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17. 00:18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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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 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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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쿄카! 쿄카!!"

아츠시는 쿄카의 이름을 부르며 감옥 문을 흔들었다. 하지만 감옥 문은 잠깐 덜컹거리기만 했을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쾅! 거칠게 창살을 내리치는 소리에 쿄카가 겨우 눈을 떴다. 그녀는 눈을 두어번 깜박이다 창살 너머로 보이는 아츠시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라는 생각이 표정에 전부 드러나 있었다. 아츠시는 자물쇠를 부술만한 물건을 찾아 주변을 살폈지만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구색을 갖춰둔 감시용 책상 하나와 접이식 의자 뿐이었다. 저 의자라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아츠시는 의자를 덥썩 집어 철로 된 골조 부분을 자물쇠를 향해 내리쳤다. 쾅, 쾅! 연이어 커다란 소리가 아무도 없는 복도에 울렸다. 쿄카는 아츠시에게 거듭 그만두라고 얘기했지만 아츠시는 멈추지 않았다. 덜그럭, 얼마 안 가 내리치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망가진 자물쇠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간 아츠시는 쿄카를 묶어둔 사슬을 풀려고 했지만 사슬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이미 자물쇠를 부수느라 반쯤 망가져버린 의자는 곧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완전히 부서져버렸다.

"젠장, 어째서…!"
"아츠시…. 안 돼. 도망쳐!"
"무슨 말이야, 쿄카? 내가 어떻게 너를 두고 가."
"나한테서…. 나한테서 도망쳐!"
"못 가."
"지금 떨어지지 않으면, 내가 널 죽일지도 몰라…!"

쿄카의 눈빛은 공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녀에게서 보이는 공포는 전에 느꼈던 동질감이 있는 막연한 두려움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아츠시는 물러서지 않았다. 사슬을 끊어낼 수 없다면 통째로 뜯어내자고 생각한 아츠시는 벽과 사슬의 이음매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땀이 비오듯 흘렀지만 아츠시는 멈출 줄을 몰랐다. 단단한 벽돌을 공략하던 손에는 어느새 피가 맺히기 시작했다. 아츠시의 피 냄새에 쿄카는 혀를 깨물어서라도 정신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이미 피냄새에 깨어나기 시작한 본능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사슬에 매인 손을 뻗어 아츠시의 목을 움켜쥔 쿄카는 고통스러운 그의 숨소리를 무시한 채 고개를 움직여 그의 어깨를 물려고 했다. 아츠시는 반사적으로 있는 힘을 다해 쿄카의 이마를 누르며 버텼고, 쿄카의 날카로운 손톱은 아츠시의 목과 어깨에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정신…차려, 쿄카!"
"…크르르르…."

아츠시의 목소리는 쿄카에게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은 이미 광기에 물들어있었다. 피부를 파고 드는 손톱에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힘을 뺄 수는 없었다. 그 순간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아츠시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몇 번이고 느꼈던 살기가 지금 눈 앞에 있는 쿄카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쿄카의 힘은 평소보다도 엄청났다. 몇 번인가 훈련을 할 때 검을 마주한 적은 있고, 힘을 뺀 적도 없지만 지금의 그녀의 힘은 그 때의 배 이상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뱀파이어의 각성이란 이런 건가? 이런 피가 내게도 흐르고 있어서 나는 그렇게 보통 인간들보다 강한 거였나?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뒤에서 인기척이 나나 싶더니, 곧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상처로 흘러드는 물에 아츠시는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곧이어 다시 한 번,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 뒤에 이어지는 건 쿄카의 비명소리였다.

"아아아악!!!!"
"쿄카…!!"
"캬아아악!!"

절그럭거리는 사슬의 소리와 함께 쿄카는 괴로운 듯 비명을 질렀다. 물을 정통으로 맞은 피부는 희멀건 연기가 피어오르며 조금씩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쿄카에게 다가가려는 아츠시를 저지한 것은 낯익은 지팡이였다. 아츠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저지한 이를 쳐다보았다. 란포는 지팡이를 거두지 않은 채 주변의 상황을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누가 이 곳을 알려줬는 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아키겠지. 얼굴을 감싼 채 비명을 내지르며 뒹굴던 쿄카를 무심한 표정으로 내려보던 란포는 아츠시의 팔을 잡아서 일으키고는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진 침대에 데리고 가서 앉혔다. 얼마 안 가 쿄카의 숨소리는 안정되었고, 그녀는 푹 젖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미안해, 아츠시."
"…쿄카."
"나 참,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줬건만."
"왜, 이런 짓을 한 겁니까?"
"왜냐고? 저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란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분노에 찬 아츠시의 시선을 마주하며 물었다. 이즈미 쿄카는 지금 위험한 상태야. 각성이 진행 중이라고? 그 과정에서 훈련생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하지? 란포는 기관의 책임자로써 자신이 져야할 많은 생명들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아츠시는 납득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 생명을 이렇게 잔인하게 묶어두어야 하는가? 웬만한 힘으로는 풀리지도 않는 사슬이었다. 란포는 다른 생명을 지키겠다는 이유로 쿄카를 감금했다. 이 상황을 참고 넘겨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끊임없이 아츠시의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란포는 아츠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자신이 할 말을 할 뿐이었다.

"이즈미 쿄카는 각성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여기에 있을 거야."
"네? 그 각성이란 건 언제 끝나는데요?"
"나도 모르지. 문헌에서는 길면 일 년 정도 간다고 하는데."
"그럼, 일 년 내내 쿄카를 가두겠다고요?"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왜 말이 안 되지? 실제로 조금 전에 죽을 뻔 했으면서."
"…그건."

확실히 그랬다. 란포의 말에 반박을 할 수는 없었다. 란포가 오지 않았다면 자신은 벌써 죽었을 지도 모른다. 쿄카의 힘은 무서울 정도로 강했다. 란포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쉬고 조금 피 냄새를 맡은 것만으로도 그 정도라고 말하며 쿄카를 쳐다보았다. 쿄카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깨가 작게 떨리는 걸로 보아 아마도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란포는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가볍게 톡톡 누르면서 아츠시를 곁눈질로 흘끗 보고 얘기를 꺼냈다. 이대로 쿄카의 곁에 있다가 그녀의 손에 죽던지, 그녀의 각성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던지. 그 말을 들은 아츠시는 심장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죽고 싶지 않아서 지금까지 함께 버텨왔건만, 지금은 자칫 잘못했다가는 그녀의 손에 죽을 판이고, 각성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자니 그 전에 쿄카는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은 뱀파이어에 대해 아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아츠시는 주먹을 꾹 쥔채 물었다.

"…각성이 빨리 끝나는 방법은 없나요? 제가 읽었던 책에는 진정시키는 방법 정도 뿐이었어요."
"…그 책은 어디서 봤지?"
"예전에…. 도망치다가 우연히 들어간 폐가에서요."
"그래? 흠, 그렇단 말이지."

란포는 아츠시가 던진 질문에는 답을 주지 않은 채 혼자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통화버튼을 누른 그는 가만히 휴대폰의 통화가 연결될 때까지 생각에 잠겼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시였다. 란포는 그녀에게 튼튼한 자물쇠를 하나 가져오라고 말하면서 아츠시를 보았다. 루시의 대답을 듣고 통화를 끊은 그는 아츠시에게 걸어가 가만히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맞췄다. 란포의 녹색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아츠시를 쳐다보았다. 아츠시는 왠지 모를 위압감에 마른 침을 삼켰다. 그 모습을 본 란포는 이내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난 그 방법을 다자이를 만나기 전까진 몰랐는데 말이야."
"…네, 네에."
"그 집의 위치는 기억하고 있나?"
"…아뇨, 그, 급하게 들어갔던 거라…."
"그럼 특징이라도 기억하고 있다면 말해보게."
"…녹색 지붕의 집이었어요. 담벼락엔 마른 담쟁이가 있었고…."
"다른 특징은?"
"아, 그 근처에…커다란 신사가 있었던 것 같아요."
"호오, 신사."
"…아마도, 이름이…센…소지."

