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3. 23.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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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3. 15. 00:43
[문호스트레이독스]
~과거 날조 스토리~
Schlecht Melody
[나쁜 선율]
#5. 답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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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사쿠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마피아 '답지 않은' 마피아라고 해야할까. 말단이라고는 하지만 란포는 그가 그저 그 위치에 있고 싶어할 뿐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오다 사쿠의 단련된 근육은 결코 평범한 말단이 가질만한 근육이 아니었다. 가끔 란포에게 음식을 건네주는 손에 박힌 굳은 살의 위치는 그가 오랜 세월 총을 다루던 사람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마도 이 사람이 내 선임이었겠지. 이 정도로 기척을 죽이는 일이 익숙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자이조차도 가끔은 완전히 기척을 지우지 못해 란포에게 들키기 일쑤였는데, 오다 사쿠의 기척만은 가끔 기가 막히게 사라졌다. 그 때문에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서 몇 번인가 그를 공격한 적도 있었다. 거듭되는 란포의 불만에 오다사쿠가 낸 절충안은 방에 들어오기 전에 노크를 하는 것이었다. 똑똑. 오다 사쿠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란포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오다 사쿠의 뒤를 따라 들어온 것은 히로츠였다.

"…히로츠씨."
"몸은 좀 어떤가, 란포군?"
"슬슬 재활에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아."
"그런가, 보스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네. 물론, 다자이님과 나카하라군도."
"…대가를 지불한 만큼 일하지 못할까봐, 인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히로츠는 웃어보였지만 란포는 그의 말을 흘려넘기고는 침대에 걸터앉아 천천히 다리를 뻗어보았다. 조금 종아리가 당기는 느낌이 있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다. 의사가 다녀간 뒤로 딱 삼 주 째였던가. 란포는 제 다리에 감긴 붕대를 새삼스럽게 내려다보다 바닥에 발을 딛어보았다. 목발이 없이 바닥에 발을 딛는 건 오랜만이라 잠시 휘청거리던 란포는 옆에서 오다 사쿠가 내민 손을 잡고 조심해서 균형을 잡았다. 그러나 곧 무릎까지 저릿한 감각이 올라오는 바람에 그는 그대로 침대에 주저앉았다. 히로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져온 과일바구니를 란포에게 내밀며 말했다.

"아직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군."
"…응."
"쉬어두게. 보스에게는 적당히 보고해두겠네."
"…고마워."
"천만에. 자네 덕분에 수월해진 일이 한둘이 아니니까 말이야."

나중에 또 오겠다고 인사를 하고 나가는 히로츠를 보던 오다 사쿠는 흐트러진 란포의 옷 매무새를 다듬어주고는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앉았다. 히로츠가 건넨 과일 바구니에서 사과를 하나 집어 옷에 슥슥 문지르고는 한 입 베어문 란포는 한참을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오다 사쿠의 시선에 그를 마주보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란포를 바라보다가 란포가 품에 안고 있는 과일바구니를 들어서 침대 옆 테이블에 옮겨놓으며 그제야 입을 열었다.

"네가 내 후임이었나."
"그걸 이제 알았단 말이야?"
"…어느 정도 짐작은 했다."
"뭐, 말리기라도 할 생각이야, 선배?"

선배, 란포의 도발적인 발언에 오다 사쿠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저 란포를 다시 한참을 쳐다보다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란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입술을 비죽이 내밀었다가 제 머리에 얹힌 오다 사쿠의 손을 잡아 내려 그의 손에 다 먹은 사과의 심지를 올려두고 웃었다. 오다 사쿠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쓰레기를 처리하러 갔다. 란포는 걸터앉은 자세 그대로 침대에 누워 그저 천장을 바라보았다. 오다 사쿠는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가끔 눈을 보면 란포는 그가 어떤 감정인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아까 흘끗 마주쳤던 오다 사쿠의 눈에는 갈등과 후회가 보였다. 일을 그만둔 것에 대한 후회는 아니라고, 란포는 생각했다. 애초에 그는 왜 마피아에 들어왔던 것이며, 왜 사람을 죽이기를 그만 둔 걸까? 나중에 오다 사쿠에 대해 조금 더 조사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란포는 서랍에 넣어두었던 약을 꺼내 삼키고는 자리에 누웠다. 의사가 준 약은 효과가 좋았는지 란포는 금세 잠이 들었다.

란포가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삼 주 뒤였다. 한달 반여에 걸친 치료를 끝내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된 란포는 오래 지나지 않아 모리의 부름을 받았다. 나 참, 그렇게 부려먹었으면 됐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제법 묵직한 나무문을 두어 번 두드리고 문을 연 란포는 예전에 보았던 금발 소녀에게 쩔쩔매고 있는 모리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란포의 기척에 그를 쳐다본 모리는 웃던 입꼬리를 내려 금세 정색을 했다. 모리의 손짓 하나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버린 방도 제법 공기에 무게를 더했다. 곧 소파로 걸음을 옮겨 앉은 모리는 빙긋이 웃으며 란포에게 자리를 권했다. 란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편하게 손님용 의자에 앉아서 그를 쳐다보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했다. 먼저 눈을 접은 쪽은 모리였다.

"몸은 이제 다 나은 건가, 란포군?"
"뭐, 덕분에."
"자네가 임무에서 다칠 줄은 몰랐네."
"시비 거는 건가?"
"딱히 그런 건 아니야, 오해하지 말게."
"지금부터 할 일은?"
"…얘기를 풀 틈을 주질 않는군."
"숨이 막히는 공간에 오래 있고 싶지는 않아서."
"하하, 그런 건가. 알겠네. 그럼 임무를 주지."

옆에서 잔뜩 긴장감을 조성하는 사내들의 위협에는 아랑곳않은 채 할 말을 한 란포는 모리에게서 임무를 받아 나왔다. 제법 두툼한 봉투를 품에 넣으며 란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쉰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부려먹겠다는 속셈이 가득한 내용에 머리를 긁적이다 모자를 눌러 쓴 란포는 그늘에 몸을 숨긴 채 포트마피아의 본부에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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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7. 3. 13. 01:06

[다자란]

석류. #1

연령반전, 공상과학

==================


다자이의 도발에 아쿠타가와는 입술을 짓씹고는 손을 공중에서 휘저어 다자이의 주변을 감싸듯 창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다자이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각이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촘촘히 자신을 둘러싼 창을 보던 다자이는 작게 감탄사를 뱉고는 해보라는 듯 아쿠타가와를 보며 웃었다. 그의 웃음에 미간을 더 좁힌 아쿠타가와는 그대로 주먹을 쥐어 창을 다자이에게 내리꽂았지만, 그 어떤 것도 다자이에게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다. 바닥으로 부서져내린 조각들을 발로 흩어 치우면서 다자이는 애석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아아, 자네의 공격으로는 역시 죽을 수 없구나."

"다자이씨. …새 프로젝트가 시작될 겁니다."

"응, 알고 있어."

"…모리 박사님이, 돌아오시라고."

"나를?"

"…란포씨도."

"으음, 그건 무리네. 둘 다 돌아가지 않을거야."


돌아갈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애초에 그 곳을 빠져나오지 않았겠지. 그렇게 말하며 다자이는 아쿠타가와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아쿠타가와는 몇 발짝 물러나며 다시 그에게 창을 겨누었지만 창을 내려꽂지는 않았다. 다자이는 그런 아쿠타가와를 보다가 가볍게 그를 스쳐가면서 어깨를 두드렸다. 다자이의 손이 아쿠타가와의 어깨에 닿은 것과 동시에 창은 다시금 부서져내렸다. 아쿠타가와는 다급하게 손을 뻗어 다자이의 소매를 잡았지만, 그는 그저 무심하게 손을 들어서 그의 손을 떼어놓고는 나중에 또 보자고 인사를 하며 등을 돌린 채 철책을 빠져나갔다. 아쿠타가와는 한숨을 쉰 채 이어폰을 꽂고는 휴대폰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짧은 신호 뒤에 전화를 받은 상대에게 아쿠타가와는 간단한 말로 실패를 전했다. 전화 상대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그만 철수하라고 말했다.


한편, 다자이를 뒤로 하고 먼저 집으로 향했던 란포는 문 앞에서 익숙한 사람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언밸런스하게 잘린 앞머리에 검은색 브릿지가 인상적인 청년은 다소 어색한 몸짓으로 란포에게 인사를 건넸다. 란포는 그를 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문을 열고 그를 집안으로 들였다. 란포를 따라 들어온 청년은 어떻게 할 줄을 모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란포가 자리를 권하자 그제서야 소파에 앉았다. 냉장고를 열어서 주스를 따라온 란포는 청년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그의 앞에 잔을 내려놓고 청년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래서,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아츠시?"

"말 안해도 아시죠…?"

"그 얘기라면 거절할건데. 나도, 다자이씨도 돌아가진 않아."

"하지만, 모리 박사님이 또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응, 알고 있어."

"이번에도 많은 아이들이 고통받을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들을 도와주세요!"

"네가 하면 되잖아."

"저 혼자로는 무리예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츠시를 녹색의 눈동자로 지긋이 훑은 란포는 무심하게 유리잔을 들어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으며 아츠시와 시선을 마주했다. 자신을 꿰뚫어보는 것 같은 란포의 눈빛에 잠시 움찔한 아츠시는 곧 고개를 내젓고는 주먹을 꾹 쥔 채 자신의 의견을 말하려고 했다. 그 행동을 막은 것은 란포였다. 란포는 소파에 몸을 푹 묻고 앉아서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상당히 이기적인 주문이네. 모리 박사에게 너 혼자 힘으로 대항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건 칭찬해줄게.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너는 그 자리에 있기를 선택했잖아? 그러면 더 이상 나간 사람에게 매달리지 마. 그 안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도 다하든가. 나나 다자이씨는 박애주의자가 아니라서 네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거든."

"…모리 박사님은."

"안 되면 힘으로라도 데려오라고 했겠지."

"…네."

"한 판 붙을래?"

"그, 그런 생각으로 온 건 아니에요!"

"말로도 설득 실패, 힘을 쓸 생각도 없고. 협상자로는 형편없네, 아츠시."

"…윽, 그, 그렇지만!"

"얘기는 이미 끝났어. 다자이씨가 오기 전에 가는 게 좋아. 난 얼마든지 이 상황을 네게 불리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알겠어요."

"멀리 나가진 않을게. 츄야씨도 있던 것 같은데 안부 전해주고."

"…네."


아츠시는 떨떠름하게 답하고는 일어나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문을 향해 걸어갔지만, 먼저 움직인 것은 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란포의 뒷목을 잡았다. 목을 압박해 들어오는 느낌에 란포는 콜록거리며 남자의 손을 때렸지만, 그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란포의 목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남자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조금 뒤 남자는 자신의 명치께에 닿는 총구에 혀를 차고 란포의 목을 놓았다. 란포는 총을 거두지 않은 채 몸을 틀어 남자를 보며 졸렸던 목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소중한 피부에 멍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그래요, 츄야씨? 보기보다 잔인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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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란] 석류 #Prologue  (0) 2017.03.08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7. 3. 8. 00:58

[다자란]

석류. 프롤로그

연령반전 + 공상과학

======================


몇 년 전에, 정부기관 산하의 연구소 하나가 무너져 내렸다. 이미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곳이라 인명피해는 없었다. 뉴스에서는 지반이 약해서 지진에 무너진 것이라고 했지만, 그날 지진계가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은 발표하지 않았다. 다만 오래된 약품들 때문에 주변이 오염될 우려가 있으니 향후 십 년 간은 사람의 출입을 금지한다고 정부는 발표했다. 연구소 주변에는 높은 철책이 세워졌고, 그 앞의 문에는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걸렸지만 그 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명목상 달아둔 감시카메라가 전부였지만 그조차도 점검을 한 지 오래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런 폐허 속으로 숨어든 사람이 둘 있었다. 그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빠른 걸음으로 철책을 넘어 들어갔다. 절그럭, 가볍게 흔들린 철책 너머에서 콘크리트 파편이 걷어차이는 소리가 났다.



