마는 인생사 인간 굶어죽을 일은 없다고 그래도 어떻게든 움직이고 돌아가는 구나. 이게 세상의 이치라 한들 내겐 별로 유용하지 않은 것을.오늘도 괴롭도록 가득찬 숨을 밀어내듯 뱉어내며, 나는 세상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다.


ㅡ다자이 오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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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6. 26. 07:00

[문호스트레이독스]


츄야 격투 썰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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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


어깻죽지에 느껴지는 통증에 츄야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반대쪽 주먹을 내질렀다. 비명소리와 함께 손에 닿는 둔탁한 느낌이 제대로 한 방 들어갔다는 걸 알려주었다. 눈 앞의 전투에 집중하느라 뒤에서 다가오는 그림자를 눈치채지 못했다.불찰이었다. 멀쩡한 손을 놀려 칼을 뽑아든 츄야는 욱신거리는 통증에 한숨을 내쉬고 눈 앞에 몰려든 놈들을 보았다. 칼을 가볍게 돌려 그러쥐고 자세를 잡자, 무너지지 않은 모습에 당황한 듯 놈들은 잠시 주춤거렸다. 고작 이 정도로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나? 나도 한참 얕보였던 모양이네. 속에서 치미는 화에 뻣뻣해진 목덜미를 가볍게 돌린 츄야는 칼을 쥔 손가락을 가볍게 까닥이며 웃었다.


"왜 그래, 아직 다른 덴 멀쩡하다고? 하던 건 마저 해야지. 덤벼."


오히려 이쪽에서 도발을 하자 당황했는지 놈들은 주춤거렸다. 츄야는 가만히 시선을 움직여 놈들을 훑었다. 어디보자. 하나, 둘, 전부 네 놈인가. 하나는 저 뒤에 뻗어있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주춤거리던 무리 중 한 명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든다. 츄야는 가볍게 고개를 틀면서 그대로 내질러오는 주먹을 잡아 팔을 꺾었다. 그리고 무릎을 올려 녀석의 복부를 찍어올렸다. 쿨럭, 괴로운 숨을 뱉는 소리가 들렸다. 오, 소리 좋고. 바닥에 내던져진 채 부들거리는 녀석을 힘껏 걷어차며 나머지 셋을 본 츄야는 피식 웃었다.


"이제 더 덤빌 놈은 없어?"

"이 자식, 괴물아냐?"

"오, 그건…"


참으로 실례되는 말이네. 사람 맞아. 그렇게 말하며 순식간에 그의 앞으로 도약한 츄야는 그대로 멀쩡한 팔로 스트레이트를 먹였다. 제법 강한 펀치에 얼굴을 잡고 비틀거리는 놈을 보다 그대로 발을 들어 복부를 내리찍듯 걷어찼다. 화려한 소리와 함께 두 놈이 동시에 날아갔다. 이걸 일타이피라고 하던가.


"나쁘지 않네."


낮게 휘파람을 불고 그렇게 말하며 츄야는 혼자 남아있는 녀석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어디, 너 하나 남았는데. 어쩔래?"

"…사, 살려만 주십…! 히익!"

"자비는 부처님한테서나 찾아라. 쓰레기가."


잔뜩 겁을 먹은 사내의 다리 사이에 칼을 던져 꽂은 츄야는 혀를 차며 그대로 발을 움직여 사내의 턱을 걷어차 날려버렸다. 거품을 물고 쓰러진 사내를 보던 츄야는 혀를 차며 바닥에 꽂았던 칼을 빼들고 유유히 골목을 나갔다.


"우두머리라면 부하는 버리지 말아야지."


참 한심한 놈일세. 그나저나 이 팔은어쩐다. 이젠 얼얼한 느낌 정도가 전부였지만 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한동안 제대로 움직이긴 글렀네. 그렇게 생각하며 츄야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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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