아츠시의 대답을 들은 란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금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아까보다 빠르게 연결된 통화에 란포는 핸드폰을 귀에서 조금 떼고는 한참동안 쏟아지는 잔소리를 흘려 넘겼다. 전화를 받자마자 쏟아지기 시작한 잔소리의 주인공은 요사노였다. 잔소리를 쏟아내던 그녀가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말을 멈추자 란포는 그제야 핸드폰을 가까이 대고 아츠시를 치료해주라는 말만을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아츠시에게 곧 아키가 이곳에 올테니 적절한 치료를 받으라고 하고는 쏜살같이 나가버렸다. 어디로 향하는 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지만, 그를 딱히 쫓을 생각은 없었다. 아츠시는 가만히 벽에 기대서 여전히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쿄카를 애처롭게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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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10. 11.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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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스트레이독스 x 7대 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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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체(basilice). 태초의 공간. 신의 천칭이라 불리는 건물의 최하층. 이 곳에서 세계의 균형은 태어났고, 유지되었다. 균형을 지키는 것은 열 네명의, 특수한 힘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힘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범주에 있는 것으로, 평범한 인간들은 그들을 두려워하며 신의 사자라고 불렀다. 일곱 개의 선을 위시한 존재와 일 곱 개의 악을 위시한 존재는 인간들과 함께 나고 자라며, 그들을 감시하고 세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세계는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쳐서는 안 된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명령(order)이었다. 그들이 있어 세계는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말이다.

지루한-그는 입버릇처럼 세상은 너무 재미없어서 죽고 싶을 지경이라고 말했다-시스템을 엎어버린 것은 다자이였다. 어느날 한마디 말도 없이 천칭을 떠나버린 그는 인간들의 세상을 휘젓고 다녔다. 그가 보여주는 힘에 인간들은 그를 지도자, 혹은 그에 준하는 자리에 추대했으며 그는 그것을 당연히 여기며 그 상황을 즐겼다. 그 결과, 인간들은 혼돈에 빠지게 되었다. 세계는 이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세계의 명령으로 다자이를 쫓은 이들은 마침내 그와 태초의 공간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야, 다들 오랜만이네."
"잘도 태연하게 인사한다."
"뭐, 반가운 건 반가운 거잖아? 찾아다니느라 수고가 많았네."

다자이는 언제나처럼 상석에 앉아 그들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는 아름답고 오만했다. 자존심, 아니 그것을 넘어선 교만(pride). 그것이 그의 죄목이었기에, 그는 인간들의 위에 군림하며 그들을 휘저었다. 하지만 그것은 본래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다만 지금까지 그를 찾는 데 시간이 걸린 것은, 그가 단순히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세계가 만든 가장 완벽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세계의 일부에 존재해야만 했다. 세계가 간과한 것은, 그의 오만이 세계의 계획을 뛰어넘을 정도로 성장해버린 것이었다. 상석에 앉은 다자이의 말을 가장 먼저 받아친 츄야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바닥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그만 그 자리에서 내려와라, 다자이."
"왜, 네가 여기 앉으려고?"
"그것도 좋지."
"아하하, 할 수 있으면 해 봐. 그게 네 탐욕(greed)이라면."
"그럼 그 전에 일단 내려와주실까?"
"실력으로 끌어내려보지 그래?"

다자이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츄야는 그런 다자이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뒤를 흘끗 보았다. 자연스럽게 츄야의 시선을 따라간 다자이는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시선의 끝에는 평소에는 잘 입지 않는 정복을 입고, 안경을 쓰고 있는 검은 머리의 청년이 후드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그의 짙은 녹색 눈동자와 다자이의 갈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턱을 괸 채 그를 위아래로 훑어본 다자이는 조금 쓰게 웃었다. 그리고는 의자의 손잡이에 놓은 손가락을 가볍게 톡, 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청년은 무심하게 그의 행동을 보다가 후드를 긁적이고는 작게 하품을 했다.

"란포까지 깨어났을 줄이야."
"…귀찮으니까 얼른 끝내자, 다자이."
"진심으로 할 생각이야?"
"빨리 끝내고 쉬고 싶어."
"아아, 내가 너를 쓰러트리면 어떻게 되려나."

란포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덤덤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게 승패는 상관없지, 새삼스럽게. 란포의 말에 다자이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랬지. 란포는 깨어있는 시간보다 잠들어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가 위시하는 죄목은 나태(sloth). 그렇기에 평소에 그는 잘 깨지 않았고, 깰 일도 없었다. 란포가 맡은 일은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 그렇기에 그는 깨어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가 깨어났다는 것은 세상이 이미 많이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뜻했다. 다자이는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위협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의 움직임에 그를 추격했던 이들도 긴장했는지 란포를 제외하고는 전부 자세를 고쳐잡았다.

"나는 말이지, 순순히 리셋당할 생각은 없거든."
"균형의 유지에 개인의 생각은 필요 없어, 다자이."
"뭐, 그렇긴 하지만 말이야."
"…전원을 상대할 생각인 거야?"
"조금 더 즐기고 싶으니까 말이지. 필요하다면."
"…변했네."
"세상을 좀 구경하고 나니까 말이야, 천칭 안은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바실리체의 안은 너무 갑갑해. 우린 실험체가 아니란 말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다자이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가장 먼저 란포를 노렸다. 란포는 그런 다자이의 공격을 걸음을 옮겨 흘려보낼 뿐이었다. 반격을 한 것은 그의 뒤에 숨어있던 아쿠타가와였다. 그가 허공으로 손을 뻗자, 하늘에서는 무수한 돌덩이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바닥에 닿은 돌덩이들은 금세 타르와 같은 시꺼먼 물질로 바뀌어 바닥을 물들여갔다. 다자이는 그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했으나, 뒤에서 덮쳐오는 그림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아차하는 사이에 요사노의 공격에 그대로 사로잡혀버린 다자이는 허공에 들어올려진 채 란포의 앞으로 끌려갔다. 란포는 다자이에게 손을 뻗었고, 다자이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또 만나자."

눈 앞에 머물던 희미한 빛은 이내 어둠으로 바뀌어갔다. 이 어둠이 다시 밝아지는 날에는 분명히 자신은 모든 것을 잊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자이는 알고 있다. 모든 것을 잊게 되더라도 자신은 또 다시 같은 행동을 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때는 자신이 혼자가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마지막에 눈이 마주친 것은 얄궂게도 그의 자리를 가장 탐내던 이였다. 탐욕의 츄야. 그의 눈동자 깊이 깃든 일말의 불안, 시스템에 대한 불신. 다자이는 그에게 물었다. 정말 이대로 괜찮아? 라고. 그 말은 분명히 그에게 커다란 파장이 될 것이다. 천천히 의식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세계가 건네는 약물은 그 무엇보다도 달콤하고 깊은 잠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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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10. 10. 00:52
[문호스트레이독스]
뱀파이어 AU
망향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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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남아서 그곳 하늘에 뜨고
구름 멀리서 고요히 눈을 감고
보낸뒤에도 남은 서러움
살아도 눈을 감아도 또 너를 묻게하고

자우림, 망향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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쿄카의 각성이 시작된지 두어 주가 지났다. 쿄카의 몸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쿄카의 상태를 보던 루시는 결국 그녀를 훈련에서 빼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츠시는 요즘 들어 눈에 띄게 나빠지는 쿄카의 상태가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쓰러지는 주기는 확실히 짧아지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루시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쿄카는 의무실에 실려가면 한참을 방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 쯤 되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은 세살짜리 어린아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쿄카는 아츠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캐내는 건 썩 내키지 않아 아츠시는 그녀를 가만히 두었다. 언젠가 말할 생각이 있다면 말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쿄카는 눈에 띄게 아츠시를 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늘 붙어다니던 둘이 서먹한 사이가 되자 다른 훈련생들이 둘이 싸웠느냐고 물었지만, 아츠시는 대답할 수 없었다. 차라리 싸웠다면 할 말이라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얘기를 해보기도 전에 쿄카는 자신을 멀리했다. 아츠시는 오늘도 비어있는 쿄카의 자리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쿄카…."
"대전 중에 다른 생각을 하다니, 여유부리냐?"

아차. 아츠시는 맹렬하게 턱을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을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젖혀 아슬아슬하게 피하고는 그대로 뻗어온 상대의 팔을 잡아 몸을 둥글게 말며 그를 집어 던졌다. 반동에 더해진 힘에 날아가버린 상대는 그대로 바닥에 구르다 벽에 부딪히기 직전에 멈췄다. 완전히 공격을 피하지는 못했는지, 턱이 조금 아렸다. 다 피한 줄 알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아츠시는 자세를 다잡고 달려오는 상대의 배에 주먹을 내질렀다. 아츠시의 주먹에 맞은 상대는 그대로 벽에 부딪히고는 주르륵 주저앉았다. 이걸로 끝이려나, 그렇게 생각하던 아츠시는 뒤에서 날아오는 발을 미처 보지 못하고 그대로 얻어맞고 말았다. 제법 묵직한 신발 굽이 아츠시의 볼을 스치며 상처를 남겼다. 욱신거리는 볼에서 배어나오는 피를 손가락으로 닦아낸 아츠시가 상대에게 반격하려는 때, 호각소리가 들리고 루시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자,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상처가 난 사람들은 치료받고 쉬세요!"
"감사합니다!!"