―싫어하는 것.

  주사, 약, 실험, 쥐, 벌레, 생명.


―좋아하는 것.

   너

폐허가 된 연구소의 벽에 새겨진 작은 글씨를 발견한 남자는 쪼그리고 앉아서 카메라에 글씨를 담았다. 그리고는 주변의 파편을 대충 발로 걷고 있는 다른 청년에게 쪼르르 달려가 카메라에 담긴 화면을 보여주었다. 청년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남자가 사진을 찍은 벽으로 저벅저벅 걸어와 그 사이에 손에 집은 콘크리트 파편으로 벽을 내려찍었다. 청년의 행동에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냐며 청년을 뒤에서 끌어안았지만 곧 청년의 주먹에 턱을 얻어맞고는 두어 걸음 물러났다.


"다자이씨, 성희롱으로 고소할거야."

"…우리 사이에 이러기야?"

"응."

"아아, 란포군은 정말 냉정하네."

"그러니까 왜 그런 걸 가져와."

"하지만 어릴 때의 란포군이 귀엽잖아? 응?"

"퍽이나."


란포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자이를 슬쩍 밀어내고는 아직 건물의 형태가 남아있는 지하로 걸음을 옮겼다. 대부분의 중요 자료는 지하실에 보관하고 있었을 테니까. 더이상 전류도, 보안장치도 통하지 않는 철문을 보던 란포는 자신의 뒤를 따라 내려오는 다자이를 쳐다보다 문을 가리켰다. 그러자 다자이는 알겠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고는 살짝 숨을 들이마시고 발을 들어 철문을 걷어찼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나간 문을 가볍게 뛰어넘은 란포는 주변을 둘러보다 비상 전원을 발견하고는 스위치를 눌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은 전력이 돌아가며 마더컴퓨터에 빛이 들어왔다. 우우웅, 묵직한 팬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기동한 화면을 바라보던 란포는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어 눈 앞에 보이는 카드 슬롯에 꽂았다. 철컥, 카드가 맞물리는 소리에 다자이가 몇 개의 커맨드를 입력하자, 화면에 하얀 글씨가 떠올랐다.


[자료를 전부 삭제하시겠습니까?]

yes.


다자이가 짧은 단어를 입력하고 엔터를 누르자, 마더컴퓨터에서 분주하게 데이터가 지워지는 소리가 났다. 이제 몇 군데 남았더라?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자이가 기지개를 켤 즈음, 란포가 그에게 기대서는 핸드폰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다 광고를 하나 발견하고는 내밀었다. 국립 영재교육원. 그럴듯한 슬로건을 내걸고, 제법 번듯한 건물을 배경에 깔아둔 광고에 다자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더니. 다자이의 표정을 흘끗 살핀 란포는 가만히 그의 볼을 토닥이고는 핸드폰의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어떻게 할거야?"

"글쎄? 얼마나 갈 거라고 생각해?"

"억지로 버텨서 삼 년. 성과도 잘 안 나올거고."

"그럼 이번엔 자문위원으로만 들어갈까."

"하아? 목표는 달성했잖아?"

"란포군이 좀처럼 내가 원하는 걸 해주지 않는걸. 다자이씨는 슬퍼요."

"……그냥 죽어."

"그러니까, 자네가 해달라니까."

"그건 싫은데."


가벼운 말다툼을 하면서 데이터가 전부 지워지고 천천히 점멸되어가는 마더컴퓨터의 빛을 보던 두 사람은 마침내 모든 것이 암전되고서야 건물을 나섰다. 데이터가 전부 소멸되는 데 제법 긴 시간이 걸려, 빛을 보며 들어갔던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어두워지는 하늘이었다. 저녁은 어떻게 할래? 앞서가는 란포에게 묻던 다자이는 걸음을 멈추고 날아오는 날카로운 검은 창을 손으로 쳐냈다. 검은 창은 다자이의 손에 닿자마자 형체도 없이 부서져버렸다. 란포는 검은 창이 날아온 쪽을 보다가 가볍게 혀를 찼고, 다자이는 질린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놈의 인기는 도무지 사그라들지 않는단 말이야."

"그럼, 다자이씨, 열심히 해 봐."

"잠깐, 란포군. 어딜 가는거야?"

"집."

"나는?"

"저거 수습해야지. 저녁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하아, 냉정해, 정말로."

"내가 다자이씨한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애정이거든?"

"으응, 고마워서 눈물이 날 정도야, 란포군."

"그럼 뽀뽀라도 해줄까?"

"진짜로?"

"이기고 오면."


그렇게 말한 란포는 다자이가 입술을 비죽이 내민 것을 보다가 가볍게 손키스를 날리고는 여유롭게 걸어갔다. 그런 란포의 뒷모습을 보던 다자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검은 창을 날린 상대를 쳐다보았다. 다자이와 시선이 마주한 그 순간, 공중에서 늘어난 검은 창은 다시 다자이를 향해 쏟아졌지만 다자이는 아무 타격도 입지 않았다.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파편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공터를 울렸다. 쳇.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혀를 차는 상대를 본 다자이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다가 피식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직도 이 정도 실력 밖에 안 되나, 아쿠타가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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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란] 석류 #1  (0) 2017.03.13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7. 2. 27. 01:40
[문호스트레이독스]
마법학교 AU

제목미정

"또 너냐?"
"하하…."
"여기까지 도망 오는 거 지치지도 않아?"
"그러게 말이에요."
"숨만 돌리면 나가라."
"아, 매정하네요, 선배."
"지금 쫓아내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

란포는 책장에 기대어 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는 후배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그 후배의 이름은 다자이. 학교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녀석이다. 매일 치고받는 녀석하고 말이지. 그 쪽은 츄야라고 했던가? 아무튼 이 두 녀석은 하루에도 몇 번씩 쫓고 쫓기며 싸움을 해댄다. 그렇게 싸우다 부숴먹은 기물도, 받은 벌점도 학생부를 까맣게 채울 정도라고 해서 붙은 별명이 한 쌍의 흑역사, 쌍흑이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둘은 거하게 싸운 모양이다. 다자이의 교복에는 군데군데 그을음 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츄야가 가장 잘 다루는 것은 불이었다. 란포는 다자이의 교복을 죽 훑어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옆으로 비키라고 그를 밀어내고는 서고 정리를 시작했다.

"진짜 잘도 여기를 찾네."
"학교 내에서 여기가 제일 안전하잖아요?"
"그래서 하는 말이야."

보통은 이 서고는 잘 못 찾아서 헤맨다고. 학교 지도에조차 매번 위치가 바뀌어서 나타나는데, 이 녀석은 용케도 헤매지도 않는다. 매번 잘도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란포는 한동안 자기가 관리를 잘못했나? 하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다자이가 유난히 감이 좋을 뿐이었다. 이 걸 감이라고 해야 할 지, 운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다자이는 란포가 책을 정리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말을 건넸다.

"그런데 선배, 선배는 오늘도 혼자 여기에 있어요?"
"응. 그게 내 일이니까."
"수업은 들어요?"
"당연하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매번 올 때마다 있으니까요."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란포가 있는 곳은 특별관리 서고다. 각종 고대의 마법부터 저주술이 적힌 책들이 한가득 늘어서있어 함부로 읽는 사람들이 나타나서는 안됐다. 이미 선례도 있어 학교 차 원에서 사서들 중에 전담할 사람을 만들어놓고 그에게 관리 권한을 전부 맡겼다. 학생에게 맡겨도 괜찮은가? 라는 얘기는 끊임없이 나왔지만 외부인력 보다는 내부인에게 맡기는 게, 그리고 여차하면 통제가 가능한 학생에게 맡기는 것이 차라리 안전할 것이라는 결론이 긴 회의 끝에 나왔다. 그리고 지금, 그 서고의 열쇠는 란포가 맡고 있다. 다자이는 자신을 한심하게 쳐다보다 다시 책을 정리하는 란포를 보다가 바닥에서 일어나 옷을 가볍게 털었다.

"잘 쉬었어요. 그럼 가볼게요."
"그래, 가. 다신 오지 말고."
"아, 그건 무리일지도."
"다음엔 내쫓을 거야."
"그 말, 저번에도 했죠?"

다자이는 란포를 보다 눈을 휘며 웃었다. 란포는 멀뚱히 그를 올려다보다 혀를 작게 차고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도서관의 문이 열리더니, 거센 바람이 불어와 다자이를 문 밖으로 날렸다. 밖으로 나동그라진 다자이는 얼마 안 가 벽에 부딪쳐서는 멍하니 드러누웠다. 역시 저 사람은 대단해. 한참을 누워있던 다자이는 곧 다급한 발소리에 이어진 익숙한 발길질을 피하며 몸을 동그랗게 말아 일어났다. 아이고, 딱 교실 앞으로 보내버리다니. 선배도 참 너무하다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란포가 들었다면 분명히 한마디 했겠지만- 도망가려던 다자이는 곧 츄야의 손에 붙들려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눈앞이 핑 도는 기분에 손을 내저으며 다자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츄야, 넌 너무 폭력적이야."
"뭐가 어째?! 아깐 잘도 도망갔겠다!"
"그야, 그렇게 죽일 듯이 쫓아오는데 도망 안 갈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애초에 시비를 걸지 말라고!"
"그건 싫어."
"하아??"
"재미없는 걸."
"…아주 평생 재미 따위 느끼지도 못하게 당장 죽여 버린다, 네놈!!"
"오오, 할 수 있어?"
"…적당히 좀 해라. 또 싸움이냐?"

다자이에게 주먹을 내지르려는 츄야의 손을 잡은 건 쿠니키다였다. 쿠니키다는 츄야를 다자이에게 서 멀리 떼어놓고 돌아와 다자이의 멱살을 잡아 그를 의자에 앉히는 걸로 소동을 일단락 지었다. 물론, 아까부터 그들이 난리를 피운 탓에 이미 교정은 잔뜩 망가졌지만, 그 일에 대한 책임은 나중에 본인들에게 징계가 내려올 것이다. 더 이상 피해를 늘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 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두 사람에게 징계가 내려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교칙 10번 옮겨 적기
2. 교내 청소 30시간
3. 망가진 물건의 복구

징계를 본 두 사람은 인상을 쓰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사실 교내 청소나 물건 복구는 그렇게 심각 한 건 아니었다. 그 전에도 이력이 날 정도로 했었으니까 -거듭 말하지만 이들의 별명은 쌍흑이다. - 하지만 교칙을 10번이나 옮겨 적으라고? 이 학교의 교칙은 재학생들 중에 정말 특이하거나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기억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았다. 듣기로는 교칙만 500조는 된다고 했던 것도 같다. 이걸 어떻게 다 적어. 시간이 나는 대로 한다고 해도 올해 안에는 턱도 없을 것 같은 양이었다. 게다가 벌칙 수행 장소는 교실이나 교무실이 아닌, 도서관이었다. 그 도서관은 다자이는 익히 알고 있고 츄야는 소문만 들었던 곳이었다. 숨은 도서관. 금서를 소장하고 있다는 그 도서관 한쪽에 마련된 책상에 자리해서 빈 종이를 보자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게다가 딴 짓을 하지 못하게 감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란포는 징계 내용이 적힌 양피지를 들고는 두 사람을 번갈아보다 한숨을 내쉬고는 교칙이 적힌 책을 두 권 꺼내왔다. 그 두께를 본 쌍흑의 입에서는 소리 없는 비명이 나왔다. 이걸 어떻게 일일이 넘겨가면서 쓰라는 거야? 아니, 그전에 무슨 놈의 교칙이 이렇게 많아? 세워진 지 수백 년이 된 학교라더니, 이름값은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선뜻 쓸 엄두는 나지 않았다. 란포는 머뭇거리는 두 사람을 보다 이해는 간다는 듯 볼을 긁적이고는 말했다.

"조금 도와줄까?"
"네? 어떻게요?"
"방법이 있지."