아츠시는 가만히 자신의 볼을 만지작거리다 큰 상처가 아니라 방으로 돌아가서 씻고 쉬려고 했다. 그런 그를 붙잡은 건 루시였다. 그녀는 아츠시의 목덜미를 덥썩 잡은 채 그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의무실로 그를 데려갔다. 요사노의 앞에 강제로 앉혀지고서야 아츠시는 루시를 쳐다보며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루시는 그의 말은 무시한 채 요사노에게 아츠시를 치료해달라고 했다. 요사노는 루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츠시의 볼에 소독약을 바르고는 밴드를 붙여주었다. 아츠시는 두 사람을 번갈아가면서 쳐다보다가 결심한 듯 질문을 던졌다.

"제 상처는 반나절만 있으면 나을 정도로 가벼운 상처인데 왜 일부러 치료해주셨죠?"
"가벼운 상처도 가볍게 보면 안 된단다. 알고 있잖니?"
"그건 보통 사람들의 경우잖아요. 저는 보통 사람들하고는 다르다고요."
"아츠시…."
"말해주세요. 뭐가 있는 거죠? 쿄카, 쿄카 때문인가요?"

아츠시의 물음에 두 사람은 답을 하지 못했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였다. 쿄카의 상태가 이상해진 것과 그들이 굳이 자신을 치료해준 것은 분명히 관계가 있었다. 대답해주세요. 거듭 채근하는 아츠시의 말에 요사노는 한참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옆에서 루시는 당황한 목소리로 그녀를 말리려고 했지만, 요사노는 어차피 곧 싫어도 알게 될 일이라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어렵사리 얘기를 꺼냈다. 사실 쿄카는 그대와 같은 하프가 아니라 순혈 뱀파이어라네, 아츠시군. 그녀의 담담한 말은 아츠시의 귀에 꽂혀 그대로 사고를 정지시켰다. 쿄카가, 여태껏 같은 처지라고 생각했던 쿄카가 하프가 아니라고? 그 뒤에 나온 요사노의 말에 아츠시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아직 인간의 피를 먹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확실하게 뱀파이어로 각성 중이라고 했다.

"쿄카가…그래서 요즘 저를 멀리했군요…?"
"그대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았을 게야."
"…왜죠?"
"그야, 지금까지 같은 종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존재가 충격을 받고 등을 돌릴까봐 그렇겠지."
"…저는 쿄카를 버리지 않아요!"
"그럼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게 좋겠지."
"어디에 있죠? 요즘 방에도 안 들어오는 것 같던데.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시죠?"

요사노는 미간을 찌푸리다 쿄카가 있는 곳을 말해주었다. 그 장소를 듣자마자 아츠시는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지하 감옥에 있네. 그대들이 처음 란포를 만난 곳 말이야. 그 차가운 곳에 간 지 며칠이 되었는지, 그것까지 요사노는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쿄카가 훈련을 나오지 않게 된 때를 거슬러 가보면 최소 사흘 이상은 그 곳에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마음 같아서는 란포를 한 대 치고 싶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쿄카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뱀파이어의 각성. 눈 앞에서 본 적은 없지만 자기를 쫓는 자들이 도대체 누구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문헌을 뒤지다가 어렴풋이 본 적이 있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이 나고, 죽이고 싶은 충동과 그것을 억누르려는 이성이 충돌하는 상태라고 했다. 그 충동을 안정시키려면 피를 주면 된다고 했었다. 그것이 무엇의 피인지는 상관이 없었지만, 각성 중이나 각성을 한 다음에 인간의 피를 입에 대면 다시는 인간 외의 생물의 피는 먹지 못하게 된다고도 써 있었다. 그저 지금은 쿄카가 무사하기만을 바라며 아츠시는 지하 감옥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감옥에 도착한 그가 본 것은 벽에 이어진 사슬에 묶인 채 기진맥진한 쿄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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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10. 8. 02:21

[문호스트레이독스]

노라가미 AU


銘名하다.


오다 사쿠, 다자이 오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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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두게 해주세요."

"어째서?"

"―다자이님이 부르는 이름이 싫어요."

"뭐?"


다자이는 의외의 대답에 멍하니 눈 앞에 있는 여자를 보았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부르는 이름이 싫다니. 차라리 신사가 없어서 힘들다던가, 의식주라도 제대로 해결하게 해달라고 하던가 하는 이유라면 어느 정도 납득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볼을 부풀린 채 자신에게 빨리 그만두게 해달라고 채근하듯 손을 내밀고 있을 뿐이었다. 다자이는 눈물이 그렁한 그녀를 본 채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울고 싶은 건 이쪽이라고. 지금 당장 해방하라고 하면 말이지―. 머리를 긁적인 채 눈 앞에 있는 여성을 빤히 보던 다자이는 손가락을 허공에 들어 그녀의 손목에 있는 것과 같은 글자를 적으며 말했다.


"쵸우키(朝器), 너를 해방한다."


다자이의 말과 함께 사라진 이름을 보던 여자는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웃음을 지으며 자기의 손목을 만지작거리다 석별의 인사도 없이 등을 돌려 사라졌다. 아니, 석별의 인사라면 있었다. 다음부터는 여자한테는 그런 이름은 주지 마세요!! 였던가. 그래도 반 년은 함께 했었는데. 그녀가 떠난 골목을 보며 멍하니 담벼락 위에 앉아있던 다자이는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몸을 튕기듯 내려오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오늘 밤은 어쩌지."


해가 지기 전에 묵을 곳을 확보해둘 필요가 있었다. 지금 그는 신기가 없는 상태였다. 아무리 뛰어난 신이라고 해도 신기가 없으면 신은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요컨대, 지금 다자이는 발가벗은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일단 가까운 역으로 달려간 그는 '관광안내도'라는 팻말이 붙어있는 곳에서 지도를 하나 가져와 펼쳤다. 당장 갈 수 있는 곳은, 곳은―. 한참을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지도를 보던 다자이는 곧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쉬며 지도를 구겨 던졌다. 이 넓은 땅에 잠시 신세를 질 수 있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다니. 조금 있으면 해가 져버리는데.


"정말 곤란하게 됐네."


딱히 잠을 자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몸을 의탁할 곳은 필요했다. 신기가 없는 신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 근처는 유독 안 좋은 기운이 넘쳤다. 아마도 병원이 있어서겠지. 병원은 온갖 잡귀들의 서식지이다. 어차피 차안의 존재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나마 빌릴 수 있는 신기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조차도 오늘은 힘들 것 같았다. 얼른 새 신기를 찾지 않으면 안 되겠네. 그렇게 중얼거리던 다자이는 얼핏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그 목소리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던 그는 곧 생각할 틈도 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돌아보지 말 걸.


[좋…은, 냄―새¿]

"―젠장!!!"


앞뒤를 가릴 틈은 없었다. 신기도 없는 지금, 아야카시에 먹히면 살아남지 못할 게 뻔했다. 다자이는 사람들 틈을 달리며 뒤쫓아오는 아야카시를 피해 도망갔다. 가끔 부딪쳐서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틈은 없었다. 몇 개의 골목을 지났고 몇 개의 빌딩을 지났는지 기억도 안 날 때였다. 사람들 틈에 섞여있는, 유난히 띄는 붉은 갈색 머리카락의 사내가 보였다. 옷차림은 조금 시대가 동떨어진 느낌이었기에 다자이는 내달려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갑작스럽게 불러세워진 것에 의문을 표하며 다자이를 보았다.


"무슨 일이지?"

"자, 자네―. 사령, 이지?"

"―그런데."

"내, 신기가 되어주지 않겠나?"


다자이의 제안에 사내는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누구도 손을 대지 않은 걸 발견할 걸 그랬나. 사내의 표정을 보던 다자이는 가볍게 혀를 찼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미 신들과 신기들 사이에 좋지 않은 쪽으로 얼굴이 알려졌기에 거절을 당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러려나 싶어 적당히 포기를 하려던 때, 사내가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리고 그는 주변을 살피다가 조금 먼 곳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했다.


"쫓기고 있지?"

"―어, 일단은."

"뭐, 어차피 나도 맨몸이라 오래는 못 버티고."

"해 주는 건가!?"

"그러지."