그렇게 말한 란포는 자기를 멍하니 바라보는 두 사람의 이마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와 동시에 둘의 머릿속에는 엄청난 글자들이 흘러들어왔다. 이게 무언지 생각할 틈도 없이, 그것들은 머릿속에서 마치 그림처럼 펼쳐졌다. 란포의 손가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그들은 란포가 보내준 게 교칙이라는 걸 알았다. 손가락을 뗀 란포는 이제 책을 넘겨볼 필요는 없을 거라며 높은 의자에 앉아 둘을 내려다보며 얼른 쓰라고 말했다. 더 이상 피할 방법도 없어 두 사람은 펜을 움직여 교칙을 써 내려갔다. 그 뒤로 한동안 도서관은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글씨를 쓰는 소리만이 들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읽던 책을 덮고 의자에서 내려온 란포는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며 두 사람을 내보냈다. 도서관에서 나온 둘은 저려오는 팔을 흔들며 기숙사로 돌아갔다. 다음 날, 두 사람은 등교를 하자마자 교장실로 불려갔다. 교무실도 아니고 교장실이라니, 그 정도로 큰 잘못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영문을 모른 채 불려간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다 평소보다 배는 긴장한 채 교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두 번 노크를 하자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안으로 들어갔다. 교장은 근엄한 표정으로 코끝에 걸친 안경을 고쳐쓰고는 턱을 괸 채 그들을 보았다. 시선에 압도된다는 건 이런 느낌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마른 침을 삼켰다. 목이 괜히 더 바짝 타는 기분이었다. 교장은 손가락을 가만히 두드리다 입을 열었다.

"어제, 징계가 끝난 다음엔 뭘 했지?"
"네?"
"뭘 했느냐고 물었네."
"그냥 돌아가서 씻고 잤습니다. 뭔가 할 만한 상태도 아니었고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교장의 눈빛은 심장이 멈출 것처럼 차가웠지만 다자이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교장은 그의 말 에 잠깐 뜸을 들이다가 란포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없어져? 그 사람이? 왜? 다자이는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교장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짚고는 그가 마지막으로 만난 게 너희들이었다며, 그가 특이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냐고 물었다. 특이한 행동이라. 가만히 생각해보면 수업은 세 시에 끝났고, 정문이 폐쇄되는 시간은 여덟 시였다. 하지만 란포가 그들을 내보냈던 시간은 다섯 시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밖으로 나와 기숙사로 가는 내내 석양이 지고 있었으니까. 징계는 여러 번 받아 봤지만 어제가 그 중에 가장 일찍 끝났던 것 같다. 다자이의 말에는 츄야도 동의했다. 확실히, 교내 청소조차도 쓰지 않는 창고 따위를 청소해야 해서 저녁시간을 넘긴 적이 많았다. 하지만 어제는 제법 여유롭게 씻고 저녁식사까지 마칠 수 있었다. 둘의 말을 들은 교장은 고개를 끄덕 이고는 츄야를 먼저 내보냈다. 다자이는 저 혼자 남아 머쓱한 기분에 가만히 볼을 긁적였다. 교장 은 습관처럼 안경을 올리며 다자이에게 물었다.

"자네는 란포를 잘 아는 모양이더군."
"아…네, 그…어쩌다보니. 하하."
"어떻게 찾았지? 란포가 있는 도서관을."
"그, 가끔 정신없이 도망가다가 문을 열면 꼭 거기더라고요."
"수업시간에 가본 적은 있나?"
"아뇨."

아무리 그래도 수업시간에 빠져나갈 수는 없는데요. 다자이의 대답에 교장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따라오라고 말하고는 교장실을 나섰다. 다자이는 쭈뼛거리며 그의 뒤를 얌전히 따라갔다. 교장이 그를 데리고 간 곳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복도였다. 문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복도는 교실이 있는 곳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교장은 다자이의 등을 툭 밀고는 팔짱을 낀 채 그를 보았다. 다자이는 흘끗 고개를 돌려 교장을 보다가 다시 복도를 쳐다보았다. 문이 어림잡아 스무 개는 되어보였다. 설마, 이 문을 전부 열라고 하시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머뭇거리는데 교장이 입을 열었다.

"어떤 거라도 좋으니 문을 열어보게."
"…전부요?"
"열리는 문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테니 내키는 대로 해도 좋겠지."

열리는 문이 많지 않다고? 그럼 잠겨있다는 건가? 이를 어쩐다. 다자이는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복도를 계속 걸어 다녔다. 문에 가까이 붙어서 세 번쯤 복도를 오갔을 때였다. 철컥. 어디선가 걸쇠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망설임 없이 소리가 들린 문으로 다가간 다자이는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끼익. 조금 뻑뻑하게 열린 문의 너머는 늘 보던 그 도서관이었다. 가만히 뒤에서 그 모습을 보던 교장은 흠, 하고 작게 숨을 뱉고는 도서관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는 제법 넓은 도서관 안을 돌아다니며 란포를 찾았다.

"란포, 있나? 대답하게."

대답은 없었다. 평소대로 라면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나왔을 란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죽 늘어선 책꽂이에 손을 댄 교장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책장 하나를 밀었다. 끼이익, 뻑뻑한 소리를 내며 밀린 책장은 그대로 벽에 강하게 부딪쳤다. 아, 선배가 이거 보면 화낼 텐데. 책장이나 책이 상하는 건 질색하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다자이는 머쓱하게 조금 떨어진 곳에서 교장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책장의 배열이 지금까지 봤던 것과는 조금 달라진 것도 같다. 이 책장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있는 건가? 한참 책장을 기웃거리던 다자이는 교장이 혼자 하기에는 생각보다 많아 보여 다른 책장 하나를 손으로 밀었다. 드르륵. 책장은 아까보다 부드럽게 밀려났다. 그 책장의 뒤에 펼쳐진 풍경에 다자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개를 든 곳에는 란포가 매달려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얼어붙어 있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숨까지 얼어붙는 듯한 한기에 다자이가 할 수 있는 것은 몸을 움츠리는 게 겨우 였다. 도서관 안을 채워가는 한기에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온 교장은 란포를 보다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겨 그를 얼어붙은 벽에서 떼어냈다. 이미 이렇게 될 걸 짐작했다는 듯, 교장은 바닥에 란포를 눕히고 침착하게 그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모습을 보던 다자이는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교장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좋지 않은 일이네."
"선배는…죽은 건 아니죠?"
"음."

교장의 대답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다자이는 그의 애매한 대답에 어깨를 으쓱이고는 란포의 상태를 살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얼어붙어 있었는데, 교복이 조금 해져 있었고 군데군데 잔 상처가 나있었다. 그리고 옆구리에는 미처 말라붙지 않은 피가 있었다. 그 상처는 꽤 깊었는데 무언가에 베였다고 하기 보다는 무언가가 옆구리를 쑤신 것 같았다. 이대로 얼음이 풀리면 다시 피가 흐를 것만 같았다. 다자이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교장선생님."
"뭔가?"
"선배…옆구리에 상처가 굉장히 심한데요."
"…역시 그랬군."
"역시, 라니 뭔가 알고 계시는 군요?"
"자네는 알 것 없네."

알 것 없다고? 아니, 그럼 나는 왜 여기까지 끌려 온 거지? 단순히 문을 열기 위해서 날 데려온 건가? 아니, 이거야말로 토사구팽 아냐? 도서관에 들어오자마자 쓸모없는 녀석 취급이라니. 다자이는 어쩐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교장에게 따지기 위해 말을 하려는 때였다.

"…으."
"정신이 드나, 란포?"
"…교장…선생님?"
"의식은 있는 모양이군. 바로 의무실로 가자."
"…아뇨, 그것보다…."

교장의 말에 고개를 저은 란포는 아직 얼음이 녹지 않은 옆구리를 가만히 누르고 숨을 골랐다. 흐읍, 후. 심호흡을 한 란포는 고개를 숙이며 열쇠를 뺏겼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교장의 눈썹이 약하게 꿈틀거렸다. 열쇠만 뺏겼나? 책은? 채근하듯 묻는 교장을 보던 란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책은 무사하다는 말에 교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자이에게 란포를 의무실로 데려가라고 말하며 도서관의 문을 열었다. 다자이가 제 옆구리를 누른 란포를 안아들고 나온 곳은 의무실의 바로 앞이었다. 저 문이 어디로든 통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다자이는 의무실의 문을 열었다. 요사노는 란포의 상태를 보자마자 침대를 가리켰고, 다자이는 그를 침대에 가만히 눕혔다. 말없이 치료를 받는 란포를 보던 다자이는 눈이 조금씩 감기는 것을 느꼈다. 별로 돌아다니지도 않았는데.

"어이, 다자이."
"…음, 뭐야."
"일어나, 아침이라고."
"뭐…?"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뜬 다자이는 어쩐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천장에, 익숙한 이불. 그리고 지긋지긋한 츄야의 얼굴. 그런가, 방인가. 어제 벌을 받고 돌아와서 씻고 바로 잠이 든 건가. 느른하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는 다자이의 눈에 달력이 들어왔다. 달력의 숫자를 보던 다자이는 가만히 눈을 끔벅이고는 옆에서 옷을 갈아입는 츄야를 찔렀다. 저기, 츄야. 오늘 며칠이야? 실없는 질문에 기가 막힌 표정을 짓던 츄야는 어깨를 으쓱이고 보면 모르냐고 말했다. 아니, 그건 아닌데. 나 어제 하루 종일 뭐했어? 다자이의 질문에 츄야는 미간을 찌푸리곤 답했다.

"너 어제 꾀병부리고 하루 종일 기숙사에서 퍼질러 잤잖아."
"내가? 그랬어?"
"뭐야? 기억 안 나냐?"
"응, 전혀."
"죽을 때가 됐나보네. 언제는 기억력 좋다며?"
"기억력은 좋아."

츄야가 역사 선생님 가발을 태워버려서 복도에서 불장난을 하지 말자는 피켓을 걸고 소금 받으러 다닌 건 아직도 어제 일처럼 기억하거든. 다자이의 말에 츄야는 그런 건 좀 잊으라고 핀잔을 주고는 옷을 마저 입었다. 다자이는 머릿속에 안개가 낀 기분에 다시 침대에 누워 츄야가 나가지 않느냐고 물을 때까지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도대체 어제 나한테는 무슨 일이 있던 걸까? 누군가를 만났던 것 같기도 하지만 어제 일만 생각하려고 하면 졸음이 쏟아졌다. 그대로 다시 잠들 뻔한 다자이는 문득 언젠가 수업시간에 이런 주문을 배웠던 것 같아 눈을 가만히 깜박이다 벌떡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뒤에서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란 츄야가 뭐라고 소리쳤지만, 다자이는 건성으로 사과하고는 그대로 도서관으로 직행했다. 주문, 주문서….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책장을 훑어 책을 집어든 다자이는 빠른 속도로 색인을 확인하고 페이지를 펼쳤다. 거기엔 기억을 지우는 마법과 그 위에 다른 기억을 덧씌우는 마법이 있었다. 어제의 기억이 지워진 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지워진 기억을 다시 돌리는 주문은 없을까? 예비 종이 울리는 소리에 미적미적 교실로 돌아간 다자이는 수업 내내 제대로 집중하지는 못했다. 쉬는 시간에도 노트에 내내 의미 없는 선만 긋는 그를 본 츄야가 뭘 하느냐고 물었지만 다자이는 그를 안쓰럽게 쳐다보다가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고는 말했다.

"난 가끔 네가 부러워, 츄야."
"하? 무슨 소리냐."
"아니, 세상을 너처럼 단순하게 살 수 있으면 정말 좋겠구나 싶어서."
"…뭐야?"
"츄야처럼 단순하게 아무 생각도 없이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시비거냐, 지금?"
"오, 정답이야."
"…죽여 버린다."
"아이코, 무서워라."
"난 네놈이 그렇게 능청 떠는 게 싫어!!!"
"응, 나도 츄야가 싫어."

다자이의 말에 울컥해 그를 한 대 치려던 츄야는 쿠니키다의 만류로 주먹을 내려두고는 그의 책상을 걷어차고는 성질을 내며 나갔다. 아, 작전 실패. 턱을 괴고 그 모습을 보던 다자이는 한숨을 내쉬고 눈치 없는 클래스메이트와 룸메이트를 향한 불만을 속으로 쏟아내며 복도를 거닐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바닥만 쳐다본 게 문제였는지 다자이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장소에 도착해있었다. 그곳은 마치 기숙사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문이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낯설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이쪽에 들어가도 되나, 싶어 고개를 기웃거리는데 그 복도로 이어지는 갈림길의 중간에는 굵은 사슬과 함께 붉은 글씨로 '접근금지'라고 써진 팻말이 걸려있었다. 접근 금지라. 자고로 이런 게 있으면 들어가 보고 싶어지는 게 사람이지. 눈을 빛낸 다자이는 접근금지 줄을 훌쩍 넘어 복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뭔가 재미있는 게 있을까 싶어 문을 열어보려고 했지만, 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혹시나 마법을 쓰면 열릴까 싶어 문고리를 잡은 채 마법 주문을 외운 다자이는 다음 순간 속이 뒤틀리는 느낌과 함께 반대편 벽으로 날아가 버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며 뒤집어진 천장을 돌려놓을 때였다. 복도의 끝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자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서 그쪽을 쳐다봤다.

"누군가 했더니…."
"선배…?"
"수업시간이잖아. 왜 여기 있어?"
"그러는 선배는요?"
"몸이 조금 안 좋아서."
"그런 것 치곤 살기등등하신데요?"

정말 저 사람의 어디에 그런 힘이 숨겨져 있을까 싶을 정도였으니까. 다자이는 찰나의 순간 느꼈던 살기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란포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바닥에 앉아있는 다자이의 머리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몇 번인가 손바닥으로 그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쓰다듬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하던 다자이는 급격하게 쏟아지는 졸음에 란포의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다자이는 또다시 잠들고 말았다. 란포는 그를 들어다 의무실에 던져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얽히지 않기를 바랐는데 이 녀석은 어디서 또 기가 막히게 얽혀들어 오는지. 분명히 기억도 지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교장선생님이 직접. 그런데도 나타났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자신이 맡은 도서관으로 돌아온 란포는 뻐근한 옆구리를 짚으며 해먹에 누워서는 가만히 책을 펼쳤다.

한편, 의무실에서 눈을 뜬 다자이는 시계를 보고 화들짝 놀라 일어나 앉았다. 네 시? 네 시라고? 창밖을 보니 해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넘어가고 있었다. 왜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지? 게다가 나는 왜 의무실에 있고? 요사노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 의무실을 튀어나온 다자이는 몽롱한 머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카락을 흩어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죽을병이라도 걸렸나 싶었지만 다른 데는 멀쩡한 모양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다자이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결론을 내렸다. 기억이 두 번이나 통째로 사라졌다. 즉, 누군가가 자신의 기억을 조작했다는 얘기다. 물론 아침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걸로 확신할 수 있었다. 남의 기억을 멋대로 주무르다니,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다자이는 한숨을 내쉬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렇게 당하고는 못 살지. 하다못해 내 기억이라도 돌려받아야겠어. 다른 곳에는 없어도 란포가 있는 도서관이라면 분명히 기억을 돌릴 방법이 적힌 책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다자이는 도서관의 입구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전엔 별다른 노력이 없어도 가능했는데, 오늘따라 도서관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란포가 문을 열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하며 다른 문을 열기 위해 걸어가는 순간, 다자이는 조금 먼 곳을 스쳐지나가는 익숙한 옷자락을 발견했다. 그 옷자락은 결계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늘 입고 다니던 코트의 끝자락이었다. 이 학교에 있는 모든 결계는 그가 유지보수를 한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선생님을 쫓아가면 뭔가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 다자이는 스스로의 기척을 지우는 마법을 걸고는 조심스럽게 그에게는 들키지 않고, 그를 놓치지도 않을 거리에서 뒤를 밟았다. 예상대로였다. 선생은 매우 낯이 익은 문 앞에 서있었다. 그러나 문을 열지는 않았다. 어라, 왜 안 들어가시지? 의문을 가지며 고개를 내민 순간, 다자이는 눈앞에 나타난 선생님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애써 침착하게 웃었다.

"하하, 안녕하세요, 선생님."
"왜 따라왔습니까?"
"아니, 그게…."
"기척까지 지우고. 계획적인 미행이군요. 그들의 첩자입니까?"
"첩자…라뇨?"

무서운 말씀을 하시네. 다자이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지만 선생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다자이에게 포박 마법을 걸고는 그를 그대로 도서관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도서관 안에는 이미 몇 명의 교사들과 란포가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쪽을 본 사람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짜증, 놀라움, 당황. 이 모든 표정을 한 번에 느낀 다자이는 먹지도 않은 밥이 체하는 기분에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결계 마법 선생은 그 인파들 사이에 다자이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를 미행하고 있더군요."
"어머, 학생에게 미행이나 당하고. 천하의 너새니얼도 한 물 갔네요."
"시끄럽습니다. 그 정도 마법도 눈치 못 챘을 것 같나요? 일부러 쫓아오게 둔 겁니다."
"요즘 너무 평화로워서 둔해진 게 아니라요?"
"많이 지루했나봅니다. 하긴, 그 성질을 풀 일이 있었어야 덜 지루하겠죠."
"뭐예요?!"

버럭 화를 내며 마법을 쓰려던 미첼-그녀는 공격 마법 선생이다. -의 손을 잡아 그녀의 마법을 상쇄시킨 건 란포였다. 그리고 란포는 다자이에게 걸린 마법도 가볍게 풀었다. 바닥에 엎어질 뻔 하다 주저앉은 다자이는 곧 이어지는 딱밤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란포는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왔어?"

란포의 질문에 다자이는 멀뚱히 그를 보다가 볼을 긁적이며 답했다. 기억을 찾으러요. 란포는 입술을 비틀고 인상을 쓰다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다. 다자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기억하고 싶은데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매우 불쾌한 일이더라고요. 다자이의 대답에 란포는 어깨를 으쓱이곤 세상엔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다행인 것도 있는 법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란포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만히 란포의 표정을 살피던 다자이는 곧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는 란포 말고도 자신을 끌고 온 너새니얼, 그와 사사건건이 시비가 붙는 미첼, 그리고 루이자와 교장이 있었다. 제법 화려한 면면이었다. 보통 일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교장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손을 튕겨서 다자이의 주변에 소리를 차단하는 배리어를 치고 교사들과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다자이는 멀뚱히 앉아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입모양으로 봐서는 그를 어떻게 처리할 지 얘기하는 것 같았다. 교사들은 제법 의견이 분분했지만 그 차이가 쉽게 좁혀지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에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던 란포가 가만히 손을 들고 의견을 말했다. 그러자 교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란포와 다자이를 오갔다. 그리고 그들은 썩 내키지는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흠, 하고 작게 한숨을 쉰 교장이 가볍게 손뼉을 치자 다자이를 감싸고 있던 배리어가 풀렸다. 란포는 머리를 긁적이다 다자이에게 다가왔다.

"다자이."
"네, 선배?"
"나랑 일 좀 해야겠다."
"일이요?"
"어디까지 파악했어?"
"음, 대충 심각하다는 것 정도만요."
"솔직하게."
"…뭐, 기억을 지우네 마네 하시는 것도 봤죠."
"그래. 네가 거절하면 기억을 지울 거야."
"와, 선택지가 없잖아요?"
"어차피 딱히 거절할 생각도 없었잖아?"

평소에도 잘 들쑤시고 다녔으면서, 뭘. 란포의 말에 다자이는 배시시 웃고는 가볍게 양손을 들었다. 역시 대단하다니까. 이 사람은 나에 대해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란포는 앉아있는 다자이의 머리를 꾹 누르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둘의 주변에 있던 교사들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나 둘씩 도서관을 나갔다. 교장은 걱정이 되는지 끝까지 나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그도 란포에게 밀려 도서관을 나가게 되었다. 교사들이 전부 나간 걸 보고 손을 가볍게 움직여 도서관의 문을 닫은 란포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해먹에 올라서는 가만히 누워서 천장을 보다가 시선을 돌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너같이 귀찮은 녀석이 이 학교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네. 한탄하는 말에 다자이는 가만히 웃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제가 좀 끈질기죠? 출입금지 시키고 싶을 정도로. 란포는 단호하게 말하고는 천장을 보며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오래 안 가 다자이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뭐가 제일 궁금해?"
"음…. 그러게요."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물어봐."
"선배."
"왜?"
"그냥 설명하기 귀찮은 거죠?"
"알면서 뭘 물어. 질문에만 답할 거야."
"그럼, 일단 제가 할 일을 알려주세요."
"음…벌레 쫓기?"
"네?"
"말하자면 대충 그래.“

아니, 벌레라니. 그럼 그 상처도? 벌레한테 당한 것 치고는 굉장히 아파보이는 상처인데. 다자이는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던 란포가 허공에 손을 젓자, 간단한 글씨가 다자이의 눈앞을 떠다녔다. 그의 설명으로는 이 학교가 세워진 이후로 쭉 있어왔던 역사라고 한다. 초대 교장이 수집벽이 있어 세계에 존재하는 각종 아티펙트들을 모으기 시작했던 게 화근이라고. 자연스럽게 그 안에는 고서적들도 있었고, 지금 세상에 존재하는 마법서들의 원본도 있었다고 한다. 란포가 말한 벌레와의 싸움은 그 원본들 중에서도 가장 힘이 강력하다고 알려진 아포칼립스를 둘러싸고 백년에 한 번 정도 일어난다고 했다.

"뭐, 올해가 딱 저번 싸움으로부터 백 년 째지만."
"…이걸 다 알고도 받아들인 거예요?"
"설마."

그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야. 그냥 알게 된 거지. 란포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기고는 입을 다물었다. 다자이는 한참동안 제 손가락을 가만히 만지작거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아포칼립스는 이 도서관 안에 있고, 선배가 말한 벌레라고 하는 것들은 그 책을 탈취하러 올 것이다. 그러면 벌레를 쫓기 위해 뭘 해야 하지? 살충제라도 뿌려야 하나? 아니, 그걸로 처리가 될 벌레이긴 한가? 분명히 아니겠지. 애초에 아포칼립스라는 건 뭐지? 지금까지 꽤 오랫동안 마법을 공부해왔지만 다자이는 단 한 번도 그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구전으로만 전승되는 존재인가? 턱을 문지르던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애초에 아포칼립스란 건 뭔가요? 책?"
"일단은."
"그거로는 설명이 다 되지 않아요, 선배."
"나도 이걸 뭐라고 정의해야할 지 모르겠어."

한 가지 확실한 건, 인간들의 언어로는 정의하기 힘든 존재라는 거지. 인간의 언어로 정의하기가 힘들다는 말에 다자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관념적인 존재라는 건가? 하지만 부르는 호칭은 있잖아? 눈에 보인다고 해서 그게 모두 한 마디로 설명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란포의 대답은 지나치게 애매했다. 적어도 내가 자주 만났던 선배는 그런 경계가 모호한 표현을 즐겨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다자이는 혼자 그런 생각을 하다 란포와 눈이 마주쳤다. 란포는 그의 생각을 안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나도 처음엔 그랬어."
"네?"
"지금 도대체 아포칼립스라는 게 뭐기에 저 사람이 그렇게 애매하게 말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잖아?"
"…선배, 독심술 해요?"
"설마, 그랬으면 벌레 놈들이 어디서 뭘 하는지도 알았을 걸?"
"뭐,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선배 마법은 꽤 잘 쓰잖아요? 마력도 높고."
"음, 반은 맞고 반은 틀려. 나도 일단은 평범한 학생이거든."