사내의 대답에 다자이는 걸음을 멈추고 허공에 글자를 쓰기 직전에 잠깐 그를 쳐다보았다. 사내는 왜 뜸을 들이냐는 표정으로 다자이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섬칫한 기운은 점점 자신을 조여오고 있었다. 아까의 일로 고민할 틈은 없었다. 다자이는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이면서 허공에 유려하게 글자를 써내려가며 주문을 읊었다. 「돌아갈 곳도, 갈 곳도 여의치 않은 너에게 머물 곳을 부여한다. 내 이름은 다자이. 시호를 쥐고 여기에 머물러라. 가명을 지녀 내 종복이 되리니, 이름은 뜻으로 그릇은 소리로, 내 명으로 신기가 되어라. 이름은 츠쿠, 그릇은 사쿠(作).」


"와라, 츳키."

"―이름 짓는 솜씨가 형편없네."

"불평은 나중에 해 줘."


사쿠의 말에 씁쓸하게 웃은 다자이는 곧 허공에서 라이플로 변한 그를 잡고 몸을 빙글 돌려 아야카시를 조준했다. 라이플이라, 보기 드문 형태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개머리판을 어깨에 댄 다자이는 가늠쇠로 아야카시를 조준한 채 그대로 영창을 이어가면서 벽에 기대어 손가락을 움직여 방아쇠를 당겼다. 영창이 끝남과 동시에 쏘아져 나간 총알은 정확히 아야카시의 본체에 박히더니, 곧 제멋대로 부풀어오르며 아야카시를 터뜨려버렸다. 불꽃놀이처럼 허공에서 터져버리는 아야카시를 보던 다자이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손에 쥐고 있는 라이플을 보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돌아와, 사쿠노스케."

"그게 돌림자냐?"

"뭐, 그렇지."

"아까 머뭇거린 건 이름 때문이고?"

"아침에 그것때문에 한 소리 들었거든. 작명이 형편없대."

"뭐라고 불렀길래?"

"아사노스케."


다자이의 대답에 사쿠는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혼자 뭔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그 반응에 울컥한 다자이는 괜히 그의 발을 툭툭 치며 불평을 표시했다. 사쿠는 미동도 없이 다자이를 보다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자이는 입술을 비죽이다가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났다. 말해두는데, 나랑 같이 있는 게 쉽진 않을거야. 일단 잘 곳도 없거든. 어깨가 욱신거리는지 가만히 주무르면서 덤덤하게 말하는 다자이를 보던 사쿠는 어깨를 으쓱이고 그를 따라 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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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10. 6. 16:11
문호스트레이독스
노라가미 AU
오다 사쿠, 다자이 오사무

신, 기원, 목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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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인간의 기원에서 태어난다. 나의 신은 인간이 바라는 수많은 소원들 중 하나에 기인해 태어났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때로는 어린아이 같고 때로는 더할 나위 없이 냉혹했다. 인간들이 그에게 빈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를 이 세상에 있게 했을까?

사실은 이런 생각조차 조심스럽다. 생각이 깊어지면 마가 끼기 쉽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사쿠노스케. 내 신은 나를 [사쿠]라고 부른다. 다른 신기는 아직 없다. 이 신이 몇번째 모시는 분이냐고 묻는다면 열 손가락 안에는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참 험난한 인생이었다. 아니, 인생이라고 하기엔 미묘하지만. 우리 신기는 어떤 해도 입지 않은 사령만이 될 수 있다. 어설픈 생령도 안 되고, 상처를 입어서도 안 된다. 다만 우리는 모두 인간이었기에 새로운 생명을 얻어도 잘못을 저지른다.

나도 그랬다. 이름을 받았다 뺏긴 적이 몇 번이고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주인을 찔렀기 때문이다. 신들은 자기를 찌른 신기를 용서하지 않는다. 뭐,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나도 그 당시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 만난 주인과 지내는 것에 비하면 절대 편하고 큰 세력들이었지만 오히려 마음은 지금이 편하다. 딱히 고행을 즐기는 건 아니지만, 내 주인은 참….

"신발 끈, 또 풀렸다."
"어라, 정말이네. 언제 풀렸지?"

이런 식이다. 얼이 빠져있다고 해야 할까. 머리는 좋다. 특히 살생에 관해서라면 무서울 정도로 날카롭고 영악하게 상황을 움직인다. 사실 그럴 필요는 없다. 신은 용서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이니까, 무엇을 하든 그의 자유다. 하지만 그는 종종 무언가에 저항하듯 나를 사용하지 않았다. 다른 신들은 내 주인을 이렇게 지칭한다.

—죽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들개, 재앙신.

그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 그를 만났을 때는 그의 신기가 되는 것을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지 못했던 것은, 당장 그의 손을 잡지 않으면 그가 죽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몰고 온 아야카시는 제법 덩치가 컸고, 그는 신기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사쿠]라는 이름을 받았다. 타카마가하라(신들의 언덕)에는 오르지도 못하고-그 곳은 신사가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 - 있고 주인은 굉장히 제멋대로에 손이 많이 가지만 이런 신에게 목숨을 맡겨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9. 26. 01:14
문호스트레이독스

아야츠지 유키토 & 에도가와 란포

공허한 살의의 윤무곡(輪舞曲)

6장
(完)
=========================

며칠 뒤, 츠지무라는 다나카 리에를 연행해 간 군경에게서 새로운 소식을 받았다. 그 순간 그녀는 뒷골까지 소름이 돋는 경험을 했다. 정말 오싹하다고 해야 할 지, 놀랍다고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에도가와 란포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대단한 사람-본인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츠지무라는 내내 그를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했었다. -이었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다나카 리에는 살인죄로 형을 살게 되었다. 자살교사나 자살방조죄가 아니고 살인죄가 적용이 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자 군경은 그녀가 자백을 했다고 말했다.

"자백…이요?"
[네, 그렇습니다.]
"뭘 자백한 건가요?"

츠지무라의 물음에 군경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다나카 리에가 다나카 레이코를 죽였다고 자백했습니다.' 라고 했다. 살해과정은 란포가 추리했던 것과 똑같았다. 다만 이어지는 군경의 말에 츠지무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레이코에게 자살을 하는 방법이 적힌 쪽지를 준 것이 리에였고, 그조차도 원래부터 자살을 하게 만들 생각이 아니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점점 신사를 멀리하는 것이 느껴져서 일종의 쇼를 하자며 허울 좋은 말로 그녀를 설득했다고 한다. 레이코는 사촌동생인 그녀의 말을 아무 의심 없이 믿었고, 그 뒤로 두 사람은 틈이 나는 대로 타이밍을 맞추며 각종 조작을 시작했던 것이다. 사건 당일, 레이코는 뒤를 부탁한다며 자신의 방에서 약을 먹고 잠들었기에 리에가 작업을 하기는 더욱 쉬웠다고 한다. 츠지무라는 전화기 너머의 군경에게 알려주어서 고맙다고 떨떠름하게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야츠지는 자신의 자리에서 느긋하게 신문을 보다가 츠지무라가 소파에 앉는 소리에 그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드디어 진실을 알아낸 모양이군."
"…네…."
"평소 자네들의 태도를 존중해 이번엔 특별히 그에게 사건을 풀도록 했네."
"…그, 그것 참 감사하네요…. 언제부터 알고 계셨어요?"
"처음부터 어느 정도 눈치는 챘었네. 정확하게 알게 된 건 자네가 란포군을 데리러 간 사이였지만."
"네?"

서고에서 안 나오셨던 것 아니었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츠지무라를 흘끗 쳐다본 아야츠지는 어깨를 으쓱이곤 피식 웃으며 한 김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넘기고 가볍게 의자를 돌렸다. 내가 저격수가 있다고 못 빠져나갈 것처럼 보이나? 그 말에 츠지무라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보다가 잔소리를 시작했지만 아야츠지는 전혀 듣지 않은 채 그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가 적은 단어는 단 네 글자, [예상대로] 였다. 어디론가 메일을 전송한 그는 자기 말을 듣고 있느냐고 묻는 츠지무라의 말이 두 번 정도 들리고서야 의자를 돌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을 쳐다보는 츠지무라를 보던 아야츠지는 아침이나 먹자며 부엌으로 커피잔을 들고 들어가버렸다.