평범? 자기가 평범하다고 말한 건가? 이 사람, 평범하다는 말의 의미는 알아? 다자이는 다소 무례한 생각을 하며 란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에 어쩐지 울컥한 란포는 옆에 있는 책을 집어 던지려다가 가볍게 손가락을 휘둘러 다자이의 이마를 강타하는 것으로 불만을 대신했다. 다자이는 얻어맞은 이마를 가만히 문지르며 란포를 보았다. 그는 잔뜩 약이 오른 얼굴로 허튼 소리를 하면 몇 번 더 때려주겠다는 기세로 다자이를 보면서 자신은 평범한 학생이라고 단단히 못을 박았다. 평범하지 못하면 안 되는 것처럼 단호히 말한 그는 확실히 자기는 선천적으로 마나가 많은 편이고, 응용력은 뛰어나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또래 학생들과 비교했을 때의 경우라는 말에 다자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분명히 미첼의 마법은 그냥 사라졌었는데, 교사의 마법을 없앨 수 있는 수준의 학생은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데?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한 번 더 다자이의 이마를 때린 란포는 혀를 차고 그의 질문에 답했다.

"이 곳에서는 내가 우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지."
"…이 곳이요?"
"응, 이 도서관."
"헤에."

도서관 안에서라면 이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건가? 공간의 결계 같은 걸까? 하지만 분명히 선배의 상처는 누군가에게 당한 흔적인데. 흠, 그래서 벌레라고 하는 건가? 잘 보관한 책이라도 벌레가 생기기 시작하면 손을 쓸 수 없으니까. 생각을 이어가던 다자이는 문득 자신이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머리를 거칠게 흩었다. 다른 정보들도 중요했지만 이걸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얼굴을 가만히 쓸어내린 다자이는 볼을 긁적이다 란포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벌레…라는 건 언제 습격하나요? 예상 정도는 하고 계신 거죠?"
"아, 오늘."
"그렇ㄱ…엑, 오늘이요?"
"응, 오늘."
"생각보다도 빠른데요?"
"아니, 생각대로야."

란포는 덤덤하게 다자이에게 몇 개의 주문서를 건네며 거기에 있는 걸 다 외워두라고 말하고는 그가 질색하는 표정을 보며 웃다가 말을 이어갔다. 란포가 습격을 당한 건 사흘 전의 저녁이었고, 그 때 도서관의 열쇠를 빼앗겼다고 했다. 열쇠는 자기 몸에서 떨어지고 사흘이 지나면 그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말에 다자이는 책의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열쇠를 못 쓰게 되면 안 되니까 반드시 쳐들어 올 거라는 얘기군.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얌전히 수업만 듣는 건 지루해서 죽을 판이었기 때문에 여러 일들을 저지르고 다니긴 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전혀 다른 분야(?)의 일에 휘말릴 줄이야. 뭐, 자극적이라는 면에서는 나쁘지 않지만. 이 주문들을 외우는 건 조금 귀찮은데. 생각보다 많은 주문의 양에 다자이는 책을 슬겅슬겅 넘겼다. 란포는 곁눈질로 그런 그를 보다가 자신이 읽던 책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방어마법이라도 외워둬."
"방어요?"
"응. 안 그러면 죽을 테니까."
"헤에. 그럼 공격마법 쪽으로."
"…충고한 의미가 없잖아?"
"어차피 싸울 거잖아요? 그럼 먼저 치면 그만이죠."

그러다 상대한테 먼저 공격을 받아서 죽는대도 썩 나쁘진 않을 것이다. 문득, 내가 죽어버리면 이 사람은 나를 위해 울어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 생각은 란포의 움직임에 흩어져버렸다. 란포는 가만히 손을 놀려 책장을 한데 모으고 있었다. 아무래도 손님이 온 모양이었다. 그 손님은 생각보다는 평범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란포가 벌레라고 하는 바람에 상당히 괴이한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손님은 같은 교복을 입은 평범한, 어라, 교복? 우리 학교 학생이었단 말인가. 완전히 외부인일 줄 알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데 작은 빛이 다자이의 이마 한가운데를 비췄다. 란포는 혀를 작게 차고는 손을 놀려 다자이를 벽으로 밀어내고는 그대로 손님을 향해 얼음덩어리를 날렸다. 그것과 거의 동시에, 날카로운 빛이 다자이가 서있던 자리를 스쳐지나갔다. 위험해, 저 자리에 있었으면 구멍이 날 뻔했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기 이마를 만지작거린 다자이는 란포의 공격에 발이 얼어붙은 손님을 보았다. 그 손님의 정체에 다자이는 눈을 홉떴다.

"쿠니키다?"

어둠 너머에 있다 드러난 인영은 아주 익숙한 존재였다. 그 정체를 믿을 수 없다는 게 흠이긴 했지만. 쿠니키다의 손에는 색이 바래가는 붉은 색의 열쇠가 들려있었다. 저게 '열쇠'로군. 꼭 피 같아. 쿠니키다는 다자이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란포에게 걸어갔다. 란포는 방어도 하지 않은 채 쿠니키다를 똑바로 쳐다보기만 했다. 어라, 저거 위험한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다자이는 마법을 쓰려고 했지만 마나가 모이는 느낌이 나지 않았다. 설마. 아까 자신을 밀친 건 그냥 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는 건가? 같이 일 하자면서? 다자이는 란포에게 따지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이 사람, 진짜 너무하네. 어쩐지 울컥하는 기분에 미간을 찌푸린 채 란포를 보고 있자니, 그가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다자이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금 뒤, 머릿속에 말이 흘러들어왔다. 네 역할은 싸우는 게 아니야. 그래서 방어마법을 기억하라고 했던 건데. 어쨌든, 지금 너는 책장하고 동화되어 보이니까 쓸데없이 움직이지 마.

일방적인 지시였다. 아니, 지시보다는 명령에 가까웠다. 싸우는 게 아니라면 내가 할 일은 뭐란 말인가? 대단한 일이라도 해야 할 것처럼 말해놓고는. 모처럼의 지루함도 날려버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 꼴이라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턱을 괸 채 자신을 쳐다보는 다자이를 본 란포는 샐쭉 웃으며 말했다. 넌 내가 죽으면 책과 열쇠를 들고 여기를 빠져나가. 란포의 덤덤한 말에 잠깐 균형을 잃은 다자이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왜 당연하게 죽을 생각까지 하고 있는 거야? 그게 뭐라고. 아니, 뭐, 일상이 지루하면 한번쯤 뛰어내려보고 싶고 좀 멍청한 짓도 해보고 싶고, 그런 거긴 하지만 말이지. 란포의 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웃으면서 말하는 쪽이 절대 이상할 정도로 무거운 말이었다. 자신의 목숨과 바꿔서까지 지킬 필요가 있는 책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 이득도 없잖아. 다자이는 조금 더 따지고 싶었지만, 란포는 더 이상 다자이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눈앞에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는 쿠니키다를 똑바로 쳐다보다 손을 내밀 뿐이었다.

"이제 그만 열쇠를 돌려줘."
"…책의 위치를 말해."
"알려줄 리가 없잖아?"
"대답해."
"그 애 몸에서 나오면 생각해보지."

란포의 말에 쿠니키다는 몸을 숙이고 들썩이며 웃었다. 폭소, 아니, 광소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잡음이 낀 것처럼 거칠게 변했다. 쿠니키다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곤란하네, 정화는 할 줄 모르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란포는 허공에 손을 뻗고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흠, 이 정도면 한 대로 끝낼 수 있겠지? 속으로 제발 한 대로 끝내달라고 말하면서 란포는 그대로 쿠니키다의 품으로 파고들어 열쇠를 뺏은 뒤에 자세를 돌려 마나를 실은 주먹으로 그의 턱을 날렸다. 그 바람에 쿠니키다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다 주저앉았다. 생각보다 쿠니키다가 튼튼한 게 문제였던 걸까, 아니면 운동 부족인가? 란포는 얼얼한 손등을 문지르면서 열쇠를 입에 물고는 쿠니키다의 주변에 방어막을 둘렀다. 그리고 손가락을 내리꽂자 번개가 맹렬하게 쿠니키다에게 쏟아졌다.

"크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란포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계속 쿠니키다에게 공격마법을 쏟아 부었다. 저러다 죽겠는데, 싶어서 말리려던 때, 쿠니키다가 풀썩 쓰러졌다. 바닥에 엎어진 그의 몸에서는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더니 사람의 형체를 갖췄다. 연기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손가락을 들어 란포가 쳐둔 방어벽을 톡톡 건드리더니 슬쩍 빠져나왔다. 그 모습을 본 란포는 작게 혀를 차고는 입에 내내 물고 있던 열쇠를 삼켰다. 그런 란포를 본 연기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지만, 곧 입을 오물거리던 란포가 혀로 슥 입안을 훑어내고 쇳덩이를 뱉어내자 형체를 일그러트리며 란포에게 달려들었다. 란포는 품에서 플라스크를 하나 꺼내서 그 안에 쇳덩이를 집어넣고 연기의 공격을 피하고는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제 손을 그어 피를 플라스크 안에 떨어트리고는 연기를 향해 내밀며 웃었다.

"자, 네가 좋아하는 책 냄새다."

책 냄새? 피 냄새가 아니라? 다자이가 란포의 말에 의문을 품는 사이 연기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플라스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지막 하나조차 흔적을 남기지 않고 들어가자마자 란포는 뚜껑을 닫고 플라스크를 마법으로 단단히 봉했다. 그 플라스크를 가만히 흔들던 란포는 얼마 안 가 휘청거리며 엎어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란포가 걸었던 방어막도 풀려 움직일 수 있게 된 다자이는 그가 바닥에 닿기 직전에 그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허공에 날아간 플라스크를 잡았다. 란포는 힘없이 손을 휘적이다 엄지를 내밀고 웃었다.

"나이스 캐치."
"…선배."
"왜?"
"엄청 무모한 거 알죠?"
"너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아. 문제아."
"아, 방금 말은 아픈 데를 찔렀네요."
"누가 누구한테 무모하다고 하는 건지."
"제가 선배한테요?"
"말이나 못하면."

입술을 비죽이 내밀고 투덜거리던 란포는 플라스크를 교장실에 가져다주라고 말하고는 바닥에 기절해있는 쿠니키다를 가만히 보았다. 저 녀석은 내가 옮길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란포를 보던 다자이는 그를 그대로 옆구리에 끼고는 기절한 쿠니키다를 부유마법으로 공중에 띄운 채 의무실로 향했다. 란포는 당장 내려놓으라고 화를 냈지만 다자이는 전혀 듣지 않았다. 한참을 바둥거리던 란포는 다자이의 힘이 풀리지 않자 제풀에 지쳐 얌전히 들려있었다. 의무실에서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요사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란포와 쿠니키다를 침대에 눕히고는 수액을 맞췄다. 다자이는 란포의 옆에 놓인 침대에 누워서 요사노에게 상태를 확인 받으면서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상당히 지치긴 했는지 금세 잠들어버린 그는 곧 이리저리 뒤척이기 시작했다. 그런 란포를 보던 요사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여 그의 팔을 침대에 고정시키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란포는 잠버릇이 나빠서 큰일이라니까."
"저, 요사노 선생님?"
"응? 왜 그러니?"
"…란포선배는 정말로 이 학교의 학생인가요?"
"그럼, 당연하지."
"그런 것 치고는 선생님들하고 너무 친한 것 같기도 하고…."
"아, 그건 말이지. 란포는 조금 특수한 위치에 있긴 해."
"…그 책 때문인가요?"
"어느 정도는 얘기를 들은 모양이네. 맞아."
"도대체 그 책은 뭐죠?"
"어머, 그 책이 뭔지는 얘기 안 한 모양이지?"