「♪♩」

메일이 왔음을 알리는 착신음이 조용한 사무실 내에 퍼졌다. 모처럼 바쁜 날들이 지나고 한가한 사무실 내에 울리는 메일 착신음은 사원들의 신경을 집중하게 했다. 란포는 자기 자리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신문을 보다가 도착한 메일의 내용에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는 아츠시의 말에 란포는 그를 쳐다보다가 며칠 전의 일이 잘 해결되었다고 말하고는 다시 신문을 볼 뿐이었다. 웬일로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하지 않는 모습에 아츠시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타니자키의 부름에 그를 도와주러 자리를 떴다. 란포는 신문의 십자말풀이에 해답을 적어나가면서 교토에 강제로 갔던 날 밤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의 방에 찾아온 아야츠지는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은 채 곡차를 몇 잔 연달아 들이켰다. 그리고 술잔을 가볍게 내려놓으며 란포의 맞은 편의 벽에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은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아야츠지의 추리도 자신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애초에 진실은 하나 뿐이었으니까. 리에가 레이코를 죽이고자 마음을 먹은 계기는 뻔했다. 유산 상속이겠지. 실제로 아야츠지가 별도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다나카 레이코 앞으로 상당한 양의 유산이 상속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리에의 집은 어릴 때부터 양친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가 도벽이 심해 가산을 탕진한 상태에서 그녀가 의지할 것은 어머니와 조부모 뿐이었다. 하지만 기껏 잘 보여놨더니 가업을 이어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1상속자를 레이코로 정했으니, 리에의 입장에서는 분할 수 있는 일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지만."
"그렇지. 사람의 목숨은 돌이킬 수 없는 거고."
"흠, 이런 건 말해도 '사고사'가 발동되지는 않는 모양이지?"

사고사―. 그것은 아야츠지의 이능력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특1급 위험 이능력자로 분류되게 만든 이능력. 란포의 날카로운 시선에 아야츠지는 덤덤하게 곡차를 마저 따라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주변의 일을 조사한 것만으로는 조건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에 란포는 식어가는 녹차를 마시고는 가볍게 콧소리를 냈다. 그 사이 하늘 높이 떠오른 달을 잔에 담은 채 가만히 바라보던 아야츠지는 달과 곡차를 한번에 들이키고는 잔을 내려놓으며 란포를 쳐다보았다. 차광안경 너머로 란포를 한참 쳐다보던 아야츠지는 잔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만히 쓸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일은 자네가 나 대신 쇼를 좀 해줘야겠는데."
"―쇼라니, 듣기 불쾌하네."
"아닌가, 명탐정?"

란포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눈 앞에 있는 다른 명탐정을 바라보았다. 짙은 녹색의 눈과 차광안경에 색이 가려진 눈이 말없이 서로를 탐색했다. 직감적으로 란포는 알 수 있었다. 이 사람 앞에서는 '할 수 있는 척'을 해도 소용 없을 것이라는 걸. 아야츠지는 딱히 란포가 말하지 않고 있는, 아니,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사실을 들춰내지는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란포가 구미가 당길만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생각보다 그는 협상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아야츠지는 자신이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는 이상, 입을 열고 사건을 해결해버리면 이 자리에서 그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사고사'를 당할 것이지만 자네가 약간의 쇼를 해준다면 지금 자네의 실력을 의심하고 있는 츠지무라에게도 멋지게 자네의 대단함을 어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츠지무라―. 란포는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확실히 그녀는 지금 내 실력을 의심하고 있지. 아주 불쾌한 일이야."
"뭐, 그래도 말 몇 마디로 착실히 움직여주는 사람이네."
"흐음, 이번 일은 여러가지로 내키지 않았는데 잘 됐네."
"그럼 제안을 받아주는 건가, 명탐정?"
"좋아! 깜짝 놀라게 해 주지!"

긴 시간의 협상이 이뤄낸 결과물은 썩 나쁘지 않았다. 결국 란포는 츠지무라에게 제대로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었고, 범인은 얌전히 감옥으로 들어갔다. 이것으로 한 건 해결이었다. 란포는 아츠시가 냉장고에서 꺼내다 준 라무네를 마시면서 새로운 유희거리를 찾아 신문을 들여다보았다. 한편, 한참 식사를 준비하려는 아야츠지에게 핫케이크 가루를 건네며 츠지무라는 새삼스럽게 떠오른 의문을 제기했다. 리에씨는 왜 갑자기 자백한 걸까요? 란포씨는 그녀가 자백을 할 것도 알고 계셨죠? 그건 어떻게 안 걸까요? 아야츠지는 츠지무라를 가만히 보다가 핫케이크 가루를 체에 걸러내며 입을 열었다.

"초추리는 나나 자네같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잡아내는 모양이지."
"엑, 그럼 선생님도 모르세요?"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나. 자, 이걸 좀 저어주게."
"아, 네!"

적당량의 우유를 더한 보울을 거품기와 함께 츠지무라에게 건넨 아야츠지는 곁들일 만한 것을 찾기 위해 냉장고를 뒤졌다. 한참 열심히 휘젓던 츠지무라는 퍼뜩 이건 자기가 할 일이 아니라며 그를 다그쳤지만, 아야츠지는 핫케이크가 먹고 싶다면 그냥 열심히 저으라고 말하며 냉장고에서 몇 가지 과일의 마멀레이드와 잼을 꺼냈다. 츠지무라가 의문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실 그 자리에서는 이미 도망을 갔어야 한다. 사고사로 보이게 꾸몄다면 더더욱. 유산을 받기 위해서는 군경에 잡혀들어가야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도망을 가서 차라리 사건이 조용히 가라앉을 때까지 숨어 지냈다면, 어쩌면 유산을 받아서 완벽하게 인생을 바꿀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파악하기 위해 수고를 해야 하는 귀찮은 존재였다. 아마도 일말의 죄책감이라는 것이 그녀를 그 장소에 묶어두었던 것이겠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얼마 없는 혈육을 죽였지만, 그 혈육은 자신을 아껴주던 사람이었고, 아무 의심도 없이 자기를 믿어주었다는 것이 다나카 리에를 옭아매었다. 교고쿠가 말했던 대로다. 죄책감과 증오가 얽힌 뫼비우스의 띠는 결국 모두에게 어떤 해결방안이 되지 못했다. 귓가에서 거슬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이번 사건은 재미있었나, 아야츠지."
"―혼자가 아니라서 말이지."
"뭐, 자네들의 분투는 보는 쪽도 즐거웠지."

두뇌가 둘이 모이니 조언도 필요없었고. 그렇게 말하며 교고쿠는 낮게 웃었다. 아야츠지는 그곳을 조용히 노려보다가 냉장고의 문을 거칠게 닫았다. 그 반동으로 그릇이 흔들리는 소리에 츠지무라가 놀랐는지 아야츠지를 쳐다보았다. 아야츠지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 그렇게 물어오는 그녀에게 아야츠지는 손이 미끄러졌다고 태연히 말하고는 그녀가 반죽을 끝낸 보울을 받아들고 프라이팬을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조금 잘라낸 버터를 얹어 녹여내는 소리가 고소한 버터의 냄새와 함께 부엌을 채워갔다. 그 너머에서 교고쿠의 음산한 목소리가 들린다. 다음엔 더 재미있는 사건으로 놀아주겠네. 기대하게, 아야츠지. 연기처럼 조용히 스러져가는 목소리를 듣던 아야츠지는 말없이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버터의 위에 핫케이크 반죽을 부었다. 동그랗게 퍼지며 익어가는 냄새가 새삼스럽게 위를 자극해온다. 이미 기대에 가득한 츠지무라의 시선을 느끼며 아야츠지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음에도 질 생각은 없다, 교고쿠.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9. 24. 23:12
문호스트레이독스

아야츠지 유키토 & 에도가와 란포

공허한 살의의 윤무곡(輪舞曲)

5장

=======================

다음날 아침, 츠지무라의 채근에 못이겨 일찍 일어난 란포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료칸의 로비로 나갔다. 용의선상에 오른 몇 안되는 마을 사람들이 전부 모인 것을 본 그는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일인용 소파에 앉아 사람들을 둘러볼 뿐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불려나온 아야츠지도 팔짱을 낀 채 란포의 뒤쪽에 서서 사람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 쳐다보면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탐정들은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에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참다 못한 마을 사람 하나가 목소리를 내서 아침부터 사람을 불러다 놨으면 말을 해야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을 하자,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아야츠지는 조용히 시선을 츠지무라에게 돌렸고, 츠지무라는 시선을 맞추지 못한 채 작게 헛기침을 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멈춘 것은 란포였다. 그는 탕,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에 발을 올려놓고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거 되게 시끄럽네. 어차피 할 일도 없었잖아?"
"…란포씨!"

아니, 도발을 하시면 어떡해요. 츠지무라는 지끈거려오는 이마를 짚었고, 아야츠지는 어깨를 으쓱이며 란포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란포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쳐다봤다. 가늘게 뜬 녹색 눈과 마주친 최초의 발화자는 어깨를 움찔거리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란포는 그를 곁눈질로 흘끗 보다가 다시 눈을 접으며 웃고는 그대로 다리를 꼬고 입을 열었다. 그렇게 궁금하다면 아야츠지 탐정에게 물어보지 그래?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단 많이 알고 있을 걸. 그렇지? 란포는 대답에 대한 책임을 아야츠지에게 돌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차광안경 너머로 란포와 눈을 마주친 아야츠지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언제나처럼 곰방대를 물 뿐이었다. 안절부절 못하고 입술을 질끈 깨무는 츠지무라를 본 아야츠지는 피식 웃고 란포의 어깨를 토닥였다.