의외라는 요사노의 표정에 다자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려고 해도 적당히 말을 돌려버리고 말더라고, 그 말에 요사노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의자를 하나 끌어와 다리를 꼬고 앉으며 뜸을 들였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굉장히 애매한 물건이긴 해. 란포가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하지 않던? 그게 좀 성질이 특이하거든. 일단 제일 보편적으로 보이는 형태가 책이니까 다들 '책'이라고 하는 거지만, 누군가에게는 양피지 두루마리로 보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석판으로 보이기도 한다나봐. 다자이는 그 말에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고? 그럼 나에게는 다른 모습으로도 보일 수 있다는 건가? 란포 선배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요사노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다자이가 들고 온 플라스크를 보았다.

"저거, 벌레가 봉인된 거지?"
"아, 네."
"엿들으면 곤란하니까 우선 교장선생님께 갖다드리고 올게."
"저, 선생님."
"응?"
"그 벌레라는 건 뭐죠?"
"책벌레. 사악한 의지. 우리는 아포칼립스를 좀먹을 존재라고 해서 책 좀이나 좀 벌레로 부르기도 해. 가끔 있잖아?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던가 하는 인간들."
"백년에 한 번씩 이런 싸움이 있다면서요?"
"음, 우리 학교의 결계는 만만치 않으니까."

아아, 그래서 쿠니키다에게 빙의했던 건가? 다자이는 건너편 침대에서 악몽에 시달리는지 앓는 소리를 내고 있는 쿠니키다를 쳐다보았다. 요사노도 잠시 시선을 쿠니키다에게 향했다가 란포에게 돌리고는 작게 혀를 찼다. 그러게 적당히 좀 하지. 애가 바짝 익어서 한참을 치료해야 하잖아. 듣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투덜거린 요사노는 플라스크를 들고 교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의무실을 나갔다. 다자이는 볼을 긁적이며 일어나 앉아 요사노를 배웅하고는 다시 누웠다. 화려한 무늬가 잘 짜인 의무실의 천장을 보며 다자이는 생각에 잠겼다.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책, -아니, 존재라고 하는 편이 나을까? -아포칼립스. 란포도 정의를 내리지 못한 것, 피와 같은 열쇠, 그걸 삼켜버린 란포. 여러 정보들이 다자이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란포는 언제 어떻게 그 존재를 접한 것일까? '이런 걸 알고서 했느냐'는 질문에 란포는 '설마' 라고 답했다. 알았으면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란 얘기겠지? 같은 학년에는 다른 사람도 많았을 텐데 왜 그였을까? 자격요건이 있나? 그 자격요건은 누가 정한 거지? 아니, 애초에 그 도서관은 왜 존재하고 있는 걸까? 설마. 잠깐 생각을 멈춘 다자이는 몸을 튕기듯이 일으키고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생각이 지나친 게 아닐까? 아니,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능했다. 책의 위치를 그 벌레들이 찾지 못한 것 까지도. 아포칼립스는 눈에 보이는 명확한 존재가 아니라 조금 더 추상적인 것. 가령, 아니, 아마도 거의 확실하겠지. 란포가 있던 도서관ㅡ. 그 자체가 아포칼립스라고 한다면, 책의 위치를 알려 줄 필요가 없다. 본인은 모르는 사이에 이미 들어와 있으니까. 하지만 그 공간이 자기들이 찾는 책이라는 건, 사서만이 알고 있으니 그들은 애가 타겠지. 열쇠가 몸에서 떨어져 나온 것도, 며칠이 지나면 사용하지 못하는 것도 납득이 간다. 그건 그저 그럴듯하게 만들어 낸 마력의 덩어리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란포가 그때 뱉어냈던 쇳덩어리들은 대체 뭐지? 게다가 왜 란포는 자기 피를 '책 냄새'라고 했을까? 지금 일어나는, 그리고 자기가 말려든 일련의 사태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 학교의 중추에 직결되는 일이었다는 것을 다자이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직 완전히 이해는 되지 않지만, 란포가 깨어나면 뭐라도 알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에 다시 누웠을 때, 맞은편 침대에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쿠니키다가 눈을 뜬 모양이었다. 멍하니 눈을 뜬 쿠니키다는 자신이 의무실인 것을 깨닫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을 내려서 본 자신의 몸은 붕대 투성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 건너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억지로 일어나지마. 지금 쿠니키다는 중환자니까."
"중…환자라고?"
"아, 자비 없이 얻어맞았거든."
"내가…? 왜…?"
"음, 간단히 말하면 나쁜 놈이 쿠니키다의 몸에 들어가서 선배가 쫓아냈어."
"…그래."
"생각 외로 놀라지는 않네?"
"놀라야 하나?"
"아니, 너라면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야? 라고 충격이라도 받을 줄 알았지."
"뭐, 조금 얼떨떨하긴 한데…."

그런 것보단 몸이 불편하니 움직이기가 힘드네.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 요사노가 돌아왔다. 요사노는 란포보다 먼저 정신을 차린 쿠니키다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아슬아슬하게 죽지 않을 정도로만 구워놨던데 벌써 정신을 차렸냐고 하면서 그녀는 쿠니키다의 침대 옆으로 와 그의 상태를 살폈다. 쿠니키다의 몸은 아직도 화상이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쿠니키다는 요사노가 건넨 약- 장기와 피부를 재생시키는 약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을 삼키고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약효 때문인지 금세 감기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그는 5분도 채 되지 않아 잠들었다.

"자, 그럼. 이제 그만 눈 뜨지 그래? 란포."
"…알고 있었어?"
"그럼.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
"사과는 안 할 거니?"
"…정당방위잖아?"
"그래도 지나쳤어."
"그거야 뭐…. 조금 그런 것 같지만."
"조-금? 한 발짝만 더 나갔으면 쟤는 죽었어, 알아?"
"…알아, 알지만! 내가 그쪽 마법을 못 쓰는 걸 어떡해!"
"그래도, 무모했어. 일어나면 제대로 사과해."
"…네에."
"좋아, 착한 아이군."

요사노의 말에 란포는 입술을 비죽이 내밀었다. 어린애 취급은 안 해도 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란포의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애 같아 다자이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푸훗, 그의 웃음소리에 날카로운 시선이 꽂혔다. 시선의 주인을 본 다자이는 손을 내저으며 표정을 풀어달라고 했지만 란포는 짧게 흥, 하고 숨을 뱉으며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아차, 조금만 더 참을 걸. 속으로 중얼거리는 그에게 란포가 뭔가 알아낸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다자이는 시치미를 뗐지만 란포는 그런 그를 보다가 손가락을 튕겨서 자신과 요사노, 그리고 다자이의 주변에 소리를 차단하는 막을 쳤다. 가볍게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던 란포는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힘을 빼며 다자이를 보았다.

"나한테 확인하고 싶은 게 있을 텐데?"
"음, 그렇긴 한데요."
"예, 아니오로 답해줄게."
"또요?"
"자세한 설명이 귀찮은 걸."

이 사람, 정말 못 말리겠네. 다자이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아까부터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씩 던졌다. 열쇠는 당신의 피 인가요? No. 그럼, 역시 마력의 덩어리인가요? Yes. 아포칼립스는 공간일 수도 있나요? …Yes. 란포는 조금 느리게 답을 하며 다자이를 빤히 보았다. 설마, 그 잠깐 사이에 눈치를 챈 건가? 란포의 반응에 확신을 한 다자이는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 사서가 되는 자격 요건이 있나요? Yes. 그 대답을 들은 다자이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알려주세요, 그 조건. 궁금하거든요."
"어쨌든 너는 아닌데."

알아서 뭐하게? 란포는 그렇게 말하고는 요사노가 건넨 약을 먹었다. 다자이는 란포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고는 질문을 돌렸다. 계약은 보통 얼마나 유지돼요? 그 말에 란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다자이에게서 등을 돌려버린 란포는 말없이 눈을 감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이제 대답할 건 없어. 다자이는 뭐라고 더 묻고 싶었지만, 요사노가 그의 어깨를 잡고는 그만하라고 말했기 때문에 입을 닫았다. 약기운에 금세 다시 잠에 빠진 란포를 보던 요사노는 다자이의 이마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못 말리겠다는 투로 웃으면서 말했다.

"기억을 또 잃고 싶지 않으면 이제 그만 묻는 게 좋을 거야. 호기심 덩어리네, 정말로."

 그런가. 너무 깊이 파고들었던 건가. 요사노의 말에 대충 상황을 이해한 다자이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고는 조금 더 쉬어두라는 그녀의 말에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대로 잠이 들 때까지, 다자이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잠이 들었던 걸까. 커다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미간을 찌푸리고 일어난 다자이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츄야의 얼굴을 마주했다. 우와, 일어나자마자 본 게 이 녀석이라니. 기분 나빠.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을 짓는 다자이에게 조용히 세 번째 손가락을 펴서 보여준 츄야는 혀를 가볍게 차고 아직도 잠들어있는 쿠니키다를 보았다. 여러 가지 처치는 되어있었지만 그래서 더 처참해 보이는 몰골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얘는 왜 걸레짝이 됐냐?"
"그럴 만한 일이 있었어."
"너도 그 자리에 있었냐?"
"일단은."
"…보고만 있었냐, 네놈."
"어쩔 수 없었다고."
"어쩔 수 없었어? 그 상황을 즐긴 건 아니고?"
"정말 불가항력이었어."

불가항력이라고? 다자이의 말에 츄야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응. 나도 묶여 있었거든. 다자이는 볼을 긁적이고 어깨를 으쓱였다. 츄야는 그런 다자이를 미심쩍은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제 머리를 흩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너희들 간밤에 무슨 짓을 한 거냐. 둘 다 나가서 들어오지 않으니까 신경 쓰여서 한숨도 못 잤다고. 츄야는 졸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자이의 맞은 편 침대에 드러누웠다. 저 놈도 깨어나면 한 소리 해야지. 그렇게 중얼거리고 눈을 감은 츄야를 보던 다자이는 그제야 자기 옆의 침대가 비어있는 걸 알았다. 란포가 없었다. 벌써 움직여도 되는 건가? 고개를 가만히 기울여서 란포가 있던 자리를 보던 다자이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의무실을 나갔다. 그렇게 늦은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일어나서 움직인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약이 잘 듣는다고 해도 어제 란포의 몸 상태로는 당장 움직이기는 힘들다. 무리를 하고 있는 건지, 이미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있던 자리에는 혈흔이 남아있었다. 피가 나서 자리를 옮긴 건지, 자리를 옮기기 위해 무리를 해서 피가 난 건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란포의 상태가 신경 쓰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을 어디서 찾는담? 혹시 교실에 갔을까 싶어 찾아가 봤지만 란포는 없었다. 분명히 기숙사에도 없겠지. 다자이는 얼마 전 호손을 미행했던 기억을 더듬어 도서관으로 향했다. 긴 복도를 몇 개인가 지난 구석진 곳에서 다자이는 익숙한 문을 발견했다. 다자이는 도서관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잡고 문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뭔가에 걸린 듯 덜컥거리던 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다자이는 조금 더 힘을 줘서 문을 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도서관 내부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다자이는 열린 문 틈 사이로 몇 번인가 란포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문이 혼자 힘으로는 잘 열리지 않으니 다른 사람을 불러오는 게 좋을까하는 생각을 할 때였다. 문틈으로 뭔가가 튀어나오더니 다자이를 끌고 들어갔다. 도와달라고 소리칠 틈조차 없었다. 그대로 끌려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다자이는 부딪친 곳을 문지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안은 도서관이라기보다는 다른 세계 같았다. 주변에 떠다니는 희미한 반딧불이의 빛을 따라 시선을 옮긴 곳에는 도서관 안의 책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거대한 나무가 있었고, 란포가 그 아래의 해먹에 누워있었다.

"선배?"