"나는 사정이 있어 함부로 추리를 하지 못하네. 자네의 멋진 추리를 기대하지, 명탐정."
"―뭐? 어쩔 수 없구만."

이번만은 특별히 해주지. 그렇게 말하며 란포는 품에서 검은 사각의 테를 가진 안경을 꺼냈다. 착, 익숙한 손놀림과 함께 펼쳐진 안경을 쓰며 란포는 자신있게 능력명을 외쳤다. 초추리. 크게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새라고는 란포가 장착한 안경이 전부였지만, 그는 의기양양하게 사람들을 둘러보다 안경을 가볍게 치켜올렸다. 그녀는 자살했네. 그게 가장 먼저 나온 결론이었다. 자살? 자살이라고요? 츠지무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구보다 먼저 란포에게 물었다. 란포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가 다시 똑바로 사람들을 쳐다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자살이라니까. 그의 말에 사람들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란포의 말을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란포는 그런 그들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일일이 설명을 해줘야 하나? 정말 번거롭네, 댁들."
"라, 란포씨. 그러지 마시고 설명을 좀…."

탐정들은 다 이렇게 어딘가 삐뚤어진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츠지무라는 조금 아쉬운 소리를 했다. 츠지무라의 애타는 말에 란포는 어깨를 으쓱이고 설명을 시작했다. 이번 일은 치밀하게 계획된 자살이었다. 자살처럼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계획된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다나카 레이코는 다나카 리에와 함께 서고의 배치를 바꿨고, 일부러 공을 들여 가짜 저주를 행했다. 리에가 옮겨놨다고 하는 그 짚인형들은 애초부터 나무에 박혀있던 적이 없었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는. 그 하나는 나무와 함께 기가 막히게 타버렸다. 그것을 위해 시행날짜까지 철저하게 계산을 했을 터다. 무슨 일이 생겨도 피해가 커지지는 않고, 자연재해에 말려들어 다른 증거도 사라져버릴 날을 말이지. 서까래가 높이 올라갔던 이유는 사당의 독특한 구조 때문이었다. 사당의 높이는 인공적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아마도 오래 전부터 자연재해를 자주 겪었던 마을이라서 되어있었던 장치일 것이라고 란포는 말했다. 

"그럼, 자살한 흔적이 없었던 이유는…."
"빗물에 전부 쓸려나갔기 때문이지."
"…그, 그렇군요."
"뭐, 그런고로 당신들은 무죄라네. 돌아가도 좋아."

란포가 손을 휘저으며 하는 말에 마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저마다 그녀가 자살한 이유를 멋대로 추측하면서 료칸을 나섰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나서야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츠지무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란포씨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비가 오기 전에 목을 매달았다는 뜻이 된다. 그것을 고정하고 있던 것은 나무에 박혀있던 짚인형이었고, 짚인형은 나무를 반쯤 태우면서 불에 함께 타서 사라져버렸다. 그럼 나무에 밧줄을 인형과 못으로 고정해놨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게 불에 타면서 그녀의 목을 걸었고, 그리고 그대로 서까래가 올라갔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란포의 추리는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한참 생각에 잠겨 중얼거리던 츠지무라는 고개를 들어서 란포와 아야츠지를 쳐다보았다.

"저, 란포씨…."
"왜 그러나, 츠지무라군?"
"아직도 납득이 잘 안 되는데요…. 그걸 전부 혼자 했단 말인가요?"
"난 혼자 했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네?"

츠지무라는 멍하니 란포를 보다가 아직 남아있는 인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그 곳에는 리에가 땅을 쳐다보고 서있었다. 설마, 아야츠지 선생님이 지나가듯 중얼거렸던 공범이 그녀란 말인가? 리에는 츠지무라의 시선에 가만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머뭇거리다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츠지무라는 란포와 아야츠지, 그리고 리에를 번갈아보다가 가만히 그녀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저항은 없었다. 군경의 손에 리에를 넘긴 츠지무라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멀어져가는 그녀를 보다가 문득 떠오른 듯 아야츠지를 돌아보았다.

"아야츠지 선생님."
"왜 그러나, 츠지무라군?"
"선생님은 이걸 다 알고 계셨죠?"
"대충은 말이지."
"그런데 왜 포기하신 거죠? 리에씨가 레이코씨의 자살을 도운 거라면, 그녀에게 악의는 없었잖아요?"
"그걸 장담할 수 있나?"
"…네?"
"그녀가 완벽하게 악의가 없었다고 할 수 있었냐는 말이네."

정말 언제나 머릿 속이 평화로워서 좋겠군, 자네는. 아야츠지의 핀잔이 귓전을 때린다. 츠지무라는 볼을 부풀렸지만 아야츠지의 말에는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리에씨 본인이 아닌 이상 그녀의 의도를 전부 파악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고 이 세상에 백퍼센트라는 것은 없다. 그래서 선생님은 포기해버리신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옆에서 맑은 구슬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퐁.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샌가 라무네를 손에 들고 있는 란포가 보였다. 란포는 츠지무라에게 계산을 부탁하고는 음료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캬, 하는 소리와 함께 신나보이는 표정에 츠지무라는 눈물을 삼키며 그의 음료수 값을 대신 지불했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 란포는 해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츠지무라군."
"네?"
"난폭한 운전은 좀 참아줄테니까 다시 데려다주게."
"…네?"
"돌아가는 방법을 모르거든."
"…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잘못 걸린 것 같다. 츠지무라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이것은 사실 내가 얼마나 운이 나쁜지를 알려주는 게 아닐까? 왼쪽에는 아야츠지, 뒤에는 란포. 뭔가 숨막힐 것 같은 두뇌의 조합이 자신의 차에 오른 것을 보며 츠지무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운전에 집중하자, 집중. 자신의 뺨을 짝, 소리가 나게 때리고 차에 오른 그녀는 가만히 애마에 시동을 걸었다. 현장을 뒤로 하고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차 안은 어느 곳보다 무거운 공기로 차있었다. 두 명의 탐정은 한 마디도 섞지 않은 채 창 밖을 쳐다보며 각자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괜히 장기가 조여드는 기분에 츠지무라는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저, 리에씨의 처분은 어떻게 될까요?"
"글쎄. 자살교사? 살인방조?"
"…혹은 살인죄겠지."
"네? 란포씨가 자살이라고 밝히셨잖아요?"
"자살이라고 판단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거라네."
"…네?"
"아마 본인이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전부 털어놓겠지. 취조할 때."
"그럼, 일부러…추리를 틀렸다는 말씀이세요?"
"자네는 바보인가?"

틀리다니. 추리를 틀린 게 아니라 전부 말하지는 않은 거지. 그렇게 말하며 란포는 다시 창 밖을 쳐다보았다. 추리를 일부러 전부 말하지 않았다고? 범인이 자백하게 만들기 위해서? 보통 거기까지 생각해서 말하나? 초추리란 이런 것도 가능하게 하는 이능력인가?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지기 시작한 츠지무라는 곁눈질로 아야츠지를 쳐다보았다. 아야츠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표정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9. 18. 04:08
문호스트레이독스

아야츠지 유키토 & 에도가와 란포

공허한 살의의 윤무곡(輪舞曲)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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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안에 들어선 란포는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옆에서 츠지무라가 하는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무엇이 불만인지 미간을 좁힌 채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의 행동에 적잖이 당황한 츠지무라는 바로 그를 쫓아 나갔지만, 아야츠지는 그저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츠지무라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니, 물론 스스로 명탐정이라고 칭하고 있는 저 사람이 기분이 좋지는 않은 상태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본인이 입으로 거듭 말한 것처럼 다른 탐정이 내던진 사건을 의뢰한 것이기도 했기에 그 점은 나중에라도 충분히 사과할 생각이었다. 그 전에 이 사건은 해결해주어야 했다. 아야츠지 선생님이 던져버린 사건이었으니까. 하지만 란포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저…."
"조용히."
"네?"
"츠지무라군, 자네는 말이 너무 많아."