어떻게 된 거지. 몸은 괜찮은 건가? 다자이는 발밑에 엉망으로 튀어나와 있는 뿌리들을 조심스럽게 넘어 란포에게 다가갔다. 그때까지 해먹에 누워있던 란포는 다자이가 가까이 다가가자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그를 빤히 보았다. 다자이가 괜찮으냐고 물으려는 찰나, 란포는 손가락을 튕겨 다자이를 멀리 날려 보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거대한 나뭇가지에 부딪쳐 바닥에 떨어진 다자이는 곧이어 뼈와 살이 분리될 것 같은 중압감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란포지만, 란포가 아니었다. 뭔가가 씌인 사람처럼 란포는 초점 없는 눈으로 다자이를 보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뭘 해보기도 전에 죽게 생겼네. 괴로운 숨을 뱉으며 다자이는 있는 힘을 짜내서 자기 주변에 배리어를 쳤다. 그걸 보던 란포는 희미하게 웃었다.

"생각보다는 좀 하네. 그대로 죽을 줄 알았는데."
"…뭐, 학교를 폼으로 다닌 건 아니니까…요."
"그렇겠지.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너도 살아남겠지."
"…그런데 누구…세요?"

다자이의 말에 란포는 눈을 깜박이다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가 가볍게 손뼉을 치자, 다자이의 배리어가 풀렸다. 란포는 그대로 손을 뻗어 다자이의 목을 조르면서 물었다. 언제부터 눈치 챈 거지? 그 말에 다자이는 헛웃음을 웃다 손에 힘을 주어 란포의 팔을 풀려고 했다. 처음부터 숨길 생각도 없었으면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과 란포에게 들은 정보를 종합해보면 아마도 이게 아포칼립스겠지. 오래된 마법서는 의지도 가질 수 있는 건가? 아니면 원래부터 마법서가 아니라 의지 자체였나? 아니, 그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좋지 않은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눈치 빠른 인간은 이래서 싫어."

다자이가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에 그렇게 말한 란포는 다시 자비 없는 힘으로 다자이를 내던졌다. 아니, 그럴 셈이었지만 실패한 것 같았다. 부들거리는 제 손을 내려 보던 란포는 머리를 넘기곤 작게 혀를 찼다. 그리고는 혼자서 뭔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다자이에게 있어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다자이는 심호흡을 하고는 란포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고는 입을 맞췄다. 다자이의 갑작스런 행동에 란포의 움직임이 멈췄다. 다자이는 슬쩍 눈치를 보다가 조금씩 뒤로 물러났고, 조금 뒤에 란포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다자이를 보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괴로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잔뜩 웅크린 몸에서는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럼 그렇지. 다자이는 낮게 휘파람을 불면서 손에 들고 있던 병에 담긴 물을 형체를 갖춰가는 연기에 들이부었다. 검은 연기는 고막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사라졌다.

란포는 한참이 지나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싶어 다자이는 가만히 손을 코 근처로 가져다 댔다. 가볍게 숨이 닿는 것이 아직 그가 살아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다행이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쉰 다자이가 손을 거두려는 순간, 란포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다자이는 크게 움찔하고는 란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란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뭘 한 거야?"
"네?"
"아까 나한테 먹인 거 뭐냐고."
"아, 그거요? 이거예요."

다자이는 교복 외투의 주머니를 뒤적이다 하얀 사탕을 꺼냈다. 그 사탕을 본 란포는 다자이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디서 저걸 가져온 거람. 다자이가 내민 사탕은 메모리얼 캔디로, 주문을 저장해두고 급할 때 사탕을 먹어 그 안에 담긴 주문을 딱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일회용 아이템이었다. 다만 편리한 만큼 악용하기도 쉬워 다루는 곳이 많지는 않았다. 학교에서는 응급처치용 주문을 담아두고는 있지만 빈 캔디는 요사노가 철저히 캔디를 담아둔 통의 열쇠를 관리하고 있어 그걸 훔쳐오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는 건 밖에 돌아다니는 물량이 있다는 건가. 뭐, 덕분에 살았지만. 나중에 그 주변을 찾아보도록 말해야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던 란포는 곧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바닥에 부딪치려는 란포를 급하게 붙잡은 다자이는 놀란 표정으로 괜찮으냐고 물었지만, 란포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좀 자야겠어. 그렇게 말한 란포는 다자이에게서 떨어져 손을 내저었다. 란포의 손짓에 도서관의 문은 가볍게 열렸고, 열린 문의 너머에서는 강한 바람이 불어와 다자이를 끌고 나갔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패턴에 다자이는 저항하려고 애써봤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끌려나왔다. 다자이가 나온 것과 동시에 도서관의 문은 강하게 닫혔다. 그리고 문은 그의 눈앞에서 벽과 동화되어 사라졌다.

"…이게 무슨 일이람."

다자이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완벽하게 사라져버린 문이 있던 곳을 가만히 만지작거리다가 곧 온몸이 욱신거리는 느낌에 의무실로 향했다. 요사노는 의무실에 도착한 다자이의 모습을 보더니 어디서 뭘 하고 온 거냐고 잔소리를 하면서 그에게 치유마법을 걸었다. 천천히 몸의 상처가 나아가는 걸 느끼면서 다자이는 볼을 긁적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란포가 도서관을 아예 닫아버린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다자이의 물음에 요사노는 눈을 두어 번 깜박이다 그대로 두면 된다고 말했다. 그대로 둬? 아직 학기 중인데 선배는 그래도 괜찮은 건가? 몸 상태도 나빠 보였는데 더 이상 치료하지 않아도 되나?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다자이는 고이 접힌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쪽지의 수신인은 요사노였기에 다자이는 그녀에게 쪽지를 건네고는 끙차,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 누웠다. 요사노는 가만히 쪽지를 펼쳐서 읽다가 안경을 올려쓰고는 다자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요사노의 시선에 다자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녀는 물었다.

"다자이 학생은 란포에게 유난히 신경을 많이 쓰네. 그건 단순히 호기심 때문이야?"
"네?"
"호기심 때문에 란포를 파고드는 거라면 그만 두는 게 좋아."
"그게 무슨…."
"이제 그만 아포칼립스에 대한 건 잊으란 거야. 지금도 신경 쓰고 있잖아?"
"그걸 어떻게…."
"란포가 그랬어. 네가 메모리얼 캔디도 갖고 있었다고 말이야."
"…아."
"뭐, 이번엔 란포를 구해줬으니 다른 말은 안 하겠지만. 알지?"
"…네."
"학교생활이 지루해도 범죄는 나쁜 거야."
"…죄송합니다."
"좋아, 알았으면 됐어."

그건 그렇고, 용케도 란포가 빙의되었다는 걸 알았네. 나도 눈치 채지 못했던 건데. 요사노는 란포가 준 쪽지를 가만히 램프 안에 넣어서 태우며 말했다. 다자이는 그녀의 말에 볼을 긁적였다. 쿠니키다에게 빙의된 벌레를 쫓아내고 난 다음부터, 란포의 상태는 눈에 띄게 나빠졌었다. 아무리 마나가 다 떨어졌다고 해도 그 정도까지 나빠지는 일이 흔한 것은 아니라서 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갖고 있던 사탕에 란포가 건넸던 마법서에 있던 정화의 주문을 하나 담아두었다. 쿠니키다에게서 벌레를 쫓을 때 란포가 쓴 마법은 공격마법 뿐이었으니까. 다자이의 설명에 요사노는 흐응, 하고 작게 콧소리를 내고는 웃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우리 말고도 똑바로 잘 봐주는 사람이 생겼구나 싶어서."
"네?"
"사정이 있어서 걔는 어릴 때부터 이 학교에서 지냈거든. 그래서 만난 사람이라고는 우리 교사들이 전부야."
"…그렇군요."
"뭐, 그래서 쉽게 너를 내치지는 못한 모양이야."
"저를 왜…"
"어머, 머리가 좋아서 금방 알 줄 알았는데."

너는 제거대상 1순위였어. 요사노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냉정하게 말했다. 살기, 증오. 그런 것들이 설핏 섞인 그녀의 기운에 다자이는 마른 침을 삼켰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른다. 날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이야? 요사노는 일순 내비쳤던 기운을 거두고 말이 없는 다자이를 잠시 쳐다보다 설명을 이어갔다. 그처럼 뻔질나게 그 도서관을 드나든 학생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래서 란포는 처음에 그가 책벌레가 아닐까 의심을 했고, 교사들에게도 보고를 했다고 한다. 그 뒤로 다자이는 요주의 리스트에 올랐으며, 본인의 기행이 더해져 경계 및 제거 대상 1위가 되었다고 했다. 요사노의 말을 들은 다자이는 맥없이 웃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경계대상이 되어있을 줄이야. 그래서 유난히 징계도 엄했던 건가? 전에 창고를 청소하러 갔을 때, 창고지기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너희 같은 애들을 여기까지 보내지는 않는다고. 아무래도 말썽을 하도 피워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라 이미 찍혀있었다니. 그렇다면 어쩔 수 없었네. 그렇게 중얼거리는 다자이의 얼굴에 베개가 날아들었다. 베개를 던진 건 조금 전까지 누워서 자고 있던 츄야였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너 때문에 나까지 생고생을 했다는 얘기잖아, 이 자식아!"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왜 네 잘못이 아닌데!!"
"그야 선생님들이 멋대로 정한 거니까."

멋대로 오해하기도 했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다자이는 어깨를 으쓱했지만 츄아는 딱히 납득한 표정은 아니었다. 오해고 나발이고, 네 놈이 시비를 건 건 사실이잖아! 츄야의 말에 다자이는 고개를 설렁설렁 끄덕였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다고 생각했었다. 어차피 학교는 벗어날 수 없는 곳이었고, 그렇다면 차라리 매일 사고라도 치면 학교에 있는 날들도 순식간에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슬슬 질려가던 참이었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상에서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제대로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없다는 장소, 그리고 그곳에서 항상 만날 수 있는 사람. 지금은 모습을 감춰버렸지만 그렇게 머지않은 때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다. 알면서 하는 놈이 제일 나쁘다며 자신을 욕하는 츄야에게 너도 만만치 않다고 말을 돌려준 다자이는 그대로 한 판 붙으려는 기세의 츄야를 빤히 쳐다보았다. 요사노는 그런 둘의 사이를 막아서고는 한숨을 쉬며 싸울 거라면 둘 다 여기서 뼈도 못 추리게 때려주겠다고 말했다. 요사노 덕분에 팽팽해졌던 공기가 느슨해지자, 다자이는 침대에 편히 누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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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7. 2. 26. 03:40
문호스트레이독스
다자란
비의 노래와 우울한 축음기

진단메이커 : "나를 아직도 사랑하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어."

============================

하늘이 흐리다. 금방이라도 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습한 날씨였다. 숨을 들이쉬면 폐부로 스며드는 비릿한 냄새가 무거운 공기를 더 무겁게 만들어 몸을 감싸왔다. 란포는 책상에 늘어진 채 모자를 끌어내려 얼굴을 덮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을 하면 질 것만 같았다. 이 모든 것은, 그래, 그 다자이 때문이다. 에도가와 란포는 자신을 뒤흔들어놓는 그가 싫었다. 자신을 파악하려고 하는 그 눈이 싫었다. 그래서 눈을 감았고, 그래서 그를 외면했다. 사랑을 노래하는 그 입을 가끔 틀어막고 싶었다. 그 말을 듣고 넘어가는 귀를 찌르고 싶었다. 달콤한 사탕발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런 사내다. 모를 리가 없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아주 잘, 질릴 정도로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그의 등을 남몰래 쫓고 있었던 걸까. 시선이, 신경이 그의 말 하나, 행동 하나에 반응하고 있었다. 정말 지독하게 바보같은 본능이었다. 다자이 오사무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를 사람이 아니다.

"…하아."

우울한 기분을 뱉는다. 기도를 통해 나온 숨은 성대를 긁으며 지친 숨소리를 냈다. 모자를 고쳐쓰고 고개를 젖혀 점점 무거워지는 구름을 보던 란포는 하늘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고 거리로 나섰다. 어디로 갈 지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걸음이 닿는 대로 가 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돌아오는 길은, 하다못해 누군가에게 묻기라도 하면 될테다. 아니면 전화라도 한다면 분명히 누군가는 데리러 나오겠지. 자신은 탐정사에 있어 그런 존재였다. 아마도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아마도, 라는 전제가 붙은 것은 약 한 사람의 마음을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5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파악할 수 있는 란포도, 그 사람만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몰랐다. 커다란 사탕을 까서 껍질을 적당히 버리고는 입 안 가득 물었다. 혀 끝을 통해 퍼지는 단맛이 천천히 혀를 마비시켰다. 다자이 오사무는 그런 존재였다.