그 사실을 알고는 있나? 그렇게 말하며 란포는 삐딱하게 서서 잠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츠지무라는 할 말을 잃은 채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니, 물론, 아야츠지 선생님한테도 시끄럽다는 얘기를 아주 들은 적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눈 앞에서 비슷한 말투로 비슷한 취급을 받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츠지무라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것을 본 란포는 한숨을 내쉬고는 사당을 다시 한 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볼을 긁적이다가 쪼그려 앉아있는 츠지무라를 불렀다. 저기, 츠지무라군. 이거 급한 사건인가? 그 말에 츠지무라는 다시 한 번 눈을 깜박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급하지 않으면 부르러 가지도 않았을 거라고요. 이 분은 또 무슨 말을 하는 거람? 표정에 명백히 드러난 츠지무라의 불만을 보던 란포는 입술을 비죽이 내밀고는 검지를 세우며 말했다.

"시간이 조금 필요하거든."
"시간이요?"
"하루."
"…어, 하지만 란포씨의 이능력은…."
"그래, 내 이능력은 초추리. 어떤 사건이든 순식간에 해결할 수 있지."
"그럼, 뭐가 문제인가요? 지금 당장 해결하시면 되잖아요!"
"사람에게는 사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지."

사정? 무슨 사정이요? 츠지무라는 목 끝까지 튀어나온 불만을 애써 누르면서 그러다 범인이 도망가면 어쩌냐는 말로 사건 해결을 독촉했다. 하지만 그 시도도 조금 뒤에 유유자적하게 걸어나온 아야츠지의 말에 완벽하게 막혔다. 범인은 도망가지 않을 거네. 아야츠지는 그렇게 말했다. 츠지무라는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따져 물으려다 멈칫했다. 범인은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선생님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아시는 거지? 이미 진상에 도달하셨다는 건가? 그런데 포기 선언을 하셨다고? 아니, 그야 뭐 선생님이 트릭을 밝혀버리면 곤란하니까. 곤란해지기는 하는데…. 주저앉은 채 복잡해지는 머리를 감싸는 츠지무라를 보던 란포는 어깨를 으쓱이곤 그럼 긍정의 의미로 알겠다고 말하고는 우선 잘 곳으로 안내해달라며 그녀를 채근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알았다고요."
"대답은 한 번이면 족하네."
"…으윽."

란포의 말에 앓는 소리를 내고 비틀거리며 일어난 츠지무라는 처연한 눈빛으로 아야츠지와 란포를 한 번 보고는 그들을 료칸으로 안내했다.  이 두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처럼 사건을 해결할 정도로 대단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 츠지무라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 뿐이었다. 란포는 료칸의 규모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 눈치였지만, 이 마을에는 그 곳을 제외하면 외부인이 묵을 만한 시설이 없었다. 여장이라고 할 것도 없는 간단한 짐을 대충 방에 던져놓은 란포는 느긋하게 료칸의 주인이 준비해 준 요리를 먹고 온천욕을 즐겼다. 츠지무라는 그런 란포의 행동을 보며 입이 바짝 타들어가는 느낌이었지만, 부디 내일은 란포씨가 사건을 해결해 줄 마음이 들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자신에 새삼스럽게 좌절했다. 그런 츠지무라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란포는 느긋하게 방의 장지문을 열어놓고 조금 일찍 떠오른 달을 감상하고 있었다. 조금 뒤에, 노크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지만 란포는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암묵적인 방 주인의 동의에 아야츠지는 성큼성큼 걸어와 낮은 상에 곡차를 올려놓고는 맞은 편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았다.

"달은 어떤가, 란포군?"
"아직 완벽하지 않네."
"역시 절정에 오르기엔 이른 시간이었나보군."
"뭐, 대화는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그것도 그렇군."
"이능력을 쓰기 전에 확실히 해둬야 할 것이 있었거든."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달을 보고 있던 시선이 그제야 아야츠지에게 향했다. 아야츠지는 차광안경을 손 끝으로 가볍게 건드려 고쳐쓰고는 란포를 마주보았다. 확실히 해둬야 할 것이라. 말해보게, 자네의 추리를 듣고 싶군.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그렇게 말하는 아야츠지를 보던 란포는 미간을 찌푸린 채 결론부터 말했다. 이 사건은 자살이네. 타살이 아니야. 다만, 그렇게 보이게 꾸며졌을 뿐. 그리고 자네는 그것을 알고 있지, 아야츠지 탐정. 긍정의 대답을 이끌기 위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필요없었다. 긍정도 할 필요 없고, 부정도 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아야츠지는 조용히 앞에 놓인 잔에 곡차를 따를 뿐이었다. 말이 끊긴 방에는 말간 액체가 잔을 채우는 소리만이 반복해서 들리고 있었다.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9. 15. 21:27
[문호스트레이독스]
개인세계관 크로스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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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RRR…]
[여보세요.]

짧은 신호가 끝나자 전화기 너머에선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쿠니키다는 그에게 휴식을 방해해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최근에 급상승한 마약상의 리스트를 찾아봐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일말의 희망이었다. 신흥 세력이라면 기록이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이 좋다면 이미 감시망에 올랐을 수도 있다. 정말로 마약상이 잡아갔다면 그가 어디까지 무사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짙은 한숨소리가 들리더니 두어 시간만 기다리라고 말했다. 쿠니키다는 거듭 부탁한다며 전화를 끊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게 이렇게까지 애타는 것일 줄은 몰랐다. 이런 상황에 도움이 되는 이능력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그를 애타게 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조금 뒤에 걸려온 전화는 쿠니키다를 반색하게 만들었다. 조용한 사무실에 울리는 진동소리에 퍼뜩 쿠니키다는 생각을 멈추고 전화를 받았다.

[아, 나야.]
"그래, 말해라."
[음, 조금 전에 부탁한 건 말인데?]
"뭔가 알아냈나?"
[…관계자가 직접 찾아왔어. 말하는 건 잘 모르겠지만, 아주 허위는 아닌 것 같아서.]
"…지금 그쪽으로 가겠다."

관계자라니, 어떤 관계자인 걸까? 예전에 그 조직에 있던 사람? 아니면, 그 밀매상을 쫓는 자? 누구든 상관없었다. 그들을 잡을 단서를 제공해 준다면 그것으로 감사했고, 만에 하나 협력을 얻는다면 든든한 원군이 될 것이다. 쿠니키다는 탐정사의 사람들을 몇 데리고 거리로 나섰다. 그 시간, 그들이 애타게 찾고 있는 이는 오랜 친구와의 회포를 풀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이제 세상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였다. 친구란 게 이렇게 편한 존재였던가? 무언가 할 것이 더 있는 것 같았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가끔 손으로 느껴지는 감촉만이 살아있다는 감각을 일깨워줄 뿐이었다. 그대로 그와 몇날 며칠을 얘기를 하며 지샜다. 사실 많은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자신의 말을 들어줄 뿐이었다. 떠드는 것은 언제나 혼자였다. 하지만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다 사쿠가 눈 앞에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다자이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오다 사쿠는 그런 그를 보며 같이 웃어줄 뿐이었다. 평생 연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행복이라는 것이 이런 감정인걸까, 다자이는 흐릿해지는 감각 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보이는군, 다자이."
"오랜만에 자네를 만나서―말이지."

다자이는 문득 머릿속을 스쳐가는 의문에 잠시 말을 멈추었다. 오다 사쿠는 그를 가만히 쳐다볼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오랜만? 왜 오랜만이지? 얼마 정도의 오랜만이지? 간부가 된 이후로 나는, 나는―. 다자이는 혼자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머리를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 같다.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들이 뒤섞여 지독한 두통과 함께 밀려온다. 다자이는 끊임없이 생각의 파도에 떠밀리면서 천천히 뒤섞인 조각을 맞춰나갔다. 오다 사쿠는 왜 여기에 있지? 나는 왜 그가 이곳에 있는 것에 의문을 품고 있지? 지금 나는 왜 이런 차림을 하고 있지? 여기는 어디일까? 눈을 감고 홀로 생각에 잠겼던 다자이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벽에 세게 들이받았다. 피가 조금 흐른 것도 같지만 이 정도 아픔은 익숙했다. 오히려 그제야 정신이 똑바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그런가, 그랬었군. 다자이는 낮게 웃으며 품에 늘 지니고 다니던 권총을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안전장치를 풀어낸 그는 오다 사쿠를 향해 총을 겨눴다. 오다 사쿠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그래?"
"―아니, 틀려."

자네가 보여야 할 반응은 그게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다자이는 서글프게 웃었다. 오다 사쿠는 이런 것으로 당황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재미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표정을 보여줄리가 없었다. 이제야 머릿속에서 흩어진 퍼즐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렇군, 내가 당했던 거였어. 다자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그의 오랜 친구에게 작별을 고했다. 손가락을 움직여 방아쇠를 걸고, 당겼다. 타앙, 탕. 두 발은 전부 오다 사쿠를 뚫고 나갔지만 그에게서는 피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을 뿐이다. 오다 사쿠를 뚫고 나가버린 총구를 가만히 손으로 잡으며 다자이는 메마른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훑었다. 씁쓸한 가루가 혀에 붙어 입안에 말려 들어왔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타액과 섞어 바닥에 뱉어낸 다자이는 화상을 입은 손으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주변에는 깨어나지 못하는 이들로 가득했다.