툭, 투둑, 결국 구름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물을 떨어트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비를 피하느라 난리였지만, 란포는 그저 모자를 눌러쓴 채 걸음을 멈출 뿐이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늘은 쉽니다.'라는 팻말이 걸린 가게의 조그마한 녹색 차양 앞에 선 란포는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빗줄기는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차양에 떨어지는 빗물이 리듬이 되어 귓가를 때린다. 아득해지는 시선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덮어씌워진다. 란포씨, 란포씨. 제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르던 목소리가 들렸다. 지독히도 그리우면 환청이 들린다더니 그런 모양이다. 찌르르, 떨려오는 코 끝이 시큰해졌다. 나는 왜 아직도 이 지독한 꿈에서 깨지 못하고 있을까. 나도 너처럼 죽음을 바란다면 네가 날 데리러 올 것이라는 이 부질없는 환상에서 깰 수 있을까? 란포는 흐려지는 시야를 고개를 들어 가만히 숨기고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무엇을 바라는 걸까, 먼저 경계선에 선 것은 자신이었다. 언제든 벗어나기 쉽게 발을 걸칠 요량이었다. 줄타기같은 것은 특기가 아니지만, 다자이가 상대라면 얘기가 달랐다. 내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내기는 자신과의 내기인지, 그와의 내기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있었다. 선을 넘어가서 떨어지면 진다. 그렇게 천천히 발을 담근 곳이 끝이 없는 늪이 될 줄은 몰랐다. 사랑해요. 그 부질없는 속삭임은 조금씩 심장을 물들여갔고, 마침내 그 말이 없으면 살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된 순간부터 더 이상 달콤한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불렀다. 몇 번이고 혀 끝에서 맴돌던 말을 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자이는 조금씩 란포에게서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것은 확실하게, 그리고 아플 정도로 뚜렷하게 란포의 심장에 새겨졌다.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한다.

가시가 된 결론은 몸을 파고들었다. 다자이가 란포를 부르는 목소리는 날카롭게 그의 고막을 찢었고, 머리를 마구 찔러댔다. 좋아해서 부르는 것인지, 의무감에 애정을 표현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따라 거리를 조금씩 벌렸다. 다시 빠져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다자이는 그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조금 거리를 두고 마음을 굳히면 그게 우습다는 듯 다시 거리를 좁혀왔다.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거부하면 천연덕스럽게 옆에 붙어 다시 달콤한 말을 해주었다. 하지만 란포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다자이의 말은 란포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저 란포는 오래된 축음기처럼 예전에 들었던 미사여구들을, 애정표현들을 머릿속에서 재생하며 다자이의 말에 덮어씌웠다. 다시 한 번 조용히 그가 했던 말들을 빗소리에 섞어 복기해봤지만, 온기는 전해지지 않았다. 실패했다.

하늘이 마음과도 같아 란포는 비를 피하기를 그만두고 한 걸음, 차양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한꺼풀 너머로 들리던 빗소리는 점점 더 세게 몸을 때려왔다. 이제 그만두고 싶어. 이런 것. 그렇게 생각하는 란포의 눈가에선 빗물이 흘렀다. 마음 속이 점점 비어가는 것을 느꼈다. 빗소리만이 그 빈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이 비마저 그치면 완전히 비어버리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기 전에 이 마음을 묶을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돌렸지만 레코드판이 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빗물에 고장난 축음기는 아무 기능도 하지 못한 채 마침내 재생마저 멈추고 말았다. 이대로 영원히 고장난다면 좋을텐데. 누군가가 들으면 경악할 말을 홀로 중얼거리며 란포는 빗속에 몸을 맡겼다. 그러나 조금 뒤, 더 이상 자신을 때리는 비가 느껴지지 않아 란포는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얼굴이, 그리고 무서운 얼굴이 애처로운 미소를 품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란포씨."
"…?"
"이런 데서 뭐하고 계세요. 감기 걸려요."
"…왜 여기에 네가 있어?"
"하하, 여과없이 말씀하시네요."

하지만. 하지만, 너는 더 이상, 나를 신경쓰지 않을거잖아. 조각난 단어들은 말이 되지 못한 채 눈물이 되어 흘러넘쳤다. 다자이는 제 얼굴을 보고 울기 시작하는 란포를 가만히 품에 안았다. 푹 젖어버린 옷이 물기를 옮기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남의 생각을 금세 알 수 있다는 건 꽤 얄궂은 일이었다. 사소한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구애는 어느샌가 그를 진심으로 만들어버렸다. 란포만이 아니었다. 스스로도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심을 조금씩 버렸다. 그의 버릇을 관찰하는 횟수를 줄였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더 돌렸다. 이 이상 소중해져서 그를 잃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하지만 그 행동이 이런 결과를 불러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소중했기에 했던 행동이 오히려 그를 몰아붙였다. 한참을 말없이 울기만 하던 란포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조용히 다자이의 품에서 떨어졌다. 단단하게 잡으려는 팔을 떨어트린 란포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발개진 코끝과 눈가를 쓸어주고 싶었다. 저도 모르게 다가간 손을 뿌리치며 다시 빗속으로 한 걸음 물러선 란포는 다자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우산을 든 채, 다자이는 란포와 시선을 마주했다. 흐릿해진 눈동자 너머로 다자이를 빤히 보던 란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를 아직도 사랑하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어."

거센 빗줄기 속에서, 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지만 다자이는 그의 말을 들었다. 네, 그럼요. 길지 않은 대답을 한 다자이는 가만히 팔을 벌렸다. 란포가 좀처럼 다가오지 못하자, 다자이는 제가 움직여 란포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정말로 이런 비를 계속 맞으면 그냥 감기로는 안 끝나요. 그러니까 돌아가죠. 다정한 말을 담은 눈동자를 본 란포는 이내 시선을 땅으로 향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닳아서 패인 길가에 생긴 물웅덩이에 두 사람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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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7. 2. 21. 02:20

[다자란] 평행선의 연민

18다자이, 14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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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안개 속에 그들은 앉아있었다. 어떻게 만났는 지는 모른다. 서로 시선도 마주하지 않았다. 한 소년은 가쿠란에 망토를 두른 채 학교 지정의 모자를 쓰고 있었고, 다른 소년은 이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하는 앳된 외모를 붕대로 반쯤 가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쿠란의 소년은 발 끝을, 붕대의 소년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철제의 벤치에 앉아있는 두 사람은 서로 한 마디의 인사도 없었다. 아니, 실은 애초에 상대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알고싶지도 않았다. 상대의 이름이 무엇이든, 어떤 외모를 가졌든 크게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나 이외의 타인은 나를 이해할 수 없을테니까. 하지만 처음 봤을 때 느낀 것은 분명히 있었다.


「동류의 인간」.


굳이 정의를 내리자면 그런 부류에 속하는 인간일 것이다. 각자의 일생을 집합으로 표현한다면 그들은 서로 집합 외의 존재였다. 교집합조차 생기지 않을. 둘은 나란히 앉아서 같은 생각을 하며 서로를 흘끗 쳐다보았지만, 공중에서 마주친 시선은 그대로 스쳐 서로가 보던 풍경을 반대로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마도 붕대를 맨 소년 쪽이었던 것 같다. 아마 제삼자가 본다면 쓸데 없는 말이라고 했을 질문이었다. 붕대를 맨 소년은 제 상처투성이의 손을 내려다보다 물었다.


―너는, 사는 게 즐거운가?


가쿠란의 소년은 그 말에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모자의 챙으로 향하고는 손을 옮겨 모자를 누른 채 답했다. 아니.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고, 나는 언제나 눈치를 보는 것 밖에 못해. 상자 안에 갇혀버린 느낌이야. 한 걸음 한 걸음이 아파. 숨이 막혀와. 그 말에 붕대를 맨 소년은 짧게 웃고는 답했다. 이거 우연이군,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 참인데. 세상은 바보들이 넘치고, 살아있는 인간들은 살아가기 위해 의미 없는 행동들을 반복하지. 참으로 애석한 일이야. 쓸데 없는 일에 힘을 쏟는다는 건 말이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붕대를 맨 소년의 코트자락을 흘끗 보던 가쿠란의 소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난 자살은 하지 않아.


소년의 말에 붕대를 맨 소년의 상처투성이 손가락이 움찔했다. 살짝 구겨진 코트자락을 손가락 끝으로 가만히 두드려 펴며 붕대를 맨 소년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살은 하지 않아, 라. 내가 자살을 하는 이유는 아는가? 붕대를 맨 소년은 가만히 바닥을 발로 차며 물었지만 가쿠란의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알 리가 없지,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으니까. 붕대를 맨 소년은 홀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그렇게 하면 살아있다는 느낌을 다른 어떤 방법보다 빠르게 느낄 수 있거든. 죽음이 덮쳐와서 전신이 무력해지는 느낌과, 살기 위해 조금이라도 힘을 쓰는 그 느낌이 참을 수 없이 소름이 돋는다네. 자네는 그 기분을, 아, 모르겠군. 붕대를 맨 소년의 말에 가쿠란의 소년은 벤치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런 기분.

―그런가?


그런 기분을 느끼면서 살 이유를 찾기에는 내 세상은 너무나 무섭거든. 가쿠란의 소년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웃어보이고는 그럼, 잘 있어. 라는 인사를 남기고는 먼저 등을 돌려 안개 너머로 걸어갔다. 붕대를 맨 소년은 그가 사라진 곳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반대쪽에서 밝아지는 하늘에 피식 웃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시간이 다 됐던 건가. 벤치에서 일어난 붕대를 맨 소년은 코트를 벗어 공중에 가볍게 털고는 다시 걸치며 빛이 쏟아지는 곳을 향해서 걸어갔다.


―오늘도 죽기 좋은 날이야.


*

"…꿈인가."


눈을 뜨니 방의 천장이 보였다. 란포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눈을 깜박였다. 어쩐지 오랜만에 옛날 옷을 입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와 평소에는 하지 않을 얘기를 했던 것도 같다. 상대가 누구라도 쉽게 말하지 않을 묻어두었던 생각들이었다. 그래, 꿈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렇게 모든 것을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꿈이니까, 금방 사라질테니까. 이불을 대충 걷어두고는 욕실을 향해 걸어가던 란포는 장지문 너머에서 이불을 머리까지 둘둘 말고 있는 제 연인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발로 이불을 굴렸다. 빼꼼히 짙은 갈색의 머리만 보이던 남자는 벽까지 굴러가고 부딪쳐서야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벌써 아침인가요오…."

"일어나, 다자이."

"란포씨….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너는 뭐 그대로 질식사라도 할 생각이었나보네."

"아, 굉장하네요. 본 것 만으로도 아시는 거예요? 역시 란포씨."


바닥에 드러누운 채 그렇게 말하는 다자이의 정강이를 툭 걷어찬 란포는 별 다른 말 없이 욕실로 들어갔다. 안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걷어차인 정강이를 문지르던 다자이는 이불을 들고는 장지문을 넘어가 란포가 대충 걷어둔 이불을 정리하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어제는 분명히 란포씨를 화나게 해서 쫓겨나 따로 잤는데도 밤새 함께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그런 꿈을 꾼 탓이겠지. 간밤에 꿈에서 만난 이에게 다자이는 세상 어디에도 꺼내두지 않았던 이야기를 했다. 꿈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좀 더 거리낌없이 속내를 드러냈던 것 같기도 하지만. 환기를 위해 살짝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온 찬 바람에 결국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가며 다자이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당신도 같은 꿈을 꾸었을까요, 란포씨?"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7. 2. 20.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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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 17.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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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 16.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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