"…마약이라."

자신이 당한 것의 정체를 알아챈 다자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주변을 살피다 발견한 감시카메라에 똑바로 총구를 들이댔다. 그 렌즈의 정중앙에 이죽이는 미소와 함께 세번째 손가락을 당당하게 펴서 날려준 그는 그대로 감시카메라를 향해 총을 쏘았다. 탕, 탕. 첫 발은 감시카메라의 렌즈를 명중했고, 두 번째는 감시카메라가 달려있는 지지대를 맞췄다. 제법 요란한 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그러나 누구도 깨어나지 않았다. 아니, 이미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중독이 되어있었다. 처음 본 사람들을 구할 정도의 의리는 없었기에, 다자이는 그들을 둘러보다 무심하게 문의 손잡이를 총의 개머리로 내려찍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그와 동시에 그를 맞이한 것은 수많은 총구였다.

"어라…."
"생각보다 금방 깨어났네, 멋진 오빠?"
"하하, 약에는 제법 내성이 있어서 말이지?"
"당신의 환상도 제법 좋은 연료가 될 것 같았는데."
"약물로 보여주는 그것 말인가?"
"뭐, 조금만 보여줘도 항상 다시 찾아오거든. 인간이란 참으로 나약하지."
"자네들이 고약한 게 아니고?"
"무슨 서운한 말씀을. 우리는 꿈을 파는 거야. 아름다운 꿈이지. 평생 깨어나지 않아도 되는."
"―미쳤군."

다자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동시다발적으로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벨은 빙긋이 웃으며 다자이에게 총을 내려놓지 않으면 지금 여기서 온 몸에 구멍이 나버릴 것이라고 말했고, 다자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높이 들고 총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 반동으로 발사된 총은 정확히 천장의 스프링클러에 맞았고, 화재경보가 울림과 동시에 강렬한 물줄기가 사방으로 쏟아져 나왔다. 다자이는 물줄기에 그들이 당황한 틈을 타 몸을 빠르게 움직여 가장 가까이 있는 졸개의 급소를 찍어 넘어트리며 그의 총을 탈취해 문을 향해 내달렸다. 약물중독으로 죽는 것은 그가 항상 그리던 결말이 아니었기에, 그는 뒤를 급히 쫓아오는 이들을 쳐다보며 들고 있는 총을 난사했다. 물에 젖어서인지 두어 발 정도만이 제대로 쏘아졌지만, 총알은 사방으로 흩어져 적의 발을 묶었다. 산탄총이라니. 정말 구멍을 낼 생각이었군. 다자이는 낮게 휘파람을 불며 총을 그들을 향해 냅다 던지고는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있는 힘껏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저 덜컥거리는 소리만이 잦아드는 물줄기 사이로 들려왔다.

"출입구가 하나뿐이라면 막는 건 어렵지 않아, 멋진 오빠."
"…꽤 철저하군, 예쁜 아가씨."
"우리도 장사는 해야하니까 말이지."
"아쉽게도 이번엔 철수해야겠는데?"
"오빠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모르는데? 그리고 오빠는 여기에 '없었던 사람'이 되는거야."
"그건 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지만."
"…이지만?"
"아직 죽을 때가 되지는 않은 모양이야."

그렇게 말하고 다자이는 귀를 막고 문에서 한 발짝 떨어지며 웃었다. 그와 동시에 꽉 막혔던 철문의 손잡이가 터져나왔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에서는 다자이를 찾는 쿠니키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자이는 여유롭게 연기가 나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다고 말하고는 걸어나갔다. 다자이가 연기 너머에서 나타난 것과 동시에, 요코하마의 군경과는 다른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들이닥쳐 철문 너머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잔뜩 젖어버린 머리를 털고는 쿠니키다가 건넨 자신의 타이를 받아 다시 매면서 다자이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쿠니키다에게 못 보던 옷차림의, 아마도 군경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 대해 묻자 쿠니키다는 저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들이라고만 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다자이는 흐응, 하고 낮은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이곤 쿠니키다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아직도 입에서는 달콤쌉싸름한 맛이 돌고있는 것만 같다.


Posted by 스위스무민
2016. 9. 15. 12:13
[문호스트레이독스]
개인세계관 크로스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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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의 실종으로 탐정사는 발칵 뒤집혔다. 평소라면 크게 신경쓰지 않았을 사람들도 그의 유류품을 앞에 두고는 자못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쿠니키다는 다시 한 번 주변 탐문을 나섰고, 타니자키는 인터넷 상의 소문을 뒤지기 시작했다. 조사를 하면 할수록 여느때처럼 때가 되면 돌아오겠지, 라고 낙관하기에는 희망적인 소식이 없다는 것에 사람들은 더욱 불안해 했다.

한편, 다자이는 누군가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흐리멍텅한 시야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초점이 천천히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보인 것은, 낯익은 붉은 갈색의 머리카락과 걱정을 가득 담은 조금 연한 갈색의 눈동자였다. 익숙한 베이지색의 트렌치 코트와 검은색의 스트라이프 셔츠에 다자이는 헛웃음을 웃었다.

"드디어 내가 미쳤나? 헛 것이 보이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사람을 눈 앞에 두고."
"정말 자네인가?"
"정말이지."

다자이는 손을 들어 오랜 친구의 어깨를 잡아보았다. 온기가 느껴진다. 정말 미친 게 틀림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게 환상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머릿속을 흘러다녔다.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어찌해야 좋을 지 모르겠어서 그저 넋을 놓고 웃었다. 하하하, 하하하하. 함께 웃어주는 사람도 없는 공허한 웃음소리가 허공에 퍼졌다. 이제는 정말 죽어버렸나보다. 그 벨이라는 미인의 공격으로 나, 다자이 오사무는 죽어버린 모양이다. 다자이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토록 바라던 인생의 결말이 자살도 아닌 타살이라니, 그것도 미인의 손에 말이지. 나쁘지는 않지만 만족스러운 결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죽어버렸다면 살아날 도리는 없다. 그렇게 생각한 다자이는 우선 자신의 감각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오다 사쿠."
"왜 그러지?"
"내 뺨 좀 꼬집어봐. 세게."

다자이의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를 쳐다보던 오다 사쿠는 손을 뻗어 있는 힘껏 그의 볼을 잡아 늘였다. 아야야, 아프긴 하군. 그렇게 중얼거린 다자이는 가만히 자신의 볼을 문지르다 바닥에 털썩 드러누워 버렸다. 높은 천장을 보던 그는 문득 여기가 어디지? 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지금은 더이상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한참 탐문을 벌이던 탐정사의 사람들이 알아낸 것은 사라진 사람들이 사라지기 전에 매우 힘들어 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누군가에게서 받았다며 정제된 연보랏빛의 알약을 가지고 왔다고 했다. 가장 최근에 실종신고를 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조금 들뜬 모습으로 돌아온 실종자의 몸에서는 양귀비의 향이 났다고 한다. 양귀비, 우울증, 그리고 사라진 사람들. 머릿속에서 단서를 조합한 쿠니키다는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마약상이었나."
"엑, 마약…이요?"
"양귀비를 정제하면 상당히 강력한 환각제를 만들 수 있어요."
"그, 그렇군요…. 잠깐만요, 그럼 다자이씨는…."
"딜러에게 납치 된 거지."
"에엑…! 무슨 수로 찾죠?"
"어차피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그렇게 많지 않다. 군경에 협력을 요청하지."
"알겠습니다. 전 사장님께 보고할게요."
"부탁한다, 타니자키."

마약을 찾는 데에는 훈련된 마약탐지견 만큼 좋은 수단은 없다. 그렇기에 협력을 요청하려던 쿠니키다는 전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그러나 조금 뒤에, 그는 다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마약상이 돌아다니는 데 포트마피아의 움직임이 없었다. 그게 마음에 걸렸다. 이국적인 외모의 여성. 하나같이 아름다웠다고 말하던 그녀는 분명히, 일본인은 아니었다. 그럼 이 도시의 외부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마피아들은 이 외부인이 돌아다니는 걸 묵인하고 있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이 외부인은 마피아조차도 눈치채지 못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건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복잡해진 머리를 거칠게 손가락으로 흩은 쿠니키다는 전화기를 들어 아까 누르려던 것과는 다른 번호를 눌렀다.
Posted by 스위스